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의 뉴에이지적 영성
그의 하느님은 성경의 하나님과 달라
그의 하느님은 성경의 하나님과 달라
필자의 지난번 글(‘동성애자로서의 헨리 나우웬’) 아래에 뜬 댓글들을 유심히 읽어봤다. 나우웬의 배경을 혹 필자만큼이라도 파악한 독자가 있나 해서였다. 글을 달아준 분들은 많았지만, 통탄스럽게(!), 한 분도 없었던 것 같다.
필자는 당초 나우웬의 글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의 숱한 글과 30여권에 달하는 저서들의 방대한 내용은 쥐뿔도 모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배경을 집중 연구한 결과 그의 정체는 알만큼 알게 됐다.
이 글은 칼럼이나 기사라고 하기엔 너무 길지만,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이 글의 목적은 나우웬 '때려잡기'가 아니라 그의 위험한 영성을 무차별 수용해온 데 대한 경고차원에서 쓴다.
한국/한인교회가 이처럼 폭넓게 나우웬의 영성에 빠져있는 현상에 관해 지난 90년대에 진작 경각심을 갖지 못한 데 대해 필자 자신도 유감스럽다.
물론 나우웬의 글이 다 해롭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나우웬의 영성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왜 잘못됐는지를 바로 알고 읽자는 얘기다. 바로 알고 읽기와 모르고 읽기는 하늘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최근까지 한글로 번역돼 나와있는 나우웬의 20여 권 되는 번역서를 다 읽었다고 해도, 나우웬의 참 모습을 모를 수 있다. 아니 모르기가 더 쉽다. 나우웬의 책을 모두 섭렵해 나우웬 영성 세미나를 이끄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초월한 사랑은 무익
▲기독교 '최고의 영성' 나우웬의 강의 모습(그림). © 김삼
헨리 나우웬을 '최고의 영성'이라고들 한다. 1994년, 미국 개신교 지도자 3,400명을 상대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가 누군지를 물은 설문조사에서도 나우웬이 빌리 그레이엄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영성은 영적 성품, 또는 영의 특성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이 영성의 높낮이를 가리는 척도인가? 인기인가, 인류애인가, 정서에 호소하는, 고도로 심리학적인 필치인가? 영성의 잣대는 성경과 성령이어야 할 것이다. '최고'란 말 자체가 예수 크리스토나 하나님보다 높다는 뜻도 되지 않는지 조심스럽다.
나우웬이 죽기까지 자신을 '타고난' 동성애자로 믿고있었음은 이미 필자의 글 '동성애자로서의 헨리 나우웬'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 점에서라도 이미 그는 '최고의 영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이 '최고의 영성' 속에 도사려있다. 나우웬의 다음 말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우리의 내성소(inner sanctuary)에 거하는 하느님은 각 인간의 내성소에 사는 신과 동일하다"(Here and Now, p.22).
위에서 나우웬이 말하는 '우리'는 카톨릭 신자들, '각 인간'은 타 종교인을 뜻한다. 결국 나우웬이 원튼 원치 않든, 그의 '하느님'은 범신론,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의 신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동에서 서처럼 멀다는 얘기다.
뉴에이지는 세계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힌 엄청 복잡한 세계관으로, 여기서 일일이 다 설명할 순 없고, 종교적 면만 살피기로 한다. 흔히 뉴에이지는 기독교의 전체를 통째 받아들이는 듯한 간교한 제스처를 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뉴에이지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전혀 다르다.
뉴에이지는 '더 좋은 세상'과 세속적 평화를 장담하는 반면, 성경이 보는 세상은 마귀가 '임금'으로서 지배하는 곳이며 갈수록 더 악해지고 나빠져간다. 부분적으로는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평화와 개혁이 일시 가능하지만 전체 세상은 악화돼가는 것이 성경적 상식이다.
뉴에이지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죄'를 인정치 않으며 크리스토의 구속 사역이 불필요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비기독교적인 모든 종교의 합일 내지 세계 단일종교를 추구하며, 이에 대한 기독교측의 타협과 굴복을 기다리고 있는 게 뉴에이지다.
나우웬은 세상이 자선적 사랑으로 구제되고 모든 사람들이 '신적' 본성을 되찾으면,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죄투성이 인간의 있는 모습 그대로에서 신적 존재인 '참된 자아'를 찾는 뉴에이지적 영성은 죄관이 흐릿하거나 아예 없다.
원죄나 심지어 현행 자범 죄까지도 중시되지 않는다. 그처럼, 나우웬의 영성에서도 죄가 별로 문제시되지 않고있다. 반면 성경은, 크리스토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과 말씀의 빛으로 온전히 거듭난 사람만이 신적 성품을 되찾는 것으로 가르친다.
