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노 우 호 목사
이 내용은 노우호목사님이 극동방송국에서
방송한 내용을 CD로 만든 것을 그대로 녹취록을 한 것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샬롬^*^
<서론>
김성윤 :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이시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 분들,
그리고 처음 신앙을 가지게 되신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성경의 참된 진리를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노우호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노우호 : 반갑습니다.
김성윤 : 김성윤입니다.
1. 신은 왜 모든 사람을 착하게 만들지 않았나?
김성윤 : 목사님 서두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참된 대상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는 것 참으로 중요하죠.
노우호 :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또 좀 심하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고,
또 오해가 있는 분도 참 많습니다.
김성윤 : 몇 십 년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경전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모르고 믿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노우호 : 그것은 아마 우리 기독교도 그렇고
다른 종교도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성윤 : 예.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이 시간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함께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을 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노우호 : 예. 이것은 아주 질문이 포괄적이고 쉬울 것 같으면서도
종교가 무엇인지 말하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종교와
일반인들이 말하는 관점이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별해서 말씀을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성윤 : 예.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종교란 무엇인지?
노우호 : 종교 할 때에 만약에 그것을 글자대로만 한다면
“종교” 할 때 마루 종(宗)자를 쓰고 가르칠 교(敎)자를 씁니다.
마루 할 때 무슨 말인지 생각납니까?
김성윤 : 뭐지요?
노우호 : 산꼭대기를 산마루라고 합니다.
그리고 산중턱, 산기슭 하는 것처럼,
종교란 말은 문자대로 한문글자를 직역하면
“최고의 가르침이다.”란 뜻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종교” 그러면 자의적, 즉 문자적 의미도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또 내용이라든지 방향 같은 것도 거의 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않고
“종교는 거의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김성윤 : 글쎄 말이예요. 궁극적으로 거의 비슷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갖지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의미에서 종교와 종교의 사이는
영원히 일치될 수 없는 교리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때로는 죽음을 불사하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대개 조금 어려운 말입니다만
독일의 어떤 신학자가 한 말인데,
“종교무차별론자 혹은 종교무용론자에 가까운 분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종교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분들이 대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 혹은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거의 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대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종교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라고
함부로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인들 역시
종교의 교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그런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성윤 : 무지하면 용감하다고요.
노우호 : 종교란 말은 “인간이 자기보다 월등한 어떤 신적인 존재를 의지하려 하거나
경배하려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도움을 기대하면서 취하는 제반행위를 말한다.”
대개 이렇게 좀 쉽게 정의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인간적 혹은 초자연적 혹은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려 하거나
경외하거나 존경하고 숭배하거나
믿는 일에 총체적인 어떤 체계”를 종교라고 말합니다.
좀 딱딱하기는 하지만은 그렇게 해야지만
종교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김성윤 : 본인이 연약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러니까 월등한 존재를 의지하는 것이지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대상이 없을 때는 종교라고 할 수 없고,
그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종교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모든 종교가 절대적으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우리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비슷할 것이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군요.
노우호 :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러한 종교체계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는 어떤 진리를 자꾸 찾을려는 종교가 있습니다.
아직도 진리를 찾아가는 도중에 있는 종교,
이런 것을 편리하게 말하면 구도적 종교,
즉 도를 구하는, 끊임없이 진리를 찾을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노력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열심히 전도를 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크게 나누면 구도종교 혹은 전도종교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김성윤 : 종교체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네요.
노우호 : 예, 다르게 분류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종교에 대해서 여러 종교를 함께 놓고 연구하다가
이것은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도를 찾아서 노력하고 있는 종교가 있는가 하면
이미 도를 얻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전도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도적 종교는 인간편에서 초월자를 찾아서
노력하는 종교 혹은 자력종교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노력을 해서 어떤 진리를 찾아보고 탐구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그 대표적인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불교와 흰두교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도적 종교를 다른 말로 할 때는 계시종교라고 그럽니다.
즉 이미 도는 나타났습니다.
진리가 이미 나타나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서 믿고 즐거워하고 충만해져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려고 하는 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이 종교라는 범주에 넣어서는 안된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찾아서 애를 쓰는 종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도할려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분류를 할려고 하는 분들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렇게 힘주어 강조를 합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종교라고 한다면 또 다른 종교가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한쪽은 진리를 찾아서 구도하는,
즉 도를 구하는, 추구하는 과정에 놓인 종교이고,
다른 한편은 그것을 찾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계시가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하면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김성윤 :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가 바로 후자에 속하겠네요.
노우호 : 맞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역사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다른 양상을 띠는 현상이 생기는데,
이것을 정리하게 되면 말씀드린대로 구도적 종교,
불교나 흰두교 처럼 자기의 굉장한 노력을 통해서
어떤 진리를 찾을려는 사람들, 이런 분들이 구도적 종교입니다.
기독교 같은 경우는 도를 통하기 위해서,
아니면 도를 깨닫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진리가 나타나서 이것을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김성윤 : 인간의 노력이 아니다.
노우호 : 그렇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혼합종교가 있습니다.
이것 저것을 함께 �어 가지고 믿는 혼합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말씀드리기 외람되고 죄송합니다만 서양에서는
캐톨릭적인 교리가 상당히 여러 종교의 장점을 따서 혼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혼합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발생된 통일교 같은 경우도 혼합종교에 속합니다.
여러 교리의 장점을 따서 여러 종교를 융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미신적 종교가 있습니다.
미신적 종교도 종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냐?
이렇게 의견을 달리 하는 분도 있지만
그래도 미신도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성윤 : 사실이 아닌지 맞는지도 모르고 그냥 믿는 거 말이지요.
노우호 :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고 증거도 없이 거저 막연하게
무언가를 의지해야 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초월자 혹은 인간 이상의 어떤 분을 의지할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성향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다섯 번째는 사이비 종교가 있습니다.
김성윤 : 요즘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노우호 : 이러한 것이 우리 사회에 가장 크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데,
도를 구하는 종교나 도를 전하는 종교는 대개 건전합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나 미신적 종교나 혼합종교 같은 경우는
그 사회를 까딱하면 크게 혼란시킬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혼합종교에서 혼합된 것을
순수하고 원래의 것으로 회복하자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라는 말을 한자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다면
“최고의 가르침이다”고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실상 위에서부터 내려온 가르침일 때
이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성윤 : 그래서 아까 마루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루 종(宗)자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동양에서는 종교에 대한 개념이
일찍부터 발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를 서양종교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의 출발은 동양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이스라엘 나라가 서양이 아니고
아시아의 맨 서쪽의 나라입니다.
거기서 기독교가 출발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의 실제적인 발원지는 다 동양입니다.
불교라든지 유교라든지 기독교, 도교, 조로아스터교, 흰두교
다 그 발원지가 동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영어권의 사람들은 릴리젼(Religion),
영어로서는 <Religion> 하는 말은 재결합이라는 말입니다.
재회, 다시말해서 헤어져 있거나 서로 관계가 소원해 있다가
다시 연결되게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라틴어로 말할 때는 제사장을 <폰티팩스>라고 말합니다.
<폰티팩스>라는 말은 “연결하는 자” 혹은 “다리를 놓는 자”라는 말입니다.
<폰>, <퐁> 하는 말이 라틴어나 불어쪽에서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퐁네프> 한다든지 <폰티팩스>라는 말은 “다리를 놓는 자”라는 뜻인데,
즉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개념 혹은 사제의 개념이 본래
신과 인간 사이를 다리 놓는 자 그런 뜻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경전이 있어야 됩니다.
즉 진리를 담아 놓는 경전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체계가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바른 종교는 비합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이거나 비역사적일 때는
대개 사이비 종교이거나 아니면 미신적 종교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을 듣는 분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정말 종교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같이 인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나라, 한민족의 역사의 발전이 그 종교하고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나라를 가서 보면
그 나라가 어떻게 얼마만큼 아름답게 발전했는가 하는 것의 가장 큰 영향은
정치라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입니다.
그만큼 아무리 정치를 잘 할려고 해도 그 나라의 종교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나라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 제가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사람이 어떤 종교를 선택하느냐야 따라서
그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데요.
노우호 : 개인도 그렇고 한 사회나 민족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잘못된 종교를 받아들인 그 가문은 가문도 몰락하는 수도 있고,
개인도 어떤 종교에 잘못 빠지게 되면 자기 인생을 다 망치고
자기 일생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까지 걸려 있는 것입니다.
2. 과학이란 무엇인가?
김성윤 : 목사님! 학문에 있어서 과학이라는 것이 모든 학문의 완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노우호 : 그런데 그것이 사실 착각입니다.
학문할 때에 과학이 현대학문에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개 인문과학 자연과학 이렇게 하면서
과학이 모든 학문의 마치 제사장처럼
그렇게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상의 교육이 있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잠간 언급했던 대로 <종교> 하는 그 말이
최고 위에 있는 가르침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신학적 내지는 과학 이상의 철학이 있습니다.
지금 과학을 하다가 과학만으로는 안되니까
과학안에서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과학기술원대학교에 과학철학이라는 학과가 있습니다.
과학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현대 과학은 수학에 기초를 두고 발전한 것이고,
수학이 발전하면 과학에 응용이 됩니다.
과학은 다시 철학을 위하여 있고, 철학은 다시 신학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은 종교를 위해서 있고 종교는 신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체계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은 그 활용 범위가 매우 넓지만
과학적인 방법만 가지고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가 매우 제한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과학이라는 것은 너무 크거나 반대로 너무 작거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거나 내지는 장차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사람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되지 못하지만
미루어 생각하고 유추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그런 학문이
대개 철학적인 방법인데, 철학적으로 인간이 추구한다할지라도
그것이 다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신학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철학도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시대일수록, 어떤 면에서는 컴퓨터 시대일수록
사실 참된 종교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과 첨단 컴퓨터를 이용한다고 해도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것을 어떤 과학적인 실험 기계에 넣고
실험을 해 볼 수도 없고, 또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생물학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물(生物)’하면 생명(生命)과 물질(物質)이 합성되어서 생물이 되는데,
생물학에나 과학에서 관찰하고 실험할 수 있는 것은
‘生物’ 중에서 物 부분, 즉 생명체와 결합되어 있는 물질부분과
어떤 현상을 관찰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실험할 수 있는 것 뿐 이지,
生命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시 과학만으로는 생명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이 과학시대나 컴퓨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종교가 필요한가 여기서 나오네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여기에 바로 종교문제와 신학의 문제가 들어온 것이고,
또 그 이하 종교나 신학까지 안가도 철학적으로도 생각을 해봐야 되니까
과학을 해봐도 안되니까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이
지금 과학대학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 우리가 흔히 보면은 평상시에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가도
죽음을 앞에 두면 영혼이 있는 건가? 천국이 있는 건가? 고민하게 되잖아요.
노우호 : 예. “죽음 앞에선 다 철학자가 되거나 신학자가 된다”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어른들도 다 거저 세상 좋고 하면은
자기 좋아서 세상 즐기고 살다가
막상 죽음이 문에 와서 노크하게 하게 되면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위급하게 되면 “어머니 아버지 아이고 엄마” 하다가
나중에는 “아이고 하나님!”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문으로 임사호천(臨死呼天)이라고
죽음이 임박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다시말하면 사람은 다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만약에 육체뿐이라면 본능으로 살면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정신만 있다고 하면
그럼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속에는 육체와 정신, 그 내면 더 깊은 곳에
영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
즉 생명에 대해서 과학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철학도 생명에 대해서는 이미 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래서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즉 ‘알 수 없는 것이다’는 말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이 책임이 우리 神學(신학)에 돌려지는 것이고,
또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신 啓示(계시)에 의해서
생명을 본래 부여하신 분, 생명을 稟賦(품부)하신 분,
즉 생명을 주신 그 분에게 가서 물어봐야만
生命(생명)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생물학자가 힘을 다 합한다고 해도
심어서 싹이 날 수 있는 참깨 한 알을 만들 수 없습니다.
김성윤 : 이것이 과학의 한계예요.
노우호 : 그리고 참깨를 분석해가지고
무슨 성분이 얼마 있다까지는 다 분석해 낼 수 있지만은
그런 성분을 줄 테니까 그런 성분을 조합해가지고
심어서 날 수 있는 참깨를 만들어라고 하면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몇 년씩이나 말라가지고 묵어있던 씨알을
단진 溫度(온도)와 濕度(습도)가 맞는 환경에 집어 넣었더니
거기서 生命(생명)이 움트나오는 神秘(신비)를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이것은 역시 生命(생명)은 인간의 한계넘어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科學(과학)도 사실 생명을 위해서 쓰여질 때
가장 바람직하게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문도 生命(생명)을 위한 학문이 되어야만
참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宗敎(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宗敎(종교)나 哲學(철학)도 生命(생명)을 위한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生命(생명)을 해치는 情致(정치)는 정치라 할 수 없습니다.
生命(생명)을 해치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親切(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生命(생명)을 구원할 수 있고
生命(생명)을 살릴 수 있을 때 참된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온 세계 도처에서 생명들이 파괴되고 生態係(생태계),
즉 生命(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인간이 자꾸 파괴하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을 잘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절대화되어서는 안되고 과학도 어떤 학문에 의해서
통제되고 지도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科學(과학)이 우리를 편리하게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학을 가지고 과학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인격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역시 과학의 한계가 여기 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컴퓨터 시대이고 과학의 시대이고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다든지
絶對的(절대적) 眞理(진리)를 들어보고 참된 종교를 찾아서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사회, 이런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라고 믿습니다.
김성윤 : 그래서 이 과학하시는 분들이 과학을 하시면서도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참다운 종교를 찾아서 믿고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노우호 : 진솔한 그런 과학자는 우리 일반사람보다 신앙이 더 좋아요.
그리고 어느 학문이든지 깊이 파고들면 하나님의 세계가 인식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의사가 많이 있는데,
그 의사들은 인간 생명체의 신비를 자꾸 보다가
그저 느닷없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야, 조물주가 기가막히게 만들었다.”
