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와 방언에 관한 소론
1. 은사주의와 방언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과대 평가한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 소극적인 언조를 잃지 않는다. 공중 예배에서는 하지말아야 할 것이고, 방언보다는 다른 은사가 더 유익이라고 하고 있으며, 결국 방언은 폐할 것이다고 하였다. 방언은 단지 자신의 신앙적 덕을 쌓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하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지고하고 중심적이며 중요한 은사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보다는 말씀의 은사를 반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6).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9). 이성적인 말씀의 은사가 불분명한 방언의 은사보다 귀중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말씀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이 방언에 강조점을 둔 은사주의 신학보다 더 성령의 사역에 깊이 밀접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은사주의 교회의 성령론이 방언을 높이 평가하고 성령 받은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표증으로까지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다. 방언은 단지 하나의 성령의 은사일 뿐 없어서는 안될 중심적인 높은 은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방언을 일부러 추구하게하거나 강조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방언은 기도가운데 자연스럽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것은 성도 자신이 어느날 믿음의 여정가운데 모름지기 주어지도록 방임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 처럼 그것이 성령의 뚜렷한 표징으로 과대하게 선전되거나 권장되어서는 아니된다.
2. 이단과 타종교의 방언
필자는 예전에 명동의 YWCA 에서 있은 이 장림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 장림 교회는 한때 시한부 종말론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던 이단 단체의 하나이다. 그 당시 한 소녀(처녀)가 나와서 방언과 통변의 집회를 하는 것을 보았다. 차례 차례 한사람씩 나와서 몇분씩 방언을 하면 그 소녀가 통역을 하였다. 아마 40여명이 계속 나와서 자신이 받은 방언을 말하였다. 시간이 제한된 관계로 더 이상 방언 지원자들을 받지 않았다. 거기에 참석한 이 장림 교회의 대부분이 방언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장림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받은 이 방언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란 말인가 ? 그들이 말하는 방언은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이렇게 방언도 거짓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그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하며 이 방언을 말했다. 소녀가 방언을 통역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성경의 내용에 있는 말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단, 10월 며칠 예수님께서 재림한다는 통역은 잘못되었지만 말이다. 만약 이 장림 교인들의 방언이 성령의 역사라면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할 이유가 없어진다. 많은 이단들, 이 재록이나 김 귀동같은 집단들도 방언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서 방언하는 말들과 그들이 말하는 방언을 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이단으로 분류된 많은 집단들은 이 방언에 매우 집중하며 권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성경에서 방언에 대하여 소극적인 언급을 하고 있음을 무시하고 방언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권장하고 있는 은사주의는 사탄의 침투를 허락하고 있지 않은가 심히 경계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불교의 스님이 쓴 일종의 간증문으로 우리가 어떻게 방언에 대하여 접근하여야 하는가를 잘 깨우쳐 주고 있다.
<인용 시작>
(진각스님 글)
언젠가 광명사 신도회 총무 장상원 거사님은 당시 주소가 충북 청원시 석교동 육거리에 있는 뉴 코리아나 관광여행사이다. 몇 년 전부터 청원군 미원면 운교리에서 정미소를 하고 인삼재배도 하며, 동네 이장도 보면서 시골에서 살고 있었으나, 얼마전 까지만 해도 청주에 나와 살았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장상원씨가 간경화로 지라까지 붓고 아파서 수술도 못할 상태였다. 좋다는 약만 구해서 먹다가 병이 악화되어 다들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의 형 두분이 서울에 있으면서, 특별히 의사에게 부탁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부터는 절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큰 아들 정 현태군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와서 집안 일을 도왔다. 겨울방학이 되자 경운기로 볏짚도 실어나르고 벼짝을 메어 나르며 장정들 부럽잖게 일을 하였는데 봄이되자 오른쪽 다리가 아프고, 허리 척추뼈가 3개가 튀어나와 학교에 못 다니게 되었다. 청주의료원에서 디스크 명으로 진찰이 나와 고치려고 두 달이 넘도록 치료를 하였으나 병은 낫지를 않았다. 대전 대학병원으로 서류를 넘겼으나 그만두고, 스님의 권유로 휴학계를 내고 약도 썼다. 여름방학이 되어 구인사로 가서 한달 기도를 하였어도 병은 낫지를 않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닥쳐왔다. 