나우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 '스승'이었던 라르슈 공동체의 정신장애우, 청년 아담 아네트를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렇게도 투명한 그의 마음과 인격은 내게, 우주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으로도 비쳐 보였다."
나우웬을 극찬해온 정교회 평신도지도자인 언론인 짐 포레스트는 이렇게 평했다. "헨리의 생애 말기에 일어난 치유의 많은 부분은 아담의 선물이었다. 아담은 그의 삶에 산 아이콘(성상)이 돼준 셈이다."
우주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 삶의 아이콘?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상은 기본적으로 죄의 마음부터 보이는 죄인이 아닌가? 필자도 정신장애우들을 위해 잠시 봉사한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은 보통사람들보다 해맑고 순수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근본 바탕은 죄인이다. 그들 가운데서 악도 보인다. 또 그중엔 악령에 짓눌려 해방사역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단지 '순수'하다 해서 곧 신은 아닌 것이다. 순수 이전에 예수 크리스토의 구원이 절대 필요한 죄인이다. 그 순수를 '우주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다. 그리고 그 순진한 견해 속에 뉴에이지를 추구하게 하는 마귀의 장난이 숨어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기왕 아이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우웬은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처럼 성인들의 성상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 관습을 본인이 즐기면서, 독자들에게도 적극 권장한다. 성상 기도에 관한 책도 한 권 썼다. 성상 기도 관습은 곧 죽은 성인들에 대한 숭앙, 따라서 망자와의 교제, 성인들의 '중보적' 역할에 대한 시인이나 마찬가지다. 동시에 우상숭배다.
▲성상을 앞에 놓고 하는 기도를 권장한 나우웬의 책. © 김삼
나우웬은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일시적 사역을 사역의 롤모델로 삼았고, 라르슈 사역의 소명을 받은 동기도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기보다 한 여성친구의 방문 앞에 걸린, 역시 화란 사람인 렘브란트의 성화 '돌아온 탕자'에 대한 서정적, 미적 영감으로부터 비롯됐다. 나우웬의 영성이 그 정도다.
나우웬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이 없다는 게 아니다. 인류애를 실천하고 구현하려는 그의 노력, 사랑을 통한 치유의 시도는 분명히 본받을만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헬렌 켈러, '마더' 테레사 등 우리 주위에서 위인으로 칭송받다가 간 수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성경의 크리스토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슈바이처와 켈러, 테레사의 크리스토관은 성경과는 전혀 다르다. 켈러는 이단인 즈베덴보리 교(Swedenborgism)의 얼굴 마담 같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다 진리로 띠를 둘러야 한다. 진리가 결핍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성경대로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이신 크리스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란 얘기다.
아가페의 하나님은 동시에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잊어선 안된다. 크리스토 자신이 진리이시다. 참된 치유는 성경말씀을 진리 그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이 결부된 사랑 안에서 나타난다. 참된 치유는 신령과 진리, 즉 성령과 하나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신앙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나우웬의 구원관이 그의 사랑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니, 그 '사랑'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뉴에이지는 이처럼 모든 인류를 다 받아들일 듯한 엄청난 사랑의 제스처를 하지만, 그 사랑은 참된 아가페의 하나님과 진리이신 크리스토와는 무관하며, 지옥을 향해가는 내리막길이다. 캄캄한 흑암의 무저갱을 향한 검은 아가리와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그 무지개빛 신기루의 손짓에 현혹되지 말자.
나우웬과 테레사
크리스토를 통해 구속받아야 할 죄인들 속의 죄를 보지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속에서 '신'을 찾는 사람들이 뉴에이저들이다. 단적으로, 나우웬에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평생 사랑의 봉사로써 신구교인은 물론 온 인류에게 존경받은 '마더' 테레사의 발언들을 살펴보자.
"죽어가는 사람, 장애우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대상, 그들이 곧 마스크를 쓴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나는 하루 24시간 예수님과 함께 할 기회를 얻습니다."
"모든 에이즈 피해자는 측은하게 위장된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각 사람 속에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인가? 독자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가? 그럼, 다음을 또 보자.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을 믿은 테레사 수녀. © 김삼
"우리는, 하느님과 일대일로 대하면서 삶속에 그분을 받아들일 때 '개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힌두, 더 나은 무슬림, 더 나은 카톨릭, 더 나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런 피부색도, 아무 종교도, 아무 국적도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어선 안됩니다. 우리는 다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파괴할 때 하느님을 파괴하는 것입니다."(유엔 연설).