그 조물주 이야기를 합니다. 창조주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도 창조과학회(創造科學會)라는 회(會)가 있는데,
창조과학회는 아주 유명한 과학자들이 일천명이상의 석사 박사들이
지금 오히려 생명의 세계의 신비를 발견하면서
하나님께로 속속히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서(聖書)에도 보면
‘다른 모든 생물에게는 주지 아니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 그런 말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천하에 지혜(智慧)가 가장 출중했다는 솔로몬이
성경에 기록해 둔 것인데,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영원(永遠)이라든지 무한개념(無限槪念)이 이미 과학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과학을 가지고 영원(永遠)과 무한(無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과학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수학에서도 무한개념이 있고,
과학적으로도 시간을 넘어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이미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있기는 있지만은 거기는 과학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있고,
생명(生命)의 세계도 미치지 못하고 무한(無限)의 세계와 영원(永遠)의 세계에
역시 과학은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끊임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역시 철학적인 방법으로도 밝혀지지 못하고
마침내 이것은 신학적인 책임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컴퓨터를 잘 활용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역에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제시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이고 또 한계입니다.
오늘날 컴퓨터가 굉장히 갑작스럽게 발달하면서
거기서 뒤지면 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처럼 느낄 그런 정도인데,
그러나 이 컴퓨터를 통해서 제공되는 정보의 바다,
요즘 인터넷을 그렇게 말을 합니다.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 속에
가상종교(假象宗敎) 내지 사이버 컬트(Cyber cult)라고 그러는데,
가상세계(假象世界)의 이단종교(異端宗敎),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됩니다.
가상세계의 이단종교가 8,000 가지가 올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 영혼들이,
컴퓨터를 만지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영혼들이 대체로 젊은 층인데,
물론 연세드신 분들도 있지만,
이런 사람이 이제 이 컴퓨터 세계가 과학적이다 생각하고
그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만나게 되는 그 가상종교(假象宗敎)가
아주 과학적인 종교고, 이것이 아주 권위있는 것처럼 인식될 때는
우리 미래사회(未來社會)가
아주 큰 혼란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컴퓨터 시대, 과학의 시대일수록
우리가 참된 종교, 참된 진리를 인식을 시켜야 되겠고,
또 그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근대 혹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 내지 무용론을 주장했는데,
지금와서 볼 때에 어떻습니까?
사람이 육체적인 것만 가지고 살아가면 본능적인 것만 살아가지고
이것이 바로 동물과 비슷한 그런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지식만 가지고 과학만 발전시키면 될 줄 알았지만
그 과학이 사람을 대량살상 하는 그런 쪽으로 잘못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이라든지 물질과 힘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과 인격을 만드는데,
즉 다시말하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데
참된 종교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몸만 있다면 이 몸을 보통 그리스사람들은 사르크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욕만만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주 천박한 사람으로, 아주 저급한 사람으로,
이런 사람들은 관능적으로 본능적으로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철학을 한다고 해가지고 상당히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성경에 있는 진리를 받아드리고서야 비로소
사람이야 말로 육체(肉體)도 있고 혼(魂), 즉 정신(精神)도 있고,
영(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전인교육(全人敎育)의 장이 새로 열리게 된 줄로 믿는 것입니다.
3. 종교란 미신이 세련된 것이 아닌가?
김성윤 : 목사님! 종교(宗敎)라는 것이 ‘거저 미신이 세련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가 있거든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미신(迷信)에 대해서도 대체로 이해가 되지 않으신 분들이고,
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부딪혀 보지 못한 분들이
아마 재미있게 하거나 아니면 종교인들을 조금 조롱한다할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할 때 이런 말을 가끔 듣게 되는데, 전혀 다릅니다.
종교와 미신이 왜 다르냐? 하는 것을
이 시간 주제로 삼아서 조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김성윤 : 그렇다면 먼저 ‘미신과 종교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를 나누죠.
노우호 : 종교에 대해서 냉소적 입장인 입장을 가지는 분들이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미신을 볼 때 황당합니다.
그래서 ‘종교도 비슷한 것이고
종교가 조금 더 체계화되고 세련된 것이 종교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시겠는데, 먼저 ‘미신과 종교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쉽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참 신앙이 도대체 어떤 신앙이 참 신앙이냐?
이것을 묻지 않을 때는 우리가 아는데, 누가 물으면 잘 모릅니다.
참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믿을만한 사실, 우리가 믿는다 할 때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증거가 확실한 것을 믿을 때 그것은 참 신앙입니다.
사실이고 증거가 있을 때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미신이라는 것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미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은
무언가를 의지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경전(經典)도 없고 설교(說敎)도 없고
강의(講義)나 강론(講論)도 교리(敎理)도 없기 때문에
미신은 대개 거저 오래 들어서 대충대충 확인할 수도 없고
증거(證據)도 없는 그런 것을 가지고 믿을 때 이것이 미신입니다.
또 사실(事實)도 아니고 증거도 없는데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속는 것입니다.
사실도 아니고 증거도 없고 그런 것을 진실히 믿으면 진실히 속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기 전에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김성윤 : 이런 경우는 참된 신앙과는 아주 거리가 멀지요.
노우호 : 예.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켜도
다 종교가 말썽을 일으켰다고 함께 매도되기 일쑤입니다.
좀 구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사실이고 증거가 확실한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른바 불신앙인데 그것도 속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인데 안 믿었으니까 속는 것이고,
증거가 있는데도 안 믿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김성윤 :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예요.
노우호 : 아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위의 네 가지 말씀드린 대로
사실이 분명하고 증거가 확실한 것을 믿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믿는 것이 미신(迷信)고,
사실도 아니고 증고도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속는 것이고,
사실이고 증거가 확실해도 믿지 않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이 세 가지나 됩니다.
종교(宗敎)나 미신(迷信)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확인도 되지 않고
대충 남을 따라서 믿는 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전도(傳道)하다가 사람을 만나서 보면 “아무거나 진실히 믿으면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는 것을 봅니다.
흔히 듣는 말인데,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절대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김성윤 : 말씀해 주신 위의 네 가지 경우를 보니까
참된 신앙의 자세는 오직 하나밖에 없네요.
노우호 : 하나밖에 없습니다. 위의 네 가지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는데도
놀랍게도 잘못된 세 가지 길로 많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방송도 필요하고
전도자의 애타는 전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김성윤 : 사실이라면 반드시 증거가 있겠지요.
노우호 : 맞습니다. 사실이면 증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마르틴 밤비라는 학자가 “한줌의 사실이 한 터럭의 토론보다 가치가 있다.”
그래서 사실이 나타나버리면 토론(討論)은 종결(終結)됩니다.
증거가 있으면 모든 인간의 토론은 종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찾을 때
정말 그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을 믿고 있느냐?
아니면 사실도 아닌 것을 믿어서 속고 있는냐?
이것을 꼭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속아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장에 가서 양말하나 잘못 산 것은 큰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의 선택이 한 달 밖에 좌우되지 않으니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안 되는데, 종교를 잘못 선택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자신 뿐 아니라 가문과 가족들이 다 거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찾는다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김성윤 : 평생을 좌우하니까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를 선택할 때에
꼭 확인해야 될 요소를 몇 가지 정리해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무엇을 믿는 종교인가?
김성윤 : 우리가 종교를 선택할 때 꼭 확인해 봐야 할 그런 요소지요.
노우호 : 무엇을 믿는가? 그 사람들이 무얼 믿는가? “너 뭐 믿냐?” 그렇게 물어 봅니다.
그런데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가 물으면 내가 무엇을 믿는지 답을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자기의 믿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믿는 종교인가?
믿는다고 할 때 ‘마음으로만 믿으면 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참된 믿음은 참된 행위와 생활을 연출해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네 번째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불변, 즉 변치 않는 진리가 기록된 경전(經典)이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경전이 없으면 표준이 없고,
또한 무엇을 보고 가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불변의 진리,
자꾸 세상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진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예를 들어서 구구셈을 하는데 구구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동양 서양 막론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데
이와 같이 변치 않는 진리가 기록된 경전이 있는가
이것을 꼭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믿는 다고 할 때 믿는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인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바위를 믿거나 나무를 믿거나 하는 그런 경우는
인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 지는 것은 다 변하는 것 들고
또 그 모든 것은 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전부가
인간이하이지 인간이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이 인격적인 그런 존재인가?
그리고 그 신앙과 그 종교가 어떠한 사람을 길러내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어느 종교가 참 종교인지
어느 길이 참된 진리인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분별 합니까? 했을 때에
예수님 말씀이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그런 아주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문에도 결실(結實) 혹은 결과(結果)
그리고 행실(行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위는 행위의 열매이고, 결과는 맺은 열매입니다.
무엇이 맺혔는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김성윤 아나운서 지금 가을입니다.
김성윤 : 예, 가을이지요.
노우호 : 밀양에 가면 단감이 많이 열리는데,
여름에 보면 비전문가가 보면 단감인지 떪은 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을에 가서 그 열매를 따먹어 보면
그 감이 단감인지 떪은 감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보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종교에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 걸려있는가?
또 어떤 사람들이 그 종교에 달려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종교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정되어 온 종교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성이 없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
대개 이것은 신흥종교(新興宗敎) 내지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입니다.
신흥종교=사이비종교해도 크게 안 틀립니다.
김성윤 : 역사적으로 인정받을 근거가 없으니까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역사와 함께 하고 역사의 변화를 주도하고
역사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와 결과를 가지고 온 종교가 어느 종교인가?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조금만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김성윤 : 지금 쭉 살펴보고 있는 요소들이
우리가 종교를 선택할 때 꼭 확인해 봐야 할 그런 요소들입니다.
노우호 : 맞습니다.
그 다음에 언제 어디서 누가 믿어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진리가 있는가?
우리가 가끔 영화라든지 혹은 여행자의 리포트를 통해서 보면,
인디안의 추장들의 말은 보편 진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이런 경우는 따라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의 대상이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전능한 능력을 가진 분인가?
아니 아무 힘도 없는 분을 믿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믿고 어떤 분을 믿을 때
그 신앙의 대상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믿고 기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을 호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 힘도 없는 끌어다놓으면 가만히 있는,
우리가 그런 것을 믿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 종교가 사람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대개 미신(迷信)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삶에 희열이 넘치게 되고
그 삶에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 삶을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정말 내 삶의 의미를 느낍니다.
‘나는 내가 사는 의미를 느낀다.’ 이것이 참 종교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신앙의 대상이
우리의 문제, 즉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능력이 있는가?를 꼭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 열 두 가지쯤 이야기했을 텐데,
그러니까 종교를 선택할 때는 열두 번 생각하고 열두 가지 생각을 해서
경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미 어떤 종교를 선택했고 어떤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할찌라도
방금 드린 말씀,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 사실인가?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불변의 진리가 기록된 경전이 있는가?
신앙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인가?
또 그 신앙과 그 종교가 어떠한 사람을 길러냈는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정 되어 온 종교인가?
언제 어디서 누가 믿어도 보편적인 보편타성을 가진 진리가 거기에 있는가?
신앙의 대상이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전능한 능력을 가진 분인가?
종교가 삶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그 신앙의 대상이 우리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인가?
이런 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고 봅니다.
김성윤 : 이런 관점을 가지고 신앙의 대상을 우리들이 찾아야 되겠군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다보면
종교와 미신은 다르다는 것을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저도 어려서는 미신이 상당히 심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종교라고까지도 못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미신 내지는 그 믿는 대상이 한 일곱 가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절에 가십니다.
이른바 명목상 불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유교식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유교도 불교도 아니고 미신을 찾아갑니다.
무당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는 성주신이 모셔져 있고, 그리고 산신령을 또 섬깁니다.
그리고 용왕신을 섬기고, 동래에 가면 당산신이라는 동네 수효신이 또 있습니다.
그리니까 우리 집에서 섬기는 것이 여섯 가지 내지
일곱 가지가 예사로 된다는 말입니다.
김성윤 : 혼합적인 종교를 믿으셨네요.
노우호 : 그리니까 이런 것을 통틀어서 미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불교 비슷하게 하지만 절에 가도 절도 미신이 되어 버리고,
우리 아버지는 유교적이었는데 이런 상태가 아마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에 상당히 많이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4. 종교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김성윤 : 현대에서 종교(宗敎)란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것이 아닌가? 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지요.
노우호 : 네. 인간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등지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스스로 이론을 만들어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 생각하면서 하나님 품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김성윤 : 아주 건방진 생각이군요.
노우호 : 예. 더 나아가서는 이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성윤 : 갈수록 태산이네요.
노우호 :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할려고 하는 시도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계몽주의(啓蒙主義)라는 그런 이름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도전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피하고 숨고 도망하고 하는 그런 역사가 사실 인간역사입니다.
대체적으로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온 세계가
다시 말하면 기독교(基督敎)이건 이교도(異敎徒)이건 간에
다 신중심적(神中心的)인 세계관(世界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이 최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르네상스를 넘어서면서부터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부터는 ‘신만 최고냐 인간도 보통이 아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아주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머리를 들게 됩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인간을 이해할려고 했군요.
노우호 : 초창기는 ‘하나님도 인정하고 인간도 좀 거기 끼어보자’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가면서 하나님을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고
인간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할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역사적으로 깊이 반성을 좀 하고
우리도 또 그 옛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기독교가 처음 로마에 들어간 후에
AD 590년에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교회의 황제로 취임하면서부터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주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교황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신부나 추기경이나 무슨 수녀라는 제도가 없는데,
이상한 제도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중세 약 1000년 동안
캐톨릭이 매우 부패하게 되고
그 부패한 캐톨릭을 보면서
수많은 유럽의 지성인(知性人)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는데,
잘못된 교회만 등진 게 아니고
교회와 함께 하나님 까지도 부인해 버리는, 이것이 르네상스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에 모든 지성인들이 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일부의 지성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돌아갔고,
북구라파를 중심으로 “로마카톨릭이 잘못되었어도
그것은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어느 부분을 잘못한 것이지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경이 오류가 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중세 타락한 로마 캐톨릭을 보면서 일어난 두 양대 흐림이 되었는데,
그 하나는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하나는 인문주의(人文主義)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해가지고 생겼는데,
반대로 그 개신교의 어떤 종교적인 힘보다도
인문주의(人文主義) 혹은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인문주의나 인본주의나 인간주의나 인도주의나 다르게 표현이 됩니다만
영어로 하게 되면 통틀어서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말합니다.
