성경을 가르쳐야 교회가 산다
노우호 목사
오늘날 교회가 설교는 매우 열심히 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다.
만약 목사가 성경을 몰라서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큰 일이다.
반대로 알고도 가르치지 않은다면 이는 더욱더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일반 성도들의 지적 수준이 많이 향상되어서
자신들이 직접 성경을 알기를 갈망하고 있다.
성경을 더 이상 목사의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때가 되었다.
지금 이만희라는 사이비 이단이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무료 성서신학원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기성교회 성도들은 무려 10만명이나 끌어 모았다.
그들이 끌어 모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성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직접 알고 싶어서 찾아간 기성교회 성도들이다.
그들은 매일 저녁과 매일 새벽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있다.
우리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성도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영적으로 주리고 갈급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 보자 !
"사 55:1-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성경은 참고서가 아니라 오리지날 텍스트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대학교와 교회는 성경을 참고문서 정도로 여기고 있다.
교과서를 맡은 교사는 제 1과부터 마지막 단원까지 성실히 가르쳐야 한다.
멧세지를 받은 사람이 그 멧세지를 전할 책임을 맡았을 경우에는
그 멧세지에 임의로 더하거나 마음대로 건너띄거나 할 수가 없다.
성실하게 전해도 원만하게 의사가 통할까 말까 할 성경을 여기 저기서
아무런 체계도 없이 이말 했다가 저말 했다가 하면 성도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다.
단 두 시간이면 끝이 나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도 처음부터 보지 않고
중간에서 보다가 여기 저기를 보아서는 일관된 흐름을 알 수가 없다.
성경은 그 분량이 1754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책이다.
문학의 장르를 보아도 단순하지가 않다.
율법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예언이 있고 시가 있으며
오페라 처럼 기록된 책이 있고 희곡처럼 기록된 책이 있다.
서간문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 있고
기행문처럼 쓰여진 책도 있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기본적인 인트라덕션이 필요하다.
①언제 ②어디서 ③누가 ④누구에게 ⑤무엇을 ⑥어떻게 ⑦왜 기록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읽어야 한다.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 박사과정을 다 마쳐도 66권 중에 단 한권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책이 없다. 따라서 교회 출석을 성실히 하고 있는 성도가
10년 혹은 20년 아니 평생을 교회 다녀도 66권 중에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성경은 없다.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에서 구약은 율법이라 하여
우리와 상관 없는 것으로 알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은 66권이다.
그 어느 한 권도 마음대로 소외시키거나 등한히 할 권리가 없다.
66권 중에 필요 없는 책은 단 한권도 없다.
사실로 말하면 서구의 신학은 제대로 정립된적이 없었다.
초대 교회부터 시작된 박해는 311 년까지 전후 10차에 걸쳐서 혹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할 때 교회는 언제나 지하에 있었다. 지하교회의 교육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신약 성경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경이 없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대체로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박해 시대 교회는 오히려 순수하고 거룩했다.
순교를 무릅쓰고 증거하는 그 증거에 깊은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었고
또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사변적인 신학이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 단순한 기독교의 복음과
단순한 멧세지 그리고 실천적인 형제애로 인하여 교회는 순수했다.
그러나가 AD. 313 년 콘스탄티누 황제가 기독교 자유를 선포하자
지하에 있던 교회는 지상으로 올라 오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시작된 교리 논쟁은 급기야 325년 니케아 회의로 이어졌고
그 후로 약 200년간 교리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
사탄은 로만 카톨릭이란 희안한 종교를 발명하여
주후 590년 교황 그레고리 1세가 교회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로만 카톨릭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하고 1000년 동안 부패해 갔다.
그로부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즉 1517년까지는 무려 1000년이 지나 갔다.
루터나 칼빈 죤 후스 쯔윙글리 위클리프 파렐 등의 인물들이
불과 1세기 정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미 유럽의 지성인들은 로만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목도하고는
교회를 떠나서 이성주의 인본주의 계몽주의로 기울어진 후였다.
유럽의 교회가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찰스 다윈 같은 인물들이 나타났고
독일에서도 진화론자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마침내 무신론이 나오고
유물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공산주의가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지만 신학자들과 교회는 이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충격이 있은 후에는 신학자들이 위축되어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무슨 말은 하면 신학자들은 함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위 성경학자 혹은 신학자들은
사실 죄에 빠진 사람의 영혼들과 씨름을 해 본적이 없이
그냥 도서관에서 연구실에서 책에서 책으로 만든 신학으로 치우쳐서
끝없는 사변으로 치우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쉽게 기록한 성경을 과잉해석하여 성경을 혼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던 것과 한치도 다른 것이 없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끝도 없이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또 해석하여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신학을 하고 있었다.
로마서는 불과 23페이지 밖에 안되는 얇은 책이다.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편지로서는 약간 긴 편지였다.
그 편지는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약 3개월 머물면서
장차 가고 싶어 하는 로마에 미리 보내되
겐그리아 교회 여자 집사 뵈뵈 라는 자매가 전달했던 편지였다.
그 당시에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은 단지 편지를
던져 주고 가는 오늘의 집배원 같은 분이 아니라
가지고 가서 그 편지를 직접 읽어주고 약간의 설명도 했었다.