"나는 모든 종교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의 행동으로 더 나은 힌두, 더 나은 무슬림, 더 나은 불교도가 된다면 뭔가 다른 것이 거기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느님입니다. 불교도, 힌두교도, 기독교도 등등 모두가 똑같은 신에게로 나갈 수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위의 말도 다 테레사의 것이다. 이래서, 테레사와 그녀의 '자선선교단'은 결코 기존개념의 전도나 포교를 통해 카톨릭을 만들지 않는다. 사랑만 전해주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다. 정말 그런 걸까? 같은 카톨릭인 나우웬의 구원관도 대동소이하다. 지난번 글에도 인용했지만, 나우웬의 마지막 저서엔 다음 글귀가 있다. 이것이 그의 보편론적 구원관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단서다.
"오늘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집 대문을 열려고 오실 때, 모든 인간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예수를 알든 모르든. 각 사람 나름대로 신께 나아가는 길을 청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소명임을 깨닫는다."('Sabbatical Journey'.1998년 판. p.51).
"각 사람을 위한 자리가 하나씩 천국에..(마련돼 있다)"('Life of the Beloved'. p. 53'). 나우웬은 또, 우리 모두가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한다. ".. 사랑받는 자들이 되기위해 우리는 요구해야만 한다."(같은 책).
누가 누구에게 요구한단 말인가? 예수를 제대로 믿지도 않은 채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위대한 영성'의 위대한 착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성경은 오직 예수 크리스토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볼때, 나우웬의 구원관은 최고의 영성은커녕 사실상 주일학교 학생보다 못하다고 하겠다.
나우웬의 사상은 뉴에이지에 직결
나우웬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존재하는 만물의 완전한 '하나됨'의 실현화로 나아갈 수 있다."(Bread for the Journey). 모든 종교의 통합화를 추구하는 뉴에이지의 핵심 이슈의 하나다.
이에 대해, 뉴에이지 구루였다가 신자가 된 레이 영겐 씨는 이렇게 평했다. "그렇다면 사탄과 하나님도 하나란 말인데, 그런 말은 악령이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고보면, 나우웬은 '최고의 영성'은커녕, 성경적으로 볼 때 당연히 이단인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하나'란, 야훼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땅의 '하나'를 이루려던 고대 바벨탑, 바빌론의 종교를 그대로 대물림한 것이나 다름없다.
토머스 라이언의 책 ‘기독교적 삶을 위한 훈련’(Disciplines For Christian Living. 1993년) 서문에서 나우웬은 “저자는 불교와 힌두교, 회교 등의 선물에 대하여 놀랍게 열린 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종교)들의 위대한 지혜를 기독교의 영적 삶을 위해 과감히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호평했다. 나우웬의 다원종교적, 혼합종교적, 뉴에이지적 입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잰 존슨은 책 ‘영혼이 들을 때-명상기도 속에 안식과 향방 찾기’(When The Soul Listens: Finding Rest and Direction in Contemplative Prayer)에서 이렇게 썼다. “한마디 말이나 구절의 반복은 실로 우리를 달래주고 매우 자유롭게 해준다. 나우웬이 말했듯 ‘우리의 복잡한 내적 삶을 비우고 하나님과 함께 거주할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창조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내적 삶을 비우고’? 사뭇 불교적인 말이다. [여기서 존슨이 말하는 '한마디 말이나 구절의 반복'은 힌두교에서 따온 만트라 기도를 말한다. 이에 관해 나중 설명하련다.]
나우웬의 영성적 스승인 토머스 멀튼은 말한다. "우리가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아닌)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연합을 달성하도록 어떻게 가장 잘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이 이미 하느님과 연합돼있음을 말해주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과 크리스토를 알기도 전에 타 종교인들도 하나님과 연합돼있다고? 그야말로 뉴에이지 사상이다. 결국 나우웬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닌 사탄의 도구로 몰락한 셈이다. 참된 기독교는 성경말씀 이외의 모든 종교를 우상종교로 배격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하나'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나우웬과 토머스 멀튼(Thomas Merton)
▲나우웬의 영적 스승 토머스 멀튼 신부. 종교다원주의자, 종교혼합주의자로, 20세기 뉴에이지 영성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 김삼
나우웬과 멀튼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실과 바늘처럼, 두 바퀴처럼 늘 나란히 함께 간다. 짐 포레스트는 두 사람의 엄청난 공통점과 (약간의) 차이점을 장문에다 담기도 했다. 영문 구글닷컴 탐색기에 'Nouwen and Merton'이라고 써넣으면 1만여 관련자료가 뜬다. 진보적 카톨릭이자 종교 혼합주의/신비주의자인 토머스 멀튼의 책과 사상을 나우웬은 적극 추천했다.
그는 멀튼을 딱 한번 만났지만 영성적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추종했다. 나우웬의 책 ‘마음의 길’(The Way of the Heart) 등의 책엔 멀튼 외에도 도교의 장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 윌리기스 제이거, 사막교부들, 힌두교의 에크낫 에아스와란 등이 긍정적으로 인용됐다.