휴머니즘이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 의하여
모든 것을 인간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인간을 위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 결과에 나타난 것이 인간이 큰 소리를 치게 되고 인간의 이성이 최고가 되고
인간이 이성을 절대화하는 데까지 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나타난 사조(思潮)는 무슨 주의(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주의(主義), 영어로는 ‘-ism’, 무슨 주의가 붙은 말이 난무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다른 말로 하면 이데올로기(ideology) 시대(時代),
인간주의 인본주의 시대는 인간이 자꾸 무엇을 주장합니다.
주장 하는 것이나 표방하는 것이 어떤 주의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민주주의, 사실 민주주의도 절대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증주의 경험주의 선험주의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본주의
인도주의 과학주의 염세주의 낭만주의 실용주의 민족주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국수주의 도덕주의 경건주의 은둔주의 영지주의 형식주의 상징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 주지주의 주정주의 이상주의 현실주의 이기주의 박애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개혁주의 급전주의 수정주의 물량주의 합리주의 절대주의 상대주의
고전주의 개몽주의 진흥주의 금욕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전제주의 개인주의
공리주의 감상주의 감각주의 신비주의 실존주의 자연주의 자유주의 전통주의
행동주의 정통주의 개관주의 주관주의 권위주의 회의주의 관념주의 보편주의
허무주의 인격주의 비관주의 낙관주의 기회주의 복고주의 환원주의 직관주의
주의주의 법치주의 덕치주의 규약주의 근본주의...
김성윤 : 아이고, 도대체 이게 몇 가지예요.
노우호 : 끝이 나오겠습니까?
김성윤 : 그러니까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들이 온갖 주의를 표방하고 나섰군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아주 건방진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인간들이 이것이 옳다고 떠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욱 몰려가고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주의를 표방하고 선동하면
젊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리 우욱 저리 우욱 이렇게 몰려 다녔다 말입니다.
김성윤 : 이렇게 주의(主義) 주의(主義)가 많으니까
정말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와좌왕 할 수 밖에 없겠네요.
노우호 : 이렇게 우와좌왕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하나님께서 “뻥” 하고 경고를 하셨는데, 이것이 원자탄이라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달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그 원자탄이
지구를 두 번을 때릴 때에 무슨 주의라는 말이 그냥 다 입을 막게 된 것입니다.
“이데올리기의 종언(終焉)”란 말을 다니엘 벨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정말 이데올리기가 마음껏 떠들어 봐도
그것이 인간에게 참 희망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 공산주의(共産主義)는 희망을 줄줄 알았지만
끝내는 공산주의도 다 무너지게 된 것을 우리가 보게 된 것입니다.
김성윤 : 결국 이런 주의나 사상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요소였어요.
노우호 : 멀어진 결과이고 또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살펴보다가 저는 참 외람된 애기지만
무슨 주의가 붙으면 일단 안 따라 갑니다.
무슨 주의가 붙어도 주의가 붙은 것은 인간이 주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성윤 : 종교를 선택할 때 하나의 요소가 되겠네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무슨 주의 무슨 주의 치우친 것은
어느 쪽으로 치우쳤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주의를 따라가지 말고
젊은 영혼들이 시험공부하느라고 역사(歷史)를 잘 모르니까,
그리고 사상사(思想史) 같은 것을 잘 살펴볼 겨를이 없어니까
무엇을 깊이 생각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주의가 선동하면 금방 따라 갑니다.
자기 영혼을 너무 값싸게 팔아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어떤 사상을 따라가서 “이것이다” 하고 붙잡으면
반드시 반대(反對) 이론(理論)이 등장하게 되고
또 “절씨구나”하고 신봉(信奉)하다보면
또 다른 이념(理念)이 등장하면서
결국 인간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차 대전 말기에 원자탄이 떨어지면서
여러 가지는 다 힘을 잃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놀랍게도 뉘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주의로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신중심주의인 신본주의,
그 이후에 2차 대전까지는 인간중심주의인 인본주의,
그 다음에 2차 대전 이후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데 까지는
물질주의, 이 물질주의 시대에서는 경제라는 말을 빼면 이야기가 안됩니다.
맨날 ‘경제를 살리자’고 합니다.
돈이 최고가 되고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가 되고
물질주의가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신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물질로 떨어지는 것은
영혼들이 승화되는 것이 아니고 타락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이 충분하게 충족되었을 때에
모든 물질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거나 감사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향락주의(享樂主義)로 떨어지게 됩니다.
향락주의는 즐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락주의 시대에 드러나는 모든 요소들을 보면,
러브호텔이 나온다든지 무슨 노래방이 나온다든지 가요방이 나온다든지
온갖 음식점이 나온다든지 퇴폐업소가 생긴다든지
이런 것이 오늘 우리 향락주의 시대입니다.
레져문화가 창달된다든지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찾지 않고,
어떻게 즐길 것인가? 이렇게 향락주의(享樂主義)로 가게 됩니다.
그 다음에 향락을 즐기면서 향락이라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 것이 아니고
그 향락의 끝에는 무엇이 오겠습니까?
김성윤 : 허무가 오게 되지요.
노우호 : 예. 무엇이든지 “이것이다” 하고 즐기고 나면
반드시 허무주의(虛無主義)의 나락에 사람이 떨어지게 됩니다.
옛날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벌써 온갖 1000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놀고
온갖 향락을 다 누리고 난 다음에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성경의 구약에 전도서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허무주의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자살을 하게 되는 사람도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살이 가난하고 아등바등한 나라에서는 없습니다.
대개 물질주의가 팽배해지고 그 물질로 말미암아서 향락주의가 극에 달하고
“그 향락을 누려 봤는데도 별것이 없다” 싶을 때
자살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온 것 같습니까?
김성윤 : 허무주의도 지금 보낸 것 같고, 지금 초월주의(超越主義)...
노우호 : 그래서 허무한 것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이제
“아 허무하다” 하고 자살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허무를 극복할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마약주의(痲藥主義)라든지 신비주의(神秘主義)라든지
초월주의(超越主義)라든지 다원주의(多元主義)라든지 아니면
무방향성(無方向性)의 어떤 절대적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뉴에이지 운동 이런 것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 때까지 온 것 아닙니까? 끝까지 간 것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천방지축으로 어디를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이리저리로 영혼들이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야 참 진리(眞理)가 있는지를 찾지 못하고
어느 진리가 참 진리인지 어느 종교(宗敎)가 참 종교인지
이것을 분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컴퓨터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에는 거저 내가 내 가까이에 있는 신앙이나 종교를 찾다가
이제는 젊은 영혼들이 인터넷에 들어가 가지고
사이버컬트(Cybercult)라고 하는 가상 이단종파라는 곳에 접촉하는 것을 볼 때
참 우리교회부터도 각성을 해야 되겠고,
또 이런 일을 방송국에서 관심 가지고
함께 젊은 영혼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데올리기 시대를 지나서
과학시대 물질주의 향락주의 허무주의 다 지나와서
“이제 이 시대에 종교가 필요하냐?” “아니하냐?”
아니면 “종교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데,
지금이야 말로 이렇게 어두워져가고 혼란스러울 때야 말로
참된 진리(眞理)를 가진 사람들이 정말 더 열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이고 최선을 다해서
참된 진리를 우리 사회에 제시할
책임(責任)과 사명(使命)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역사 흐름을 볼 때에 그 앞에 희망이 어떻게 보이는 것 같습니까?
김성윤 : 글쎄요.
노우호 : 만약에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어떤 소망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는요...
김성윤 : 저 같은 대답이 나오겠지요. 글쎄요.
노우호 : 그래서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
즉 아무 대답을 못하고
어떤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평소에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참 의미 있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하고,
즉 우리 눈에 얼른거리는 영상매체가 우리 눈을 너무 현혹하기 때문에
사람이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만약에 라디오라든지 사람 말을 들을 때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고 사고의 폭을 넓힐 수가 있는데,
텔레비전처럼 사람이 무엇이든지 보기를 시작하면
“씽킹 스타디”(thinking study)라고 하는데, 본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 본 것 이하를 생각한다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 들으시는 우리 모든 청취자들과 성도님들이 함께 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내가 믿는 믿음은 정말 믿을 만한 믿음인가?’
다시 한 번 재점검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5. 모든 종교는 결국 다 같은 것 아닌가?
김성윤 : 목사님! 이런 질문을 가끔 접하시지요.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까? 라는 질문을요.
노우호 : 예. “종교가 거의 같을 것이다”란 말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종교무차별론자들이 하는 말인데,
이것은 대개 무성의한 질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런 시간에 ‘모든 종교가 정말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이 문제도 꼭 짚어보고 갈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육체적으로는 무관심하고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다니고 취직하고 집에서 애기 낳고 하는 그런 정도는
종교를 몰라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빵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만 있다고 한다면 빵으로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역시 그 영혼이 진리를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에 참된 진리가 있는가 하는 것을 꼭 살펴보아야 되겠고,
정말 모든 종교가 같다면 전도라고 하는 것과 방송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자면 종교는 같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얼마만큼 차이가 나느냐 하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날 수가 있고, 천국과 지옥만큼 날 수가 있고,
하나님과 사람만큼 차이가 날 수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일반사람들은 “왜, 뭐가, 어떻게, 그만큼 다르냐?”
이렇게 의문을 제시하게 됩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종교에 대해서 분류까지는 안 했어도
간단하게 정리할 때에 구도적인 종교,
즉 도(道)를 아직도 구하고 있는 추구하는 그런 종교가 있는가 하면,
이미 도를 얻어서 전도(傳道)하고 있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큰 차이가 납니다.
답을 이미 얻어버린 사람들하고
아직도 얻지 못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하고 어떻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 다음에 혼합된 종교, 아마 복습의 의미가 있습니다만 혼합된,
즉 ‘이것저것을 막 섞어 가지고 장점만 따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한번은 지리산 하동 쪽에 가면 청암 묵계가 있는데,
그곳에서 한참 올라가면 청학동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 청학동에 가서 도사(道師)를 한번 만나 봤습니다.
도사에게 가서 이분들이 무엇을 믿고 있나 싶어서
이분들과 한나절을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들의 신봉하는 종교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 이름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유불선, 유교(儒敎) 불교(佛敎) 그리고 선(仙),
이것이 하나를 이루는 합일갱정유도,
즉 유교가 주축인데 유불선(儒佛仙)을 함께
합할려고 노력하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우리 기독교(基督敎)는 왜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물어 보니까
“유불선 중에 선 쪽에 약간 요소가 있어서
기독교는 거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그 할아버지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종교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때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불교(佛敎)는 불교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어 가지고
다른 것 하고 섞이게 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이다음에 우리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 불교(佛敎)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고
석가모니가 대오각성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어른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이런 것도
한번 말씀을 나눌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는 같을 수가 없고,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도 같을 수가 없고,
이슬람과 기독교(基督敎)도 같을 수가 없고,
심지어 기독교라는 기독교(基督敎)와 천주교(天主敎)도 전혀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같은 것 아니겠는가?’
왜 이분들이 이렇게 말 하냐 하면 나쁜 의미에서 말하는 것보다도
다 종교가 사람을 착하라고 가르치고, 선하라고 가르치지 않겠느냐?
그런 면에서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표방하는 것이
단지 사람을 ‘선하게 살아라’ 그것 한마디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삶 전반을 걸쳐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엇을 가르치느냐?
이것을 정밀하게 검토해야 되겠고,
적어도 기독교 하나를 이해하는데도 신학의 과정을 7년씩을 합니다.
불교라는 것도 사람들이 거저 절에 한 두 번 가보고
불교를 알 수 있다면야 스님들이 그렇게 애태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진지하지 못한 나머지 ‘뭐든지 똑 같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불교(佛敎)는 무엇을 말하고 있고,
또 기독교(基督敎)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을 적어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종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다른지
이것을 비교하는 시간은
정말 아까운 시간이 아니고 귀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종교가 발생된 그 기원에 관해서 조금 분류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왜 같지 않은가?’ 하는 것은
대부분 종교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동양(東洋)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양(西洋)에서는 과학(科學)과 철학(哲學)이 발달한 반면에
동양(東洋)에서는 종교가 발달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빛은 동방에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먼저 인더스 갠지스, 즉 인도입니다.
인도문화, 즉 인도문명을 발달시킨 종교가 있는데,
거기에는 그 뿌리가 브라만교라고 그럽니다.
브라만교의 뿌리에서 불교가 나오고,
불교가 나오고 나니까 나머지는 흰두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이나교 시크교 하는 네 종파, 아니 네 종교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네 종교가 브라만교라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인더스 겐지스 문화가 세계 종교의 큰 뿌리가 됩니다.
그 다음에 다른 한 뿌리는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변
갈대아 지방 우르라는 곳에서 살던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출발하는 이른바
구약성경을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런 몇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는 그런 종교입니다.
그 다음에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신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앙을 지켜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 66권에다 몇 권을 더 보태가지고
다른 종교를 만든 것이 로마 캐톨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약성경에다 어떤 부분을 첨가 합니다.
첨가해 가지고 코란이라는 것을 보태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이슬람교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신봉하지만은
그것은 신구약성경에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보태어 된 것이
이슬람교입니다.
그러니까 세계 8대 종교를 들면
인더스 겐지스 강변에서 나온, 즉 브라만 뿌리에서 나온 네 종교인
불교 흰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네 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믿는 그런 종교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과 캐톨릭 그렇게 네 개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종교 이외에 여러 사소한 종교가 있지만
대개 사이비 종43교이거나 아니면 신생, 신흥종교이거나
아니면 융합종교이거나 아니면 미신적인 종교거나 이런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세계가 복잡한 것 같아도
큰 뿌리를 두고 말하면 두 가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도, 즉 인더스 겐지스에서 나온 큰 종교,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겨난 그런 종교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이 종교의 기원을 보니까는 동양에서 발달되었다는 것이 참 놀랍네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다 동양이지요.