스님은 또 권유를 하여 태현군을 구인사로 한 달 기도하도록 보내고 부친은 가까운 절에서 한 달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장 상원씨는 동네 이장도 보고 인삼포며 방앗간 때문에 낮에는 기도를 못하고 밤에 열두시가 넘어서야 기도를 할 수가 있었다. 오랜 질병에 지쳤는지 하루는 스님보고 “나는 내년 4월을 못넘길 것 같다.” 는 마음 약한 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스님은 몸이 달아서 장상원 처사님을 데리고 구인사로 가서 태현군을 만나 “너는 병을 못 고치면, 병신의 몸으로 가정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너의 부친은 본인은 아픈것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고 네 병이 낳기만 바라며 밤 12시가 넘어서도 밤마다 절에와 너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 어젯 밤에는 내게 하는 말이 내년 4월 까지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게 급하니 네가 한달이 넘도록 기도를 하여야만이 병이 나아 너의 아버지가 너를 보고 신심이 생겨나 기도를 할 것이고 그래야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강조를 하였다. 장상원씨는 아들을 보고 “병이 낫지 않으면 병신 자식 보기 싫으니 영춘강에 빠져 죽든지 집에는 어지도 말라” 고 하고서 왔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병이 낳았다. 태현군은 반가움과 두려움에 스님에게 달려 왔다. 밤이 되어 부모와 함께 절에 온 태현군이 스님께 인사를 하니 스님은 계속 기도를 해야 한다며 다시 기도를 시켰다. 그런데 태현군이 관세음보살을 몇 번 부르더니 “쯔쯔 쫘쫘 쯔쯔 떠떠......”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부모는 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말고 “스님 얘가 집에서도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스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런 소리를 할수도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방언이라고 하고 절에서는 이런 경우를 변음이라고 하는데 자꾸 기도를 하다보면 과거의 업장이 들어나 없어지면서 그런말이 나오게 된다고 부모를 안심시겼다. 스님이 태현군이 언제부터 그랬냐고 물으니까 태현군이 말하기를......“스님이 다녀가신 뒤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낮에도 부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힘껏 뺨을 때리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아무도 안 때렸다는 거에요. 볼을 만져보니 분명 손가락 자욱같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방에서 나와 대조사스님 묘소에 올라 갔더니 보살님들이 많기에 나는 한쪽에 조용한데 가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데 또 누가 뺨을 너무 아프게 때리는 거에요. 그래서 하두 이상해서 묘소 지키는 스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스님은 웃으시면서 저보고 기도 열심히 하라고 신장님이 때리시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후 열심히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데 누가 ‘학생 공양하러 가지’ 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소리가 잘 되다가 ‘쯔쯔 쫘쫘 쯔쯔 떠떠......’ 그러면서 아무리 관세음 보살을 부르려해도 자꾸만 이상하게 변음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기도를 하였는데 언제 부터인가 다리가 안아팠어요.” 이 말을 들은 부친도 “나도 이제부터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신심이 생겨나 남마다 잠들기 전에 꼭 관세음보살을 정진하고 낮에는 길에 다니면서도 불렀는데 하루는 꿈에 혜만스님이 “차차 괜찮아 질거요”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차도가 점 점 좋아져 농사일을 그만두고 그 뉴 코리아 관광여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 같지만 관세음보살 부르다가 우는 사람, 귀신하고 싸우는 사람, 변음이 나오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그만큼 사람마다 다르게 신기한 일들을 경험할수 있다. 여기서 나의 얼마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곳 보성의 움막에 처음 올때만 해도 컴퓨터를 전혀 몰랐다. 켜고 끄는것 조차 모르는 상태인데 얼떨결에 컴퓨터 한 대를 보시 받고 나서 10년동안 비어있던 이 폐가로 들어와 홀로 책을 구입하여 보면서 컴퓨터를 공부했다. 그러다 5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우연히 인터넷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인터넷으로 인하여 사이버사찰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나의 신기한 가피는 이때부터 일어났다. 오늘 처음 글을 남기는데 아마 가피를 입어보질 못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내가 적는 글에 대한 이해를 알지 못할 것이고 설마...설마...할 것이다. 하지만 원력을 입었거나 가피를 입은 재가불자들은 당연 하리라 생각을 한다. 내가 컴을 혼자 배운지 5개월이 넘으면서부터 홈 페이지 제작에 들어갔다. 가피는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를 주무르다가 분명 컴퓨터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 분명 이렇게하면 될 것도 같은데 왜 안되지?하면서 그날 밤 끙끙 앓으며 헤메다가 잠이 들면 꼼 속에서 얼굴도 볼수 없는 하양 가사장삼을 수한 사람이 나타나 정확하게 홈페이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소스를 저었던 것이다. 그럼 그 꿈을 꾸자마자 당장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그 생생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보면 과히 아니 놀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가피를 무려 1년이 넘는 동안 매일 꿈 속에서 그렇게 배워 오면서 사실 지금의 인터넷 사찰의 기본 틀이 짜여 졌다고 보면 된다.