거기 무슨 주석이나 위대한 해석서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로마서를 해석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누룩을 많이 넣었던지 6000 페이지나 되게 해석을 한다.
그런사람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다 해석하라고 하면
457,000페이나 해석하여 마침내 1,500권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아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는데
그 책은 판형이 4-6 배판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자그마치 8000 페이지나 되었다.
바르트가 죽은 지 2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의 교회 교의학을 다 읽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누가 그 8000페이지를 읽어 줄 것인가
앞으로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기가 막힌 고백이 있다.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준비를 많이 하면 도무지 은혜도 감동도 없는데
반대로 출장이나 가셨다가 오셔서 설교 준비를 미쳐 못하시고 그냥
성경을 읽어 나가다시피 하면 거기서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그 옛날 요시야 임금이 8세에 왕이 되어 왕이 된지 18년 즉
26세 쯤 될 때에 성전을 수리하게 했는데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서 두루말이를 발견하였다.
왕하 22:8-12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의 신복들이 전에 있던 돈을 쏟아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을 찢어 회개하는 사람을 만나볼 수가 없다.
요시야는 처음으로 들어 보는 율법을 읽어만 주었는데도
옷을 찢고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교하는 분들과 교육하는 분들은 반드시 창세기 1장부터
요한 계시록 22장까지 온전히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
바르게 가르쳐도 실천을 하는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우리는 66권 중에 단 한 권도 제대로 배운 것이 없습니다 !"
라고 한다면 교사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
오늘날 일반 학교에서 교과목을 맡은 교사가
담당 교과서를 제 1과부터 마지막과 까지 학기 내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교사가 자기 취향대로 여기 저기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학기가 지나고
1년이 가고 2 년이 가고 3 년이 가고 10년이 가도 교과서를 차례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면 과연 우리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을까 ?
오늘날 성경을 배우고 있는 성도들의 학부형이 하나님이요 예수님이다.
선생된 목사들과 신학대학 교수님들은
성도들의 학부형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이단들과 사이비들은 성경을 매우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 그리고 통일교, 모르몬교, 무료 성서신학원 등에서는
특별히 일러스트레이션 기능자를 확보하여 매우 쉽게 가르치고 있다.
아주 고급 인력을 확보하여 환상적으로 그림들을 그리면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단순하고 실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친 이단종파 사이비 종교의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성교회의 성도들이 삶을 볼 때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불 수가 없다.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과 공부하는 것, 사업하는 것과
세금포탈하는 것과 교통 법규 위반하는 것과 뇌물 주고 받는 것,
어느 것 하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
오늘날 기성교회 교육은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1000만의 성도들에 의하여 3,500 만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세속화 시키고 있는지
냉정하게 반성을 해 보자고 하면 하나같이 후자라고 고백을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할 것이다.
설교자는 말씀을 과잉해석하지 말고
성도들이 듣기에 지겹게 하지 말아야 한다.
"고후 8:10-13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훈계할 때도 한번 한 말을 또 하고
제삼 제사 중언 부언 하게 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만다.
순종할 사람들은 "뜻만 보여도" 할 것이요
하기 싫은 사람들은 100번을 거듭해도 소용이 없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을 드릴 때에 각을 떠서 바쳤다.
그리고 그 고기를 입에 넣고 씹는 것은 각자가 씹어서 맛을 느껴야 한다.
만약 설교자가 뻔한 이야기를 되씹고 꼽씹고 하면
성도들은 짜증이 나게 된다.
목사가 말씀을 다 씹어 버리고 나면 성도들은 씹을 것이 없다.
설교에서 진력이 나버리면 성도들은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이 없다.
성도들이 말씀을 되새겨 보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을 행할 때 기쁨이 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해도 지나치게 되씹고 또 꼽씹어 지겹게 주장만 하게 되면
모든 성도들은 수동태에 빠지게 된다.
설교자는 마치 제사장들이 제물의 각을 떠서
떼어 먹기 좋을 만큼만 잘라서 주고 씹고 되새김질은
성도들이 직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동적으로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깨달아 즐거움으로
순종하게 되고 또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어 보면
거의가 다 "잘 된다는 설교" 복받는다는 설교, 능력 받고 은사 받고
구원받고 또 무엇을 받고 죄사함 받고 지옥가지 않고 천당가고
이땅에 머리가 되고 출세하고 ......대부분이 그러한 말씀들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말씀, 경고의 말씀, 질책의 말씀, 진노의 말씀이 더 많이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러한 말씀,즉 성도들이 찔림을 받을 만한 말씀은 거의 하지 않는다.
자칫하다가는 성도들이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며
현세적인 욕구에 부하는 설교를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는 성도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들려 주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게 된다.
이렇게 되다가는 거짓 선지자가 될 위험이 있다.
진정한 사역자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달콤한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권도 빼먹지 말고
성실히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
들을 사람을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사람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가 어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누락시키는 것을 보면
성도들은 그 책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보다 하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
어떤 설교자는 오바댜서 나훔서, 스바냐서 같은 책은 평생에
한번도 설교하지 않고 일생 사역을 마친다.
모르긴 해도 그런 목사님들은 천국 문에 들어서자 마자
오바댜, 나훔, 스바냐 선지에게 혼이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명심할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위탁받은 교서가 66권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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