동양을 대개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셈족이라고 그럽니다.
그 셈족이라는 말은 노아라고 하는 분의 세 아들 중에 제일 큰 아들이 셈인데,
셈이 앗수르 엘람 그리고 동양사람 전체 조상이다고 대개 이렇게 봅니다.
언어를 분류할 때도 셈계 언어라 이렇게 말합니다.
셈족에서 종교가 발달하게 됩니다.
물론 석가모니는 셈족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는 동양에서 살았지만 혈통은 아리안족이었습니다.
즉 독일 사람들과 피가 거의 같은 사람들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아리안족이 서쪽으로 진출하다가
서남쪽으로 기울어진 사람들이 인도 아리안이 되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독일 아리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계 아리안 하고 인도계 아리안 하고
관념론적(觀念論的)인 사고가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종교의 약간의 차이가 일반사람들은 약간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차이가 많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냐면 앞에서 인도에서 출발한, 즉 인더스 겐지스에서 나온 그런 종교들은
대개 노력종교 혹은 자력종교, 구도종교,
즉 도를 아직도 추구하는, 도를 닦을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경주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천주교 혹은 캐톨릭과 같은 경우는
도를 닦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도를 가졌다고, 우리는 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계시종교라 그렇게 말합니다.
즉 위로부터 이미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받은 이 계시를 자꾸 믿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구도적 종교, 전도적 종교 하는 것은
일반 청취자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만든 말이고,
신학적으로 일반종교학적으로 이런 분류는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들으면 좀 쉬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성윤 아나운서..
김성윤 : 분명하게 차이가 나네요. 하늘과 땅차이네요.
노우호 : 발생학적기원에서도 차이가 나고, 그리고 결과에서도 차이가 나게 됩니다.
좀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기독교가 전해지기 그 이전의 유럽 사람들,
예를 들어서 독일 같은 사람들 경우는 아리안 튜튼 게르만족인데,
이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할지 몰라도 사실은 아주 위대한 산적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포학한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 본성을 내 보였던 것이
아리안 족이 세계역사의 2차 대전에서
히틀러 같은 사람들 같은 것이 아리안족의 악성입니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도 앵글로색슨족이나 바이킹족들인데,
이 사람들은 유명한 해적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복음, 즉 성경에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한 기쁜 소식이
영국 땅에 전해 졌을 때, 그 해적들, 즉 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들이
신사의 나라를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볼 때에
그 종교에 무슨 열매가 맺혀있는가? 아주 재미있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크게 보면
동남아시아와 중국 일부와 일본 한국 일부에 퍼져 있는 불교(佛敎),
중동 일대에 퍼져 있는 이슬람,
북구라파와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런 쪽이 기독교(基督敎),
그리고 남구라파와 남미 이쪽에 퍼져 있는 천주교(天主敎)
이렇게 세계를 크게 나누면 네 종교의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세계적인 안목이 열려 있는 분들은
어느 종교가 이 역사에 발전을 가져 왔는가?
또 인간을 참 인간답게 발전시켜 왔는가?
어느 종교에서 아름다운 문명과 문화가 꽃이 피어났는가?
이런 것을 판단하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열매가 이미 많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나무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저는 보는 것입니다.
김성윤 :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지금까지 설명을 듣고 보니까 확연하게 대답이 나오네요.
노우호 : 예. 그래서 판단할 수 있도록 결론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신의 세계를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서 말씀하실 때에 이것을 계시라고 그러는데,
이 계시는 합리적인 것보다도 초합리적인,
즉 초월적인 그런 계시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 이것이 계시라고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6. 한국인에게는 한국 종교가 좋지 않은가?
김성윤 : 오늘은 ‘한국인에게는 한국 종교가 좋지 않은가?’ 라는
그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흔히 보면 ‘불교(佛敎)는 인도에서 왔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지만은 ‘유교(儒敎)가 우리 종교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거든요.
노우호 : 오랜 세월동안 유교 문화에 젖어 왔고,
인도에서 온 불교도 우리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불교도 우리 종교가 아니고
원래 유교도 우리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온 그런 종교입니다.
유교에 대해서는 ‘그 유교가 종교냐? 하나의 윤리냐?
아니면 하나의 철학의 단계냐?’ 이렇게 구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본래 정말 신봉해 오던 그런 종교는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하나님을 숭상(崇尙)하는 하나님을 숭배(崇拜)하는
그런 종교가 있다가 이것이 잘못 되어
샤머니즘(shamanism)이라 하는 미신(迷信)처럼 전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몽고로 또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샤머니즘, 즉 미신적인 그런 종교가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 시대에 소수림왕 2년에 아마 서기로는 372년에
한반도(韓半島)에 불교가 들어와서 1600년 이상 불교가
우리 민족의 종교처럼 되어 있었고,
또 유교가 고려 말에 들어오면서 우리 한국 종교처럼 그렇게 되었지만,
실제는 그 발생부터가 한국에서가 아니고 다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는 유교(儒敎), 서남쪽으로는 인도 쪽에서
종교가 발생해서 한국에 들어 온 것입니다.
김성윤 : 고려 말에 유교도 불교도 5세기경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참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종교성이 깊은 것 같애요.
노우호 :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 무슨 종교가 우리 한국에 들어오든지
일단 들어왔다 그러면 그 종교가 발생한 종주국(宗主國) 보다
더 빨리 발전되는 나라가 한국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온 세상 그 모든 종교가 한반도에 상륙하기만 하면
얼마 안가서 몇 사람의 추종자를 얻게 되고 곧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섞여 가지고 한국이야 말로 만국종교박물관이다”
그래도 한국인들이 심성이 좋은 편이어서
종교끼리 많이 안 싸웁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약에 이렇게 종교가 다양하다면
종교전쟁(宗敎戰爭)이 나서 애를 먹었을 텐데,
우리 민족은 남을 비판하는 그런 것이 많지 않습니다.
비방(誹謗)과 비판(批判) 사실 다른 것이지만
그래서 비판 같은 것도 비방처럼 들리기 때문에
또 조심하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 여러 가지 종교가 서로 잘 안 다투고 공존(共存)하는 것은
경이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 우리 역사서를 보면 단군 할아버지가 많이 나오거든요.
노우호 : 예. 육당 최남선 선생님 같은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단군 시대는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다’ 그럽니다.
제정일치시대(祭政一致時代), 그러니까 제정일치라는 것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군이 정치적으로 왕이시면서 제사장을 겸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종교라는 것은 지금은 샤머니즘입니다.
단군 할아버지도 종교적으로는
하나의 샤머니즘 같은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고,
그 단군이 어떻든 하늘 사상과 하나님 사상이 단군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경전(經典)을 잃어버리고
경전이 없이 하나님을 숭상(崇尙)해 오다가
상당히 변형된 하나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시베리아를 거쳐서
몽고인들로 이어지는 샤머니즘과 우리 민족 종교가 연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성윤 : 목사님께서도 조금 전에 말씀하셨듯이
‘한국은 만국종교박물관이다’ 라는 그런 말씀을 해 주셨는데,
우리 국민들이 워낙 분별없이 아무 종교나 받아 들였기 때문에
비꼬는 듯한 그런...
노우호 : 그렇습니다. 좋은 말이 아니고 사실상 외국 사람들이 우리 한국을 보고
‘아무 종교나 하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잘못된 사고인데,
아무 종교나 하나 믿어서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한국 사람들은 비평이나 비판을 삼가는 자세는 참으로 좋기는 한데,
이 종교일 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 내지는 자기 민족의 영원한 운명이 걸리는
아주 소중한 것인데 거저 분별없이 받아 들였기 때문에
결국은 종교 백화점 같은 그런 현상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김성윤 : 그래서 저희가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노우호 : 그렇습니다.
김성윤 : 그래서 첫 시간에 ‘종교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 6일째를 맞고 있는데요.
조금 주제가 딱딱하다 그렇게 생각 드실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주제들이 흥미진지 하고 꼭 알았으면 하고
또 많은 분들이 가슴속으로 ‘아 이런 점들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점들이 있으실 거예요.
노우호 : 그래서 그런 경우에 방송국에 있는 진행자 앞으로
편지라든지 팩스를 보내 주시면 또 같이 한번 그 이야기를 모아 가지고
같이 논의하는 그런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윤 : 예. 방송사로 연락을 주시고요. 제보를 주시기 바랍니다.
노우호 : 그리고 불교(佛敎) 같은 경우는
사실상 우리 기독교(基督敎) 같은 종교보다 더 많이 나누어져 있는데도
서로 이 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교리(敎理) 논쟁(論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불교에서는 이단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또한 이단 불교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불교 세계에도 많은 사이비 불교가 많습니다.
어떤 지역에는 집만 하나 지어놓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와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암자처럼 이루기도 하고 그럽니다.
제가 잘 아는 서부경남의 어떤 면소재지는
작은 한 면소재지 내에 암자나 사찰이 50개나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한 동네에 두 개 내지 세 개 정도 되고
모든 길 끝에 가면 반드시 무슨 암자가 나옵니다.
김성윤 : 모든 길은 암자로 통하겠네요.
노우호 : 맞습니다. 모든 길이 암자로 다 통하는 그런 동네가 있습니다.
이렇게 암자를 운영하는 분들을 만나보면
불교의 깊은 교리가 되는 사성체 팔정도 같은
아주 기본도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무당(巫堂)에 가깝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공을 들이고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종교성(宗敎性)이 많은 것은 좋으나 분별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 종교가 좋지 않겠는가?” 할 때
한국 종교 할 때 어디까지가 한국 종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남아 있는 문제입니다.
김성윤 : 이렇게 많은 암자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불공을 드린다는 말 아니예요.
노우호 : 그렇죠. 누군가가 온다는 말입니다.
고객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될 텐데
그것이 한번 섰다가 없어지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고
그것이 계속 번창하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종교라는 것이 복잡해진 것 자체가
한편은 우리들이 너무 이런 프로그램이 없이
종교(宗敎)에 대한 분별력(分別力)을 좀 길러주는 그런 어떤 제도적인
아니면 교육적인 것이 등한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송에도 이런 프로그램을 그다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참 종교에 대한 어떤 강의(講義) 같은 것을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종교가 많은 나라에 살면서
종교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민족이 한국 민족이다는
이런 부끄러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김성윤 : 이름 있는 대학들을 나온 사람들일수록, 고학력일수록
가서 자기 소원을 빌고 찾아가는 횟수가 많다는 그런 통계를 봤거든요.
노우호 : 예. 한편은 어떤 사람들이 고시공부를 할 때 암자에 가서 고시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고시에 합격을 한 다음에는
어떤 부처님이라든지 그 암자에 무슨 은덕을 가지고 고시에 합격 했다
이래가지고 그 암자가 잘되는 그런 경우를 듣습니다.
이런 것은 거의 다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미신(迷信)과 종교(宗敎)를 분별도 못할 정도고
종교가 또 참 종교인지 거짓 종교인지를 분별할려고 하는
그런 의식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종교 현상을 낳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성윤 : 예. 그러니까 불교가 인도 종교이고 유교는 중국 종교라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창시했다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노우호 : 아마 대표적인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천도교(天道敎)가 같은 최수훈 선생이 창시한 천도교 같은 경우는
아마 한국에서 발생했다고 보겠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발생한 것은 이단(異端),
즉 어떤 종교에 대해서 다른 학설(學說)을 혹은 다른 이론(理論)을 주장해 가지고
어떤 종교에 대한 이단들은 한국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방송국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백성들에게 우리 국민들에게 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최근에 만든 여러 종교들은
세계로 퍼져 나가는 그런 것도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혼합종교이거나 역시 이단종파여서
마침내 우리 나라 국민의 위상까지도 뒤 흔들고
또 국가적 망신을 가져오는 그런 종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혼합종교,
즉 기독교에 얼마 불교에 얼마 등 여러 종교의 특색을 혼합시켜 가지고 나가서
결국 그것이 비윤리적으로 갔을 때
그 모든 욕이 한국 민족에게로 막 돌아오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성윤 : 예. 또 대순진리회에 대해서 요즘 많이 말들을 하시거든요.
노우호 : 그 종교도 일종의 혼합종교에 가깝습니다.
단군 사상에다가 뿌리를 두면서도
유불선, 즉 유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경우는
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가지고 종합할려고 하는 그런 시도인데,
제가 볼 때는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 진리에 근거해 있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종교가 발생한 나라는 없는데
자꾸 한국에서는 역시 이런 신흥종교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 이런 것이 최근에 일어난 신흥종교라고 보아도 괜찮겠네요.
노우호 : 거의 신흥종교들입니다.
<신흥종교> 하는 말도 다른 나라에서도 있는데 미국에서 조금 있는 편입니다.
미국에서 신흥종교 하는 말이 있고
대개 ‘인민사원의 자살파티’ 같은 것은
다 미국에서 일어난 신흥종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윤리성(倫理性)이 결여되거나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된,
즉 역사성이 결여되었다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입니다.
지난 몇 천 년이나 인류역사와 함께 해 온 것이 아니고
갑자기 어느 날 어떤 신(神)의 계시(啓示)를 받았다 하면서 나타나는
그런 경우가 대개 신흥종교이고
또 그것은 국민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만약에 어떤 의사가 정상적으로
사람의 인체와 의학을 공부하지 않고 의사 노릇을 하면
그러한 사람을 ‘돌파리’라 그러지 않습니까?
종교에도 역시 그런 잘못된 종교,
즉 사람을 파멸(破滅)로 이끄는 그런 종교도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깊은 분별력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성윤 : 불교의 한 분파라고 하는 원불교(圓佛敎)도 있잖아요.
노우호 : 원불교도 이제 한국에서 일어난 하나의 변형입니다.
불교는 불교인데 원불교입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불교가 옳지 않고
또한 석가모니의 가르침하고는 너무 멀어졌다 하면서
다시 한국적인 불교를 하나 새로 만들어 보겠다고 세워 진 것입니다.
이것도 사실 신흥종교에 가까운 종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건전하게 할려고 노력을 하는 편입니다.