기도란...... 죽음의 직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마냥 약에 의존하지 않고 돈에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나 어디에도 의지 살 데가 없고 오직 마지막으로 부처님에게만 의지하지 않으면 않되겠다고 생각할 때 그때야 말로 참다운 기도 정진이 된다는 것이 보통 스님들의 한결 같은 말씀들이다. 다른 잡된 생각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한 생각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보살님을 불렀을때 관세음보살은 그 사람을 도와 주는 가피를 내리는 것이다. 그런 기도 정진을 함으로써 불자들은 어려운 난관을 미리막고,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야 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닌 진실로 나는 하나의 원을 세우고 그 원에 대한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끝>
3. 폐하여진 은사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 : 8-10)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은사주의냐 아니면 개혁주의냐를 판가름한다. 은사주의자들은 분명히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로 해석하는데 반하여 개혁주의자들은 사도들의 기록이 확정이 된 때 즉 새 언약의 때로 이해한다. 만약 온전한 것이 새언약의 확정으로 확인된다면 방언의 유효성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을 면밀히 살펴 본다면, 폐하리라고 한 것은 방언, 예언, 지식이다. 다른 여러 가지 은사중에서 이 세가지를 언급하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 복음이 확정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 성경에 의하여 복음이 설파되지 않고, 예언과 성령을 따라하는지식의 말과 방언이라는 방법으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강론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질서한 측면을 예상하여 질서대로 하라고 하였고 방언에 관하여는 공중에서 하는 것을 제한하라고 권면하였다. 위 말씀을 주의깊게 읽으면 예언, 성령을 따라하는 지식의 말씀, 방언은 모두 언어(language)와 관련되는 단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댓말이 되는 온전한 것도 온전한 말씀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오실 예수님이라면 "온전한 것"이라고 보다는 "온전한 분"이라고 표현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신성을 올바르게 표현한 것이며 성경적이다. 예수님이라는 신성을 어떻게 물적인 존재의 의미을 담은 "것"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온전한 것이란 재림하실 예수님이 아니라 온전한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온전한 말씀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예언과 지식과 방언의 말들은 모두 부분적이었다. 온전한 말씀이 오면 이 부분적인 말들은 폐하여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은사주의 말대로 한다면 온전한 말씀이 확정되어 온전한 말씀속에 사는 오늘날도 부족한 언어들(방언, 예언, 지식)를 추구해야 한다면 우리는 불완전한 말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히브리서 8장 7절에 의하면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첫 언약의 흠이 있음을 시사하였고 둘째것은 흠이 없는 즉 온전한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8장 13절에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하며 새 언약에 의하여 흠이 없는 것(온전한 것)으로 대체될 것을 말하고 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4)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흠이 있던 첫 언약이 흠없는 온전한 것, 즉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단 말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란 “새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지 “다시 오실 예수님”이라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은사주의자의 말대로 하면 초림하신 예수님은 온전한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언, 지식, 방언과 대칭되는 “온전한 것”은 어떤 존재가 아니라 어떤 말씀인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말씀 즉 새 언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방언은 폐하여졌고 예언은 위에서 내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며, 예언이 폐하여진 후부터는 새 언약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며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강론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오늘날 대언(예언)은 없고 이미 우리에게 “분부한” 새 언약을 가르치는 것만이 있는 것이다.
은사주의의 견해대로 한다면 온전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방언을 해야 하고 부분적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예언해야 하고 부분적인 성령께서 수시로 주시는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 재림 때까지 강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4. 결론
물론 필자의 이 해석에 대하여 반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또 구태여 이 견해를 궂이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은 방언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인 언급을 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을 적극적으로 채용하며 성도들에게 방언받을 것을 권장하고 방언받는 것이 신앙의 척도인 양 이야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방언에 대하여 언급하는 바는 심히 유의하여 사역에 적용하라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사탄에게 빌미를 주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정통 개혁주의 교회들이 알파코스와 같은 은사주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방언을 성령의 대표적인 표징과 은사의 하나로서 성도들에게 권장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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