즉 윤리성과 보편성을 갖추어 볼려고 하는
그런 종교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종교를 볼 때 한 종교를 분별할려고 할 때
꼭 우리가 살펴볼 일은 그 경전(經典)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시킬 수 있는
그런 종교여만 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지도 규정 하지 못하는 종교가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7. 기독교는 서양 종교가 아닌가?
김성윤 : 기독교는 서양종교가 아닌가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목사님! 기도교는 서양종교인가요 ?
노우호 : 기독교는 서양종교가 아니고, 출발부터 우리 동양 출발했습니다.
즉 서양 사람들이 서양할 때 그 서양(西洋)을 옥시던트(the Occident)라 하고
동양(東洋)을 오리엔트(the Orient)라 그렇게 합니다.
옥시던트에 사는 사람들이 “빛은 동방(東邦)에서 온다”고 했는데,
여기서 동방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을 보고 말한 겁니다.
동방이 한반도를 보고 말한 것이 아니고
서양 사람들이 “빛은 동방에서 온다” 할 때
그 동방은 바로 지금 현재 이스라엘,
즉 우리 아시아의 맨 서쪽이지만 서양 사람들이 볼 때는 거기가 동쪽입니다.
거기 이스라엘 예루살렘 거기서 빛이 오는 걸로 안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서양이 아니고 우리 아시아,
즉 동양의 맨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基督敎)가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誤解)고,
모든 유명한 종교는 다 우리 동양에서 출발했습니다.
유교(儒敎)가 그렇고, 불교(佛敎)가 그렇고,
자이나교 시크교 흰두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基督敎)
그리고 유대교 이슬람교 모든 종교,
즉 세계 8대 종교가 우리 동양에서 나왔습니다.
서양에서는 종교가 나온 것이 없고,
우리 동양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
로마 캐톨릭으로 변한 이것이 아마 서양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여러 가지 종교를 혼합시킬려고 한 그런 종교인데,
서양에서 출발한 천주교는 정말 서양에서 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동학(東學)이 일어날 때,
동학 이라는 것은 서학(西學),
즉 서양에서 일어난 천주교를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작 기독교의 출발은 동양 즉 오리엔트에서 출발했습니다.
온 세계가 사용하고 있는 서력기원(西曆紀元),
즉 1997년 하는 서력기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
즉 유대 나라의 예루살렘 조금 밑에 내려가면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신 해를
기원 년으로 해서 역사를 기록합니다.
김성윤 : 온 세계가 서력기원으로 해서 사용하고 있고,
이것만 봐서도 기독교가 무엇인가 따져 볼 만한 하고,
또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노우호 : 그렇습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 일을 하고 하루 쉬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경에 있는 대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시간 계획들이 전체 성경에 맞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언제 어떻게 연유하게 시작하게 되었는가?를
거의 생각 없이 살아 왔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개 철학(哲學)이라든지 과학(科學)을 발전시켰습니다.
동양(東洋)은 종교(宗敎)와 윤리(倫理)를 아주 강조하는데,
이것이 동양하고 서양하고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서구(西歐)의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이 함께 꽃을 피웠을 때에
그 서방, 즉 유럽이라든지 미국 캐나다
이런 나라들이 아주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 저도 기독교가 서양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노우호 : 서양에서 왔다하는 것은
서양 선교사(宣敎師)가 와서
우리가 동양 사람들의 종교를 우리가 모르고 있을 때
서양선교사들이 믿은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사실 본래 야만족입니다.
원래 슬라브족이나 반달족이나 코트족나 게르만 튜튼족 아리안족
바이킹족 앵글로색슨족 이러한 것이 다 해적들 아니면 산적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경에 있는 진리를 받아들여 가지고
철학과 과학과 함께 이 세계,
즉 철학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기독교는 영적인 것인데, 이 셋을 잘 조화시켰을 때에
서양은 정말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해적의 나라가 신사의 나라가 되었고,
도적의 나라가 과학의 나라 예술의 나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 나라도 불교와 유교가 있는 가운데서
이미 불교가 1600년이 넘었습니다.
유교도 우리 한국에 들어온 것만 해도
10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발전이 없이 역사의 당파싸움 같은 악순환이 되풀이 되다가
서방으로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교(學校)와 병원(病院)과 교회(敎會)를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학교와 병원과 교회는 재미가 있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병원은 몸이 고장 났을 때,
그리고 학교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교회는 영적인 면을 다루어서 사람이 영혼육이 함께 발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서양 선교사들이 가지고 왔는데,
이것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을 보면서
키가 크고 피부색이 희고 코가 크고 이런 분들이 가지고 온 종교다 해가지고
서양 종교로 오해가 된 것입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우리 동양, 동양중에서도 맨 서쪽 이스라엘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기독교가 아시아 쪽으로 먼저 오지 아니하고
유럽으로 먼저 건너갔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유럽 땅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유럽이 급히 변화된 것인데,
이를 테면 로마라는 나라가 그 당시에 온 세계를 다 지배하는 그런 시대인데,
지중해 판도 전체를 로마의 정치 영향하에 있었는데,
그 때에 정치는 로마, 철학은 그리스,
그리고 나중에 종교는 이스라엘에서 온 기독교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서 로마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적(文化的)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는 그리스철학이,
이스라엘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가지고
하나님 나라 복음 하나님의 나라 진리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목수일 하시던 분으로서
33세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잠간 동안 33년 중에서도 3년 정도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들이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그리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중생의 체험을 하면서
이 놀라운 체험들을 유럽에 건너가서 전했는데,
그 이스라엘에서 나온 기독교의 진리를
목수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과 3년 배운 제자들이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 정치를 다 이길 수 있을 만큼
그 진리가 힘이 그렇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철학도 로마 군인들 군대도 기독교의 진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기독교화 되어 나중에는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어 가지고
온 유럽을 기독교화 하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는 육체적이고 그리스는 이성적이고 이스라엘은 영적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데,
어느 나라가 제일 크냐하면 로마가 제일 크고,
그 다음 그리스가 크고,
이스라엘은 제일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스라엘에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이
철학도 넘어서고 과학도 넘어서고 또 로마 군대도 다 이길 수 있는
그런 힘이 그 진리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잘 모르고 그냥 지나오지만
제가 신학(神學)을 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어떻게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나온 종교가
온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가 되었겠는가?
또 예수님께서 무슨 7, 80년간 가르친 것이 아니고 불과 3년 정도 말씀하셨고,
제자들도 3년 배웠는데,
그 제자들이 세계를 품에 안고 기도하면서 진리를 전파해서
지금처럼 방송이나 통신시설이 좋은 시대도 아니고
교통도 편리한 시대 아니었는데
진리는 요원의 불길처럼 온 유럽 전체를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팔레스타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교훈 가지고 로마의 군대도 정복하였고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입을 다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김성윤 : 글쎄 이런 말씀을 들어도 정말 로마의 중무장한 군대도
그리스의 철학도 다 그 힘을 잃어버렸지만
정말 영원한 것은 종교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노우호 : 그렇습니다. 칼을 찬 사람들도
맨 손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悔改)하게 되었고,
철학적으로 그렇게 내노라고 하던 그리스철인들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 앞에 다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이성으로 한없이 떠돌던
모든 철학을 잠재우는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동양에서 발원하여 서양으로 먼저 건너갔는데,
그들이 동양의 기독교를 믿고는 다시 동양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김성윤 : 그래서 저희들이 잘못 오해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군요.
노우호 : 예.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기독교 같은 서양종교를 받아들이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데, 그것은 역사를 잘 모르시느까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온 세계와 온 인류역사를 총망라해서 조사한다 해도
성경만큼 많이 출판된 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만큼 많이 팔린 책도 없고 성경만큼 많은 미움을 받은 책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그 진리가 모든 다른 진리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다른 진리들이 맞서다가 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기독교를 보고 독선적이다 그런 말도 듣습니다.
여기서는 성경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진리기 때문에
이 진리를 우리가 이 가을에 한번 다 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성경도 한 번도 안 읽어 보신 분이라고 한다면
인생을 이해하기가 좀 미흡합니다.
꼭 인생을 이야기할려고 한다면 꼭 성경을 읽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기 전에는
종교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도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만큼 성경이 모든 종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뭐가 잘못되고 뭐가 옳은지를
부분적으로 우리가 어떤 종교의 옳은 점을 발견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또 절대적인 참 진리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아직도 못 읽어 보신 분, 안 읽어 보신 분들이라고 하면
이번 깊어가는 가을에는 성경을 사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꼭 한번 읽어 볼 수 있기를 권해 맞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고 역사를 알고
또 세계 모든 종교의 진리들도 함께 동시에 알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처음에 불교가정에 태어났고 유교적 문화 속에서 잘아났다가
마침내 성경을 사서 읽게 되었는데,
저는 아마 지금까지 성경을 7, 80번 정도 읽어 봤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이제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윤 :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분들도 계실 거예요.
처음에 목사님께서 성경책을 사서 읽으실 때 그 심정은 어떻셨습니까?
노우호 : 그야말로 저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는데,
그것은 성경 안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이
제일 첫 말씀 “태초(太初)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시니라”
이 말씀 한마디에 거저 모든 세상 역사가 새롭게 되고,
그분만 만나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그분을 다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동양인들에게는 유교와 불교가 좋지 않은가?
김성윤 : 저희가 앞 시간에서 배웠듯이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종교(韓國宗敎)가 좋지 않은가?’ 라는
그런 말씀을 했지 않습니까?
노우호 : 한국종교라는 말이 사실 한국종교가 별로 없고,
큰 종교는 인도라든지 이스라엘 그 쪽에서 발생했는데,
많은 분파(分派)가 생겨 오고,
또 한국에서 혹 몇몇 종교가 최근에 신흥종교(新興宗敎)로 일어났었지만
참된 종교적 진리(宗敎的 眞理)를 다 섭렵(涉獵)하지도 못한 채
너무 섣부르게 종교를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종교(宗敎)라고 하는 것이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데,
어떤 종교를 보면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는 그런 내용으로
종교를 만들어 내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야기를 같이 들으면서
종교에 대한 어떤 분별력(分別力) 변별력(辨別力)도 함께 길러졌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윤 : 특히 동양인들에게는 많은 종교가 있잖아요.
노우호 : 모든 종교가 동양에서 나왔으니까요.
김성윤 : 특히 한국에서 믿는 종교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 시간을 통해서 알다시피 수차례 많은 종교를 저희들이 알게 되었는데요.
노우호 : 유교(儒敎)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라기보다도
하나의 철학(哲學) 내지는 윤리적 체계(倫理的 體系)라
이렇게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불교(佛敎)도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하나의 철학입니다.
이다음 시간에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서 불교에 대해서
한두 시간 정도 진지하게 말씀드릴 시간이 있기를 바라는데,
비슷한 시기, 즉 유교나 불교가 거의 비슷한 시기인
BC 6세기 정도에서 출발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심성을 다스려 왔기 때문에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 가 봅니다.
그래서 그만 이것으로 족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교와 불교가 있으면 되었지 또 다른 종교를 들여 올 필요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교도 불교도 깊이 연구하지 않는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또 현대인들이 너무 바빠서 종교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신문 보듯이 한두 번 훑어봐가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을이 깊어지면서
물질문명에 의해서 정신문화가 파괴되는 이런 시대에
조용한 가운데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좋은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유교(儒敎)는 사실 공자(孔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 고대의 대표적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세(亂世)를 구하는 것은
어떤 법률(法律)이나 군사력(軍事力) 가지고 안 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인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질 인(仁)자를 쓰는 것입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는 인애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세계나 성경에서 말할 때 같으면 친절,
즉 러빙카인드니스(loving kindness)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仁)하는 것을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합니다.
공자(孔子)가 무엇을 말했느냐? 하면 인(仁)을 강조했습니다.
즉 힘으로 하지 말고 딱딱한 법(法)만 가지고 하지 말고
역시 부드러운 인(仁)이 인간을 지배할 때
그리고 다시 이것을 예절(禮節)로 만들어서
인간된 도리(道理)를 다할 때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상입니다.
이러한 비슷한 시기에 불교도 출발하고 합니다만
불교(佛敎)는 사실상은 독자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가 무슨 큰 계시를 받아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불교 그 이전에 인도를 다스리는 인도 종교는
브라만교라는 종교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브라만교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나온 게 불교입니다.
왜냐하면 브라만교, 즉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브라만교는
다신론(多神論) 종교입니다.
신(神)이 하도 많아서 신의 수가 사람 수보다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많은 신들을 섬기느라고 사람들이
특히 평민들이나 노예들이 신을 섬기느라고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신 때문에 사람들이 위축 되어 가지고 모든 신들에게 제물을 갖다가 바치느라고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그러한 모순(矛盾)을
석가모니가 발견하고 이것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나섰습니다.
오늘 불교(佛敎)도 석가모니의 냉철한 비판정신,
즉 비방(誹謗)이 아니고
분별(分別)하고 비판(批判)하는 그런 정신이 있었다고 하면
오늘 한국 나라나 한국 국민들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한국인의 심성에 의해서
불교의 그 냉철함은 다 없어져 버리고,
오히려 그 불교가 사람들을 더 어둡게 만들었고,
많은 경전(經典)을 가지고서도
사람들이 불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 왔다고 봅니다.
저희 가정이 오랜 불교 가정으로 지나왔지만
우리 어머니나 우리 아버지가 불교에 대해서 기본도 전혀 모릅니다.
막연하게 ‘불도(佛道)한다’ 하면서도 경전(經典) 한 페이지 만져 본 적도 없고,
그리고 불교의 기본 교리(敎理)나 기본 체계(體系)를 전혀 이해 못하면서도
‘불교를 신봉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동양인에게 유교나 불교면 되었지 않느냐?’ 하는 것은
사실 아무 종교도 안 믿겠다는 것과 똑같은
무성의(無誠意)하고 무관심(無關心)한 그런 표현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공자의 가르침이 맹자나 순자 의해서 체계화되어 가지고
중국에서는 BC 2세기경에 한무제 시대에 국교로 채용될 정도로 되었고,
우리 한반도에도 이조시대에는 이것을
하나의 건국이념(建國理念)과 같이 그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유교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고
굉장히 고도로 높은 수준의 유교가 들어와서
중국에서 보다도 유도도 한국이 더 발전했다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대한 점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어떤 사대주의사상(事大主義思想)이 있어서
중국 것만 큰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한국의 위대한 유학자(儒學者)들이
중국의 유학자 못지 않는 그런 대단한 학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유교가 변천 되고 있는데, 유교가 얼마나 많이 변천했느냐 하면
처음에 공자(孔子) 맹자(孟子) 이런 때에 비해서
순자(荀子)같은 분은 맹자하고 같은 시대이지만
전혀 또 다른 체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것이 이 사회에 별로 힘이 없다.
즉 유교라고 하는 것이 구속력이 업다, 힘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송나라시대 때는 주돈이라든지 정호 정희 장제 주희 이런 분들이
다시 이것을 새롭게 하여 유교가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유교’(儒敎)가 그때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 이름이 바꿔지게 됩니
다.
그래서 유교라고 말하지 않고 주자학, 즉 하나의 학(學)입니다.
주자학으로 가다가 다시 명나라 시대에는
결국 성리학(性理學)으로 변천이 됩니다.
그러니까 유교가 아니고 결국 주자학으로 성리학으로 되는데,
물론 하나의 학풍(學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리학으로 되었을 때에 한국이 빨리 받아 들여서
나중에 이황이라든지 이이 이퇴계선생 이런 분들이 대표적 학자가 되었는데,
성리학의 특징(特徵)은 정주학 절대우위 주지주의 경향,
그리고 예를 절대시하는 풍토, 명분론적 사고 이런 것 때문에
결국 당파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지나치게 주지주의(主知主義)로 기울어지면서 하나의 철학적 학파처럼,
결국은 이것이 당파싸움을 가져오고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다음 시대에 다시 유교가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명나라 시대에 왕수인이 세운 유가 철학의 한 파로서
주자학을 ‘너무 번거럽고 이야기가 너무 길고 혼잡하고 복잡하다’ 해 가지고
이것을 ‘좀 단순화 하면서 간단명료하게 깨달아 보자, 쉽게 해 보자’ 하면서
자꾸 이론에서 이론을 자꾸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자꾸 이론에서 이론을 만들어 가지고
탈무드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혼잡하게 했던 것처럼
유교도 주자학 성리학 하면서 굉장히 복잡해지니까
‘그렇게 복잡한 것을 서민대중들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양명학(陽明學)에서는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이런 학풍을 만들어 보자’ 이것이 양명학입니다.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마음에 떠오른 것이 바로 이치다.
마음 그 자체가 곧 이치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아는 것 하고 행하는 것을 일치시켜 가지고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과 행위를 강조하듯이
주자학이나 성리학 같은 경우 너무 이론적이다 말입니다.
그래서 실천적인 것이 없고
나중에는 그 이론이 사람을 싸움만 붙이는 그런 쪽으로 가니까
이것을 정말 ‘아는 대로 실천’하는 그런 양명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하다가 그 양명학 하는 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아무래도 유교 같은 데서는
노동(勞動)이라든지 기술(奇術)이라든지 공업(工業)나 상업(商業) 이런 것은
아주 천시합니다.
그래서 유교는 앉아서 머리만 굴리고 입만 발전시킨 그런 이론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서양 문물,
즉 서양(西洋) 기독교가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빨리빨리 발전하는데 비해서
동양(東洋)이 뒤지는 것을 보면서 조선 후기 되었을 때는
이것이 실학(實學)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유교가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유익을 주는 그런 쪽으로 가자’
그래서 이것이 ‘정치(政治) 언어(言語) 지리(地理) 천문(天文) 금석(金石)’
이런 것까지도 관심을 가지는 쪽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유교라는 체제는 종교라기보다도
변천되는 어떤 사상이나 흐름처럼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교를 ‘종교라고 봐서는 안 된다’ 그런 견해도 사실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유교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해석하는 단계에서
주자학(朱子學)으로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양명학(陽明學)으로
그리고 실학(實學)으로 그리고 현대 과학 기술문명으로 이어져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유교(儒敎) 속에 있는 윤리적인 면을 다시 부흥시킨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다시 되찾아 본다는 것은 가능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유교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교(佛敎)는 하나의 종교체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종교체계에 대해서
원래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하면 종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석가모니를 하나의 신처럼 숭배하면서
하나의 종교 행사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도 좀 깊이 공부를 하게 되면
“아, 이것을 가지고 만족이 되지 않는구나”를 속히 알 수 있을 텐데,
유교와 불교를 깊이 공부를 안 해본 사람들이
“유교나 불교 같은 종교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됩니다.
정말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도 어느 종교든지 간에 깊이 공부를 하신 분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思想)이나 종교(宗敎)를 가지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마 통감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그래서 우리 영혼, 즉 사람의 깊은 곳에서 갈구하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는 종교적 사상적 그런 방황은 끝이 없다고 봅니다.
9. 아무 종교나 한 가지를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
김성윤 : 오늘은 어떤 내용입니까? 목사님!
노우호 : 사람들이 ‘아무 종교나 그저 한 가지만 진실히 믿으면 되지 않겠나?’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게 아니고 이거다’ 하고
상대방이 믿고 있는 어떤 진리에 대해서 부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 나름대로의 아무 종교나 하나만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문을 합니다.
김성윤 : 어떤 분들은 “내 자신을 믿는다”라는 분도 있어요.
노우호 : 그것은 좀 무모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들이 점점 그렇게 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무모하게 “구차하게 누구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모한 생각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아무 종교나 하나만 믿으면 되지 않겠나?”
이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 생각은 우리 국민성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사람이 병(病)이 들거나 몸이 불편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약국(藥局)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약(藥)을 아예 무슨 약을 달라고 하면
그 약사(藥師)는 말없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달라는 약을 주고
주는 돈을 세어서 받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갑니다.
이게 큰 문제입니다.
선진국, 즉 약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한데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병이 걸리면
먼저 병원(病院)을 가서 정확한 진찰(診察)을 통해서
그 의사의 처방전이 났을 때
의사가 처방하는 그 약을 약국에서 구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 약을 어떻게 먹는지 그리고 수술을 받아야 하면 수술을 받든지
아니면 물리요법(物理療法)으로 치료(治療)하든지
식이요법(食餌療法)이나 운동요법(運動療法)으로 치료하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아무 약이나 하나 먹으면 된다’는 것은
우리 건강을 두고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아무 종교나 하나 믿어서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김성윤 : 먼저 진찰을 받아서 올바른 진단을...
노우호 : 인간이 뭐가 잘못 되었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도
배부르고 행복한 것 같고 잘 살고 그러면 잘 안 찾아가다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계(限界)를 느끼게 되고
‘인생(人生)이라는 것이 본래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사실 철학(哲學)이 시작되고, 신앙(信仰)을 찾게 되고 그렇습니다.
서양(西洋)에서는 사람이 철학(哲學)을 하게 되는 시작 출발점을
경이(驚異), 즉 어딘가에서부터 어떤 충격을 받고 놀라면서
“도대체 이것이 뭔가?” 하면서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생각을 체계화(體系化) 시킨 것이 철학(哲學)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철학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우리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삶에 있어서 인간의 제일 되는 본분,
즉 도대체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 것인가?
그리고 예외 없이 다 죽음의 강을 건너서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는데,
그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으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것을 놓고 과학(科學)을 가지고도 해결이 안 되고,
사람이 스스로 연구(硏究)해도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악(惡)을 또 봅니다.
‘도대체 이 악이 어디부터 나왔는가?’
그리고 여러 종교해위(宗敎行爲)를 보면서
무슨 신(神)이 있는 것 같이 말하기도 하고,
어떤 초월적(超越的)인 세계,
아니면 요즘 아이들 말로 제 4차원의 세계가 따로 있는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사람은 생각을 하거나 종교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우리가 무슨 병(病)에 걸렸는가?를
진찰(診察)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인간이 도대체 본래 어떤 모습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藥)을 보면 수많은 약이 있는 중에 마약(痲藥)이라는 약도 있습니다.
마약을 글자대로하면 악마(惡魔)가 계발한 약, 악마적인 약,
즉 인간을 타락(墮落)시키거나 인간을 파멸(破滅)시키는
그런 악마적인 약이 있어서 그것이 마약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종교(宗敎)에도 마약적인 종교, 즉 악마적 종교가 있습니다.
즉 인간을 파멸하기 위해서 악마가 만든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무 종교나 하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아무 종교든지 진실히만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앞으로는 그 생각을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어떤 방송장비나 복잡한 기계 설비를 사용하다가
거기 고장이 나거나 이상이 생기거나 치명적인 오류(誤謬)가 발생하게 되면
‘아무에게나 부탁을 해서 고쳐보면 안 되겠나?’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기 방송국도 기술부가 있을 것인데,
그분들은 대개 이 시설에 대해서 상당히 전문성을 띤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장 났을 때 믿고 맡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고장(故障), 더 심각한 고장이 나거나 오류 발생했을 때는
일반 기술부 가지고는 안 되고 적어도 원래 이 설비를 설계를 했던 분,
즉 처음에 디자인(a design)하고 설계한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사람이 이런 종교를 여러 가지 접하게 되고
한국에는 하도 많은 종교가 있어서
아무 종교나 믿으면 가장 위험스러운 나라가 한국인데,
앞으로는 절대 ‘아무 종교나 하나 믿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참 종교(宗敎)가 어느 것인가? 어느 것이 보편적(普遍的) 진리(眞理)를,
우주적(宇宙的) 진리(眞理)를 가지고 있으며, 또 참 윤리(倫理)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성(歷史性)을 가지고 있느냐?’ 이런 것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성윤 : 정말 기계 하나 고장 났어도 전문가를 찾고 난리법석을 떠는데,
우리 생명과도 관계되어 있는 이런 종교, ‘아무 종교나 믿으면 어떻겠느냐?’
하는 생각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요.
노우호 : 참 위험합니다. 그래서 육신(肉身)의 질병 정도 아니고 정신(精神)과 영혼(靈魂),
물론 영혼(靈魂)과 육체(肉體)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혹은 설명하기 쉽기 위해서는
영적(靈的)인 세계와 정신적(精神的)인 세계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영의 차원 그리고 정신적인 차원 그리고 육체적인 차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신적(精神的)인 것은 대개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곤 합니다.
영(靈)의 문제는 교회를 가야 됩니다.
그래서 전문가인 목사를 만나거나 신학자를 만나거나 이렇게 해야
영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병이 나면 약사나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데,
순서(順序)가 진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의사가 먼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靈魂)의 문제(問題)가 고장 났을 때는
이런저런 종교를 아무데나 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참 우리 인간을 누가 창조했겠는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는가? 내가 근본적으로 어디서 왔는가?’
하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저는 중학교 졸업한 당시부터 ‘인간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런 생각을 가끔가끔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기는 좀 혼란스럽게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보면
우리를 우랄 알타이어족(Ural the Altaic language family)이라고 그럽니다.
알타이어 계통,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또 우리를 보고 단군의 자손이다 하므로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자연’ ‘생물학’ 이런 과목에서는 ‘하등생물(下等生物)에서
고등생물로 진화(進化)되어 인간이 나왔다’
이렇게 하니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김씨들은 김알지 후손들인데 알에서 나왔다고 가르치니까
어린 심령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어디서 왔는가?
또 박씨들은 박에서 나왔다고 그렇게 우기면서 저마다 다른 주장하고,
또 학교에서 이것을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때 혼란을 겪으면서
‘야 정말 어느 말이 맞으며, 어디서 왔는가? 우리 인간이 어디서 왔는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무도 저에게 그것에 대해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교(佛敎)를 보니까 윤회전생설을 믿고 있는데,
이 윤회전생설을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소를 너무 괴롭히거나 하면
인과응보에 의해서 소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전부 소로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를 괴롭히면 개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괴롭히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그것 까지고는 설명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유교(儒敎)에서는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설명을 안 합니다.
단지 ‘아버님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이 나를 기르셨다’ 그것만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 그 이상을 생각지 못하고
부모님에 부모님을 올라가면
계속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로 계속 위로 올라갈 텐데,
그러면 숫자가 점점 줄어가지고 맨 마지막에는
한 할아버지 한 할머니가 남든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맨 처음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역시 유교(儒敎)도 사람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shamanism), 즉 미신적(迷信的)인데서는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아서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알아야 되겠다’ 하고
고민(苦悶)을 하다가 어떤 전도자(傳道者)를 만나서 성경(聖經)을 폈는데,
성경을 펴서 창세기(創世記), 즉 구약성경 맨 첫 권의 뚜껑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태초(太初)에 하나님이라는 분이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뒤에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육지에는 육지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공중의 새와 물고기를 날고 헤엄치게 하시고
맨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 말씀을 접하면서 막연하게 우리가 하늘님 하나님 하늘 하는 그런 개념이
유교(儒敎) 같은 데서는 천사상(天思想),
하늘사상 천사상하는 것이 범신론적이거나 인격 없는 막연한 하늘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분이
인격을 가진 그런 전지전능 하신 분으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종교의 단계를 넘어서
참 신앙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김성윤 : 목사님!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잖아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만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만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노우호 : 아마 배우자를 선택하면 40년 50년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대상자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宗敎)는 배우자가 이 세상을 사라진 후에도
내가 함께 할 종교이고
뿐만 아니라 죽음 넘어서까지 영원한 우리의 운명이 결정 지워지는
그런 선택이기 때문에
신중한 정도가 아니고 충분히 만나서 상담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고승(高僧)을 만나서 상담을 해 보시든지 아니면
신학자(神學者)를 만나서
아니면 목사(牧師)를 만나서 상담을 해서 참 진리를 진지한 마음으로
분별 있게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0. 아무 종교나 한 가지를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
김성윤 : 목사님! ‘종교(宗敎)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쭉 나눴습니다만
결국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사님은요.
노우호 : 사람들이 종교(宗敎)란 거저 한마디로 ‘선(善)하게 살라는 것 아니냐?’
이렇게 단순화 시켜서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질문도 더러 하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김성윤 : 그래서 “종교가 선행(善行)을 강조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노우호 : 그 말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참된 종교가 윤리성(倫理性)이 없으면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선하게 살라고 하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만이라고 하면 하나의 윤리적 체계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가 윤리적인 한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救援)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간(人間)은 지금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어떤 치명적(致命的) 오류(誤謬)에 빠져있다’ 하는 그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는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증거가 분명하도록 이렇게 나타나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사람이 무엇인가?’ ‘종교가 무엇인가?’
그 이전에
그 종교 앞에 세워질 사람이 무엇인가가 규정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하게 산다는 말 자체도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하게 사는 것이냐?’
‘선의 표준(標準)과 기준(基準)이 뭐냐?’
그것은 단지 양심대로 산다든지 아니면 사회 규범대로 산다.
즉 ‘그 규범(規範)만 어기지 않으면 선이다’ 이렇게 하는 선이 아니고
참 선이라고 것은 사람이 창조(創造)된 목적(目的)에 맞게
사람이 사람 된 본분(本分)을 다하면서 사는 삶, 이것이 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종교가 단지 선행만을 강조하는,
곧 선하기만 하면 종교는 필요 없는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일단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사람다운 사람,
즉 사람 된 본분을 다할 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필로 만들어 졌어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연필은 연필이 아닌 것처럼
또 과일 나무가 열매 맺지 않으면
그 나무는 이미 과일나무로써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나무는 결국 찍혀서 화목(火木)으로 불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과원지기의 손에 있는 전정가위에 짤려지게 되고
또한 다 모아서 불사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열매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 된 본분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된다
하시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같이 좋은 분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말씀을 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地獄)이란 말을 쓰면 혐오(嫌惡)스럽고
누구를 저주(詛呪)하는 것처럼 들려 가지고 듣기를 싫어하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지옥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는 사실 지옥이야기가 그렇게 명쾌하지 않습니다.
신약(新約)에 와서 예수님께서 직접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약에 사람 된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열매 없는 과일나무처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람이 사람 된 본분, ‘사람이 무엇이냐?’
이것을 누가 안 물으면 아는데 누가 물으면 잘 모릅니다.
내가 사람이면서 사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역시 과학으로는 안 됩니다.
과학을 가지고 생물학적으로 ‘사람은 영장류(靈長類)의 최고봉이다’
이정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영장류의 최고봉이면 그 본분이 무엇이냐?
물어 보면 잘 모릅니다.
지금 현재, 사람이 사람 된 본분도 모르고 또 자기 개인의 사명,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것을 학교에서 전혀 가르치지 않고
거저 자기 실력껏 대학수능시험을 쳐가지고 그 시험에 맞춰서
점수대로 실력대로 살아버리는,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내가 무엇을 해야 본분을 다하는 것인가? 무엇이 내 사명인가?
김성윤 : 어떻게 살아야 하나?...
노우호 : 그러니까 이것을 단지 ‘그냥 선하다.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인간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시 이 문제도 종교적(宗敎的)인 문제입니다.
또 어디를 가서 물어 봐야 하느냐하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할 때는
만든 분에게 가봐야 합니다.
설계(設計)하시고 디자인 하시고 만든 분,
다시 말해서 창조주(創造主) 하나님께 가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 봐야만
‘나를 왜 만드셨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내 사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 종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사명과 본분을 알게 하고,
그것을 깨달아 그 사명과 본분을 따라서 살게 되고,
또 그렇게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 ‘안다’는 그 자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거네요.
노우호 : 출발을 일단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는 체로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결국
욕심을 따라 살거나 세상을 따라 살거나 유행을 따라 살거나
이익을 따라 사는 등
이런 이기주의(利己主義)의 각축전(角逐戰)이 되어 버리는
그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처음에 이런 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잘 모르고 살아오다가 적어도
정신연령으로 제가 보는 대로는 중학교 2학년이 넘어서면
‘사람이 어디서 왔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
이것을 생각한다고 그럽니다.
제가 지금 교회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해 보면
중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정도 될 때에 그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학교에서는요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사람이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사람이 되었다고 그래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말입니다.
이 문제, 즉 진화론(進化論)에 대해서는
따로 한 시간을 내어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는데,
정말 사람이 어디서 왔는가? 그것이 맨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있어 사람 된 본분,
즉 각 개인의 사명 말고.
사명은 아주 개인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들의 사명이 다르고 군인의 사명이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고 군인도 사람입니다.
이때 사람에게 있어서 공통되는 본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공통되는 사람 된 본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 된 본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묻지 안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물으면 사람 된 본분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나가서 제가 모시고 있던 그 전도사님이
어느 날 밤에 이것을 물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 사람입니까?”
이러한 말씀에 모두가 말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람이라면
사람 된 본분을 몰라가지고야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저 나름대로 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람 된 본분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얼굴에 그냥 불을 담아 붓는 것 같았습니다.
나한테 누가 한 번도
‘네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것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고
누가 딱 부러지게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 놓으시고
얼른 답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몇 번 다그쳐 물었습니다.
‘사람이 되어 가지고 사람 된 본분을 모른다면 그것이 사람이냐?’ 해도
할 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사람 된 본분을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은 저절로 혹은 따로 난 존재가 아니고
사람을 만드신 분이 있고 사람을 지으신 분이 있어서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 그것을 행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도대체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원하시고 계시는가?
그것을 찾아야 된다.
그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에게 향하신 그 뜻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 제일 되는 본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고민도 같이 해 보시고,
또 이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즉 성경을 믿고 있는 기독교적인 사회에서는 매우 일반화되어 있고,
교회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에게까지
사람이 사람 된 본분을 가르치고 있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시게,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과 더불어 잘 지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誡命)이 있는데,
즉 ‘어떻게 살아라’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것,
이것이 사람 된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는
‘정말 성경을 열심히 보아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그것을 공부하다가
교회에서 그때 배운 것 이상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目的)은
하나님의 “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너”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라고 하시고,
인간을 “너”라고 지었을 때, “너”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라 하고 인간을 “너”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라는 말이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성경에 인간을 “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으로,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싶어서,
즉 영원토록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된 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그 사랑을 자랑하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고
우리는 사람들이 언뜻 볼 때 일반적으로
‘종교인(宗敎人)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상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싶어서 우리를 창조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다음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그 품에 찾아 안기고 그 품에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것,
자꾸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하고 숨고 피하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까지 가야 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향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옛날 어른들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 그런 말을 합니다.
위로 하나님 공경(恭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까지 가는
예수님께서도 계명 중의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또 이와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계명(誡命)에서 말씀 하실 때는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네 몸과 같이가 아니고 이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죽도록 사랑하시는 사랑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큰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누리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11. 종교의 선택은 자유가 아닌가?
김성윤 : 목사님! 어떤 분들은요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내 자유가 아닌가?” 그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노우호 : 자유(自由)는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게 되는데, 사실 자유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인격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또 인격(人格)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인격이라는 말은 자유가 기초되어 있습니다.
아주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자유이기 때문에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선택(選擇)을 해야 되고,
그래서 선택을 안 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쪽으로 선택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의지(意志)의 자유 그리고 선택(選擇)의 자유입니다.
만약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내가 선택할 아무 여지가 없다면
나는 책임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責任) 없다면 심판도 없고
심판(審判)이 없으면 죄(罪)도 없고 지옥도 없고
형벌(刑罰)도 없고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 자유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편 생각하면 자유라는 말처럼
오용(誤用)되고 남용(濫用)된 말도 흔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밥을 먹고 먹지 않는 것은 자유다 하고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김성윤 : 죽지요.
노우호 : 안 먹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유이지만 안 먹는다는 것은 결국은 부모님이
“예야 밥 먹어라” 하는데 “어머니 밥을 먹고 안 먹고는 내 자유입니다.”
물론 자유입니다.
그러나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을 사랑하자’ 할 때에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유가 아닌 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에게 있어서 사람 된 본분을 다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할 것은 자유라고 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말고는 물론 그 사람 자유이기는 하나
그러나 안 하는 쪽으로 되면 그것은 불효자식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 국민이 국민 된 도리를 두고서
“나는 자유다” 하면서 제멋대로 살겠다는 것은
아주 방자한 그런 행동이 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법을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법을 안 지킬 자유가 있다 해서 법을 안 지키면 그는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이 만약 학교에 가고 가지 않는 것은 내 자유다 하는 것은
좋은 학생 아닐 것입니다.
“자유이기 때문에 선한 쪽을 선택해서 학교에 가야지.” 그게 좋은 학생입니다.
실제로 안갈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 가는 것보다 가는 것이 옳기 때문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와 그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김성윤 : 그리고 보면 이 자유라는 것 저희들이 오용하고 남용할 때가 많아요.
노우호 : 오해(誤解)도 많고요.
그래서 이러한 자유라는 것을 잘못 쓰게 될 때는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
어느 종교를 선택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지만,
아무 종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결정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아무 종교도 선택하지 않는 쪽으로 선택을 했으니까.
그러면 결국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 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그래서 완전히 모든 것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그런 쪽으로 가면
인간은 파멸로 가지 성공도 아니고 참 자유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그래서 자유가 없는 자유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에덴동산에 인간을 두셨을 때 참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만 제한(制限)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임의로 할 수 있고 자유인데, 이른바 금단의 열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그 하나만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한이 하나도 없는 자유가 아니고
제한이 최소화(最小化)되고 자유가 극대화(極大化) 된 그런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선악과(善惡果)를 따는 것, 그런 제한 마져도 없는,
즉 아무런 제한도 없는 자유는 관계가 끊어져 버린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자유마저 누리겠다 하고 선악과를 따고 넘어간 세대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 죄 속에 폐쇄되는
그리고 따지 말라고 하는 그 선악과 안에 갇혀버린
더 좁은 세계로 들어가 버린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자유가 있다는 말 자체를 좀 깊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날 사람이 아파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는 것을 즐거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고 안고는 내 자유입니다. 물론 자유입니다.
그러나 안 가면 그 병으로 인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고통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김성윤 : 그 결과가 뻔하잖아요.
노우호 : 그렇지요. 그러니까 자유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데,
특별히 종교(宗敎)도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어느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내 자유다
개인의 자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 가고 안 가고 내 자유다” 하면 무슨 회사원이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안 섬기고는 내 자유다” 그러면
사람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아내가 될려면 남편에게 일정한 대의를 지킬 때
아내가 되는 것이지 아내가 되어 가지고
“남편을 섬기고 안 섬기고는 내 자유다” 하면서
남편에게 무성의(無誠意) 한다든지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고 안 사랑하고는 내 자유다”
이렇게 하면 관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음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 되어 있는 그 상태가 참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 나가지고 죄에 빠지면
죄에 매이고 참 자유가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日本)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글을 쓴 글을 한 토막 보았는데,
일본 같은데서 성자유(性自由)라는 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한마디를 했는데,
“도대체가 성자유가 뭐냐? 그것은 성범죄의 노예지 성자유가 아니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유라는 것이 죄에 빠져 들어가면서
자유라는 것은 나중에 죄의 종이 되는 것이지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를 지을 자유가 있어서 죄를 짓는데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다고 한 것이지
자유라는 것은 방종(放縱)의 종(從)으로 가는 관문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유를 가지고 좋은 쪽을 선택할 때
자유는 참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어떤 것이든지 그 자유를 선택을 했으면
마땅하게 책임이 뒤따르고 그 책임에는 심판이 뒤따르고요.
노우호 : 그래서 한번 사람이 죽으면
용케 죽을 때까지만 경찰을 피하고 넘어가면 괜찮을 줄 알고
그래서 자유를 만끽한다면서 선을 선택 하지 아니하고
온갖 악을 선택했다가는 요령껏 이 세상에서는 잘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재판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벌(罰) 받을 사람이 훈장(勳章)을 받기도 하고 상(賞)을 받고,
훈장(勳章) 받을 사람이 벌을 받는
그런 불합리(不合理)가 이 세상에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 삶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성경(聖經)은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라고 하는 성경이 있는데 히브리스 제 9장 27절에 보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반드시 심판있다.”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때에 특별히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될 때는
결국 내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이 책임이 내게 있다 하는 진지한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나 내가 평생 몸 담을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나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나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나 이런 것은
다 소홀히 하거나 경솔히 할 일이 아니고,
또 자유라는 말을 함부로 오용 남용을 하면서
방종으로 가는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맨 먼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
“사람의 제일 되는 본분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다음에 심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것,
아주 근본적(根本的)이고 또 본질적(本質的)이고 궁극적(窮極的)인 문제를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에만 급급해서 살고
당장 내게 지워지는
어떤 의무감(義務感)나 사명감(使命感)이 부담스럽다고 해가지고
방종 된 그런 삶을 살고,
“이 모든 것은 자유다” 하게 되면 그 인생은 보장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사명대로 살지 않았고 본분도 지키지 않았고
창조된 인간이 존재된 그 목적에 맞지 않게 살게 되었다고 할 때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종교를 믿고 믿지 않는 것은 개인의 자유는 확실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 갈 때는
문제가 “천국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는 내 자유다”고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김성윤 : 예.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노우호 : 그리고 “지옥에 가고 안 가고도 내 자유다” 그렇게 못합니다.
그것은 그 자유는 내 선택에 따라 달려 있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 참된 진리를 쫓아서 참된 신앙을 따라서
바르게 언제나 선을 선택하면서 살면
그 다음에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장을 하신 것이고
성경(聖經)은 이를 증명(證明)하기 위해서 증거문서로 우리 손에 들려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고 또 밤이 길고 한 그런 때에
등불과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계절인데,
성경을 차근히 창세기(創世記)부터 차분히 읽어보면
인간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나 자신의 어떤 주관적(主觀的)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떤 경로로 통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잘못되었다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데,
그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
즉 신약성경 중 13권을 기록했던 그 바울이라는 분이
자기 내면세계(內面世界)를 깊이 들여 다 보았는데
그 내면세계를 들여 다 보니까
선(善)을 행(行)하기 원(願)하는 자기 양심이 있는데,
그 양심(良心)을 억누르고 있는, 그 양심을 억압하고 또 지배하는 죄의 세력이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선을 원하고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는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규(絶叫)하다가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내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師徒)가 되었고
성경(聖經) 중에 신약성경 13편을 기록하는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정말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노예(奴隸),
즉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나 바울은...” 하면서
아직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그의 전 생(生)을 불살라 받쳤습니다.
오늘 이 시간 프로그램 제목이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앞으로 우리가 왜 이런 종교를 넘어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지
이런 이야기를 깊이 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김성윤 : 아담과 하와 시절 때부터 제한을 최소화한 그리고 자유를 극대화 시킨 그런...
노우호 : 그때가 제일 자유가 많았고 제한은 최소화되었었는데,
인간이 욕심을 내어 가지고 그것 마져 “그 제한을 없애 보겠다”
그 결과는 치명적 죄의 사슬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김성윤 : 그러니까 선택과 의지의 자유를 주신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르겠어요.
노우호 : 특권(特權)이면서 부담스럽습니다.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 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12. 기독교는 지나치게 독선적인 것이 아닌가?
김성윤 : 목사님!
노우호 : 예.
김성윤 : ‘기독교(基督敎)는 지나치게 독선적(獨善的)인 종교다’ 라는
그런 비평(批評)을 들은 적이 참 많거든요.
노우호 : 예. 그럴 것입니다. 특별히 일반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만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傳道)하게 되면,
“야, 너희 종교는 특별이 너희 종교만 옳다고 독선적으로 주장하느냐?”
그래서 아예 말도 못 꺼내게 그렇게 하고
“나도 나 나름대로 종교가 있으니까 나한테는 다시는 말 꺼내지 마라”
이렇게 하면 그만 “자기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되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 전도자(前導者)들이 위축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할 때 그리스도란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김성윤 : 그리스도...
노우호 : "그리스도" 하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Cristov"),
크리스토스라는 말은 헬라어로 번역된 말이고
원래 성경에 기록된 원어(原語)에서 히브리어,
즉 이스라엘 나라 말로 할 때는 메시야(Messiva"=마쉬아흐),
메시야 하는 말은 “기름을 부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이런 뜻인데,
그것은 권위(權威)를 인정(認定) 할 때에
그 사람 머리에다가 올리브기름을 이렇게(머리에) 부어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누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이 세상에 구세주(救世主)로 보냈는가?”
하는 말이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메시야이고 신약에서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크리스토스,
우리 한국어로 할 때 그리스도, 또 한문으로 할 때는 기독,
기독교하는 “기독”이라는 말이
한문으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음으로 하지 못하고
그 글자로 할 때 “기독”을 써 놓고 읽을 때는 그리스도라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말 한분에게만 기름을 부어서 우리의 구세주,
즉 온 세상의 구세주로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종교들이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지만
노력한 것 그 자체는 참 인정을 해야 될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문제를 알아볼까? 해결해 볼까?
인간에게 있는 문제를 어떻게 알아 낼 것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노력을 한 것은 참 우리가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으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은 사람,
그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Ihsou'" Cristov"),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성(性)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리스도라는 말은 직분(職分)처럼 된 그런 용어(用語)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좀 독선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이유는
기름부음 받은 분이 여러 분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 분만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았는데,
석가모니도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아니고
공자님도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아니고
예수님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즉 예수가 그리스도지
석가모니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공자님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소크라테스 그리스도도 안 되고
예수님만 그리스도다. 예수님만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그런 그리스도다.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독선적이라 할 때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분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은 정말 독선적이십니다.
하나님 홀로 선하시고 다른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존재가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독선적인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 한분밖에 없고, 기름부음 받은 자도 한분밖에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다른 사람을 기름 부어서 하면 모르지만
영원토록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한분 밖에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독선적인 것이 정상적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증거(證據)하는 진리(眞理)가
유일(唯一)하신 한분밖에 안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계시 받은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유일하신 하나님이 한분이신데, 그분이 기름을 부은 분은 한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도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분에게만 기름을 부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나도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고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존재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든지 공자님이든지 그 어떤 위대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다 한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다”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 그리스도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유일한 계시(啓示)가 성경(聖經)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경 안에 보면 “천하 인간에 구원(救援)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고”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최후의 만찬 석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그 진리요 내가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없다. 유일하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하신 구세주는 예수 그분만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이 말을 놓고 이해를 못할 때는
사람들이 “종교는 여러 가지라 상대적이지 어떻게 절대적이냐?
왜 너희만 지나치게 독선적이냐?”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것은 정답이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종교가 찾고 찾던 그 진리가 마침내 나타났으니까
이제 너희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진리가 바로 여기 있다 하고 나타났는데
그 답은 하나이기 때문에 독선적인 것입니다.
답이 여러 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서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없습니다.
어떤 땅에서 자동차로 가는 길이나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길이 있지만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그 길,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면
그만 “독선적이다”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홀로 선하시며
그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는 성경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성경과 하나님이 증거하는
유일하신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일만 스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분이어야 되지 아버지가 여럿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을 수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다. 아비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분도
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에 굽히면 우리가 거짓말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종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거기도 무슨 진리가 나올 줄 알고 그것을 찾고 있는 과정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진리 이외에
다른 진리는 아무리 시간이 가도 절대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2000년이 지났어도 그들이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 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우리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
즉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신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신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다면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겨서
그런 것을 신으로 여기지는 말아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에 그런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한 혈통(血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김성윤 아나운서는 “김씨”고 제 성은 “노가”입니다만
아무도 남이 아닙니다.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에게
때때로 감정이 안 좋을 수 있지만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다 한 혈통으로 만드신 우리가 이북에 있는 사람만 동포가 아니고
성경을 믿고 한 하나님 믿을 때는
중국 사람들도 한 혈통이고 일본도 우리와 다 같은 한 혈통입니다.
그래서 “단군의 자손이다.” 이것만 강조 할 때는
아주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가 되고 아주 편협하게 되는데
성경은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구약성경 말라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 유여(有餘)하실 지라도 한 영혼을 창조해 가지고
그 한 영혼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해서
아무도 남남이라 하지 못하게 경건한 자손을 얻을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부러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아무도 남남이 없고 아무도 원수가 없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중보자도 한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안 읽어 보셨기 때문에
아직까지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자기들도 앞으로 찾으면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우리에게는 진리가 없다고 하느냐? 왜 너희만 가졌다고 큰 소리 치느냐?”
이렇게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지탄(指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꼭 성경을 한 번 읽어 보시면 그 말씀을 못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경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다른 종교를 신봉(信奉)하는 종교인들이
마음을 비우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애타게 소개하고 전할려고 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어 본다면
왜 기독교가 한결같이 독선적인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지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일단 뒤로 하시고 꼭 성경을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혹시 어려운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있으면 가까운 교회에다가 전화해서
아직 교회 안 나가셔도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 방송국으로 전화해도 좋고 아니면 저희 집으로 전화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가까운 교회에다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로 전화 오는 전화가
성경을 읽다가 전화 오는 그런 전화가 참으로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다려지는 전화인데 말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하기 위해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 보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 하나만 알아도 큰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다.
사실 “하나님” 하는 그 말에는 “하늘님”이라는 뜻 보다는
한분이신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너무 순수한 말로 하나님으로 했는데 잘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이라는 어떤 범신록적인 것이 아니고
한분되시는 유일하신 분,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고 독선적이고 유일하시고
그런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신 분, 즉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분이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고
그분을 아는 것은 곧 영생(永生)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3.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인가?
김성윤 :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것이 어디에 증거가 있습니까?
노우호 : 예. “왜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 참 종교라고 강변하느냐?”
그런 항의나 질문을 자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 곧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보면
참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믿어야만
우리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20년 동안
성경을 이렇게 한 7,80번 이렇게 읽으면서 살펴본 결과
성경에서 만나지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참된 진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基督敎)를 통해서 또 성경(聖經)을 통해서만
계시(啓示)되었다는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조금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하나님 따로 있고 한국사람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
온 우주의 오직 한분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서양종교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는데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모두가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고,
그래서 모든 세계 모든 만민들이
하나님 한분을 같이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은
창조주,
다른 말로는 조물주라는 말로도 쓰는데, “창조주(創造主)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 우주(宇宙)와 만물(萬物)과 천사(天使)들과
인간(人間)들을 친히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저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관심이 많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게 되는데,
그래서 종교를 갖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다면 정말 종교가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보이는 세계 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서 이루어져 있는데,
보이는 것은 육체이고 보이지 않는 영혼,
그 영혼이 떠나 버리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런 몸이라도 시체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內面世界)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종교(宗敎)는 특별히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과학(科學)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아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으려고 할 때 뭘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분을 믿을 수 없겠고
알아도 무슨 능력(能力)이 없으면 믿고 의지할 만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능력에 있어서 전능(全能)하시고
지혜(知慧)와 지식(知識)에 있어서 전지(全知)하신 분으로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하나님은 영(靈)이신데,
우리가 영이라는 말에 대해서 좀 생소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혼(靈魂) 할 때는 우리가 쉽게 이해가 되지만
따로 영혼에서 혼을 빼고 영할 때 영이라 할 때
물론 한문 글자 신령 령(靈)자를 씁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
즉 참된 종교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야 되겠는데,
성경만이 온 세계의 무슨 책이나 무슨 종교도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비밀(秘密)을 밝혀 놓은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김성윤 : 역시 영도 보이지 않는 세계잖아요.
노우호 : 그렇지요. 영도 혼도 안 보이는데
특별히 영의 세계에 대해서 성경이 가장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다”
“참된 진리를 완벽하게 증거 할 수 있는 종교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처럼 영을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증거하는 증거를 두고
“하나님이 어디 어디 있느냐? 하나님 한번 보여주면 믿겠다.”
우리 눈에 벌써 보였다하면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육체거나 물질이거나 그렇지 영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육안(肉眼)으로는 영을 볼 수 없는 분인데,
그런 분이 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성경을 기록하게 하셔서
그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는 그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
즉 어떤 피조물과 어떤 영적인 세계에
천사나 무슨 다른 영들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아주 거룩한 분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비교(比較)한다든지
혼돈(混沌)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다” 그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 그러면 대개 죄를 짓고 살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두렵기만 하고 무섭기만 한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대개 하나님을 피하고 싶고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이 부담스럽다
이렇게 해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사귀어 보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온갖 것을 다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분이고,
오곡과 백과를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태양과 달 창조하신 분이시며
온 우주의 모든 별들도 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다른 종교 창시자(創始者)가 있다 할지라도
그 종교 창시자 자체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
그래서 누가 누구의 말을 듣고 있다가도 역시 하나님 말씀이 나오면
다른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야 말로 가장 우주적이고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거룩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김성윤 : 모든 것을 창조 하신 분이 안 계신 곳이 없으시잖아요.
노우호 :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性品)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의 편재,
즉 무소부재하다 그럽니다.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도 하나님 계시고
바다 밑에 간다 할지라도 거기도 계시고
음부에 까지 가도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육신의 눈만 가지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내 눈에 안 보이니까
죄를 범하기에 마음이 담대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악한 일에도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니까
인생들이 죄를 범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솔로몬이 그런 지혜를 남겼는데,
정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그 사실 알게 되면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대개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담대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보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죄를 짓기가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김성윤 : 그럴 거예요. 그리고 야고보서에 보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노우호 : 예 그렇지요. 빛이 투영해 버리니까 그림자가 없습니다.
영이시니까 후회함도 없으시고...
김성윤 : 영원(永遠)하신 분 불변(不變)하신 분
노우호 :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변덕(變德)을 부리다면 믿기 어렬 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변할 필요도 없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은 변역지 아니하신다. 말라기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성윤 : 역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인격을 가지시는 분이시지요.
노우호 : 그렇지요. 희로애락(喜怒愛樂)라든지 지정의(知情意)를 다 가지고 계셔서
우리처럼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노여워하시고
가슴 아파하시고 애태우시고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저 무섭기만 한 분만 아니고 참 눈물도 많으시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헛된 것을 섬기는 것 때문에
애를 태우고 눈물을 흘리시는 부분이 여러 군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감정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잘 고려하지 않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이 매우 감정도 풍부하신 분이시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김성윤 : 특히 창세기를 보면 사람을 다 짓고 나서
“매우 좋았더라” “매우 좋았더라” 말씀하시잖아요.
노우호 : “좋아더라”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b/f)라는 말인데,
토브는 그야 말로 토브입니다.
너무 아름답게, 즉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
정말 하나님은 미(美)의 원천(源泉)이다.
진선미(眞善美)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열 번째는 하나님은 지고지선, 즉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 인간의 심령 속에다
양심(良心)이라는 법을, 양심이라는 지부를 두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자율로서 우리 속에 내재하도록 그렇게 심어 놓았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분도 하나님을 상당히 더디 믿는 분인데,
그분은 헤프게 믿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자기 양심 속에서 반짝이는 이 도덕률(道德律)에 대해서는
경이로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 후천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양심이라는 내재율(內在律),
즉 마음속에 있는 심어진 이 법을 심은 분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찾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한 번째는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간이라든지 공간 자연법칙 운명 질 양이나 죽음까지도
다 초월하시는 그런 분이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럴 힘이
벌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타고났던 그런 운명,
예를 들어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되었던 그런 분들도
고침을 받아 버리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초월자(超越者)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두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입에 담기 황송한 이름이지만 “여호와”, “여호와” 그 말은
김성윤 : 스스로 계신다.
노우호 : “스스로 계신 자” “자존 자”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계시 받은 이름인데
자존자라는 말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어디 써 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 전부터 무궁하기까지 영원히 스스로
그 자신이외에는 다른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 분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시고
다른 원인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 여호와라는 그 이름 한 가지만 가지고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한분이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세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웬만큼 악해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참으로 많이 참아 주시지만
그러나 역사에 개입(介入)하시고 역사를 섭리(攝理)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이 성경이라는 것은
바람타고 구름 잡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구체적(具體的)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직접 설계(設計)하시고 창조(創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 통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김성윤 :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오늘 이 시간 함께 했었는데요.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참되고 유일한 종교라는 그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잘 나타나 있겠지요.
노우호 :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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