멀튼 신부는 동서방교회의 합일과 동시에 동서양 종교의 합일을 지향했다. 나우웬처럼 그도 역시 신교권에서까지 추앙받는다는 사실은 실로 경악스럽다. 그러나 멀튼은 나우웬보다 더 문제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루이 신부'로도 애칭된 멀튼은 20세기 카톨릭 에큐메니칼리즘의 선구자였다. 그는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에 누구보다 앞장선 한 사람이다. 도교, 선불교 등이 찾는 깨달음과 득도의 목표가 결국 기독교와 같다고 이해함으로써 20세기 뉴에이지 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반평생 도교, 불교와의 대화를 추구했다. 또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배워, 베트남 전쟁을 극렬히 반대한 반전/민권운동가, 평화주의자로, 에털 케네디 부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1970년대 책 ‘살기 위한 기도’(Prayer to Live)에서 나우웬은 멀튼이 힌두교 도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을 시인했다. 힌두교의 ‘요가저널’에 따르면, 멀튼은 아시아 여행을 하기 오래 전에, 이미 선불교, 수피교, 도교, 힌두 베단타 등과 접하고 동양철학과 지혜를 직접 수련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멀튼은 평소 "가능하다면 훌륭한 불교도가 될 수 있길" 원했다. 그는 또 5년에 걸쳐 장자와 도교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번역하면서 노트를 하다가 노자의 도덕경에 매료돼 ‘장자의 길’(The Way of Chuang Tzu)을 편집했다. 단순히 동양종교를 참조한 정도가 아니라 그속에 깊이 침잠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간 것이다.
멀튼의 글을 보면 뉴에이지 영성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인류의 일원이 되는 것은 영광스런 운명이다..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모두 볼 수 있기만 한다면 엎드려 서로를 경배하는 큰 문제가 일어날 줄로 나는 추측한다..우리 존재의 중심엔 죄와 환멸에 때묻지 않은 '무'(nothingness)의 점, 순수진리의 점이 있다..이 작은 점은 우리 속에 있는 신의 순수한 영광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 속에 있다."
멀튼의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아도, 위의 짤막한 글에서 이미 우리는 성선설, 무원죄설, 보편구원론(만인구원론), 인간숭배론, 인간신론, 종교혼합/다원주의, 크리스토 구속의 '불필요성' 등, 뉴에이지 사상의 핵심요소들을 한꺼번에 짚어낸다. 웨인 티즈데일은 '세계 속의 한 수사'(A Monk in the World)에서 멀튼이 선불교, 힌두 베덴타, 요가 텍스트 등을 한데 뭉뚱그린 '국제 초종교영성의 비저너리'로 소개했다.
▲멀튼에 관한 나우웬의 저서. 단 한번 만났지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책을 통해 그러했다. © 김삼
아무튼 나우웬은 멀튼의 책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멀튼의 수도원 처소를 직접 방문했으며, 여러 관련 도서와 칼럼을 썼다. 나우웬이 쓴 멀튼 관련 저서는 '멀튼과의 만남'(Encounters with Merton), ‘토마스 멀튼, 명상적 평론가’(Thomas Merton: Contemplative Critic. 1972년) 등이 대표적이다. 나우웬은 또 1971~81년, 예일대학교 신학원 부교수(1977년 정교수로 승진) 시절, 딴 주제와 함께 멀튼의 삶과 저작에 관해 집중강의한 바 있다.
나우웬이 멀튼을 얼마나 흠모했냐 하면, 현재 토론토대학교 세인트마이클대학의 존 켈리 도서관에 소장된 나우웬의 유품들중 멀튼에 관한 것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 1968년 멀튼의 장례식 때도 그가 조사를 했다.
멀튼의 생애를 훑어보면, 그는 1915년 프랑스 프라드에서 보헤미언 생활을 하던 뉴질랜드 출신 화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3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본래 무신론자였던 멀튼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즈음 카톨릭에 귀의한 그는 뉴욕 맨해튼 할렘에서 잠시 영어를 가르치다가 1941년 수사가 되기로 결심, 시토수도회(일명 트래피스트)의 수사로 캔자스주의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배 수사를 양성하는 한편, 시와 묵상, 사회비평 등을 책과 글로 써내어 명성을 떨친다. 그림도 잘 그리는 등 퍽 다재다능했다.
책으로 바깥 세상과 교류하면서 유명해진 그의 자전적 수기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 1948년)은 당대에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는 열렬한 도교, 불교, 힌두교 예찬론자로, 동양종교를 직접 피부로 알고 습득하려고 생애 마지막인 1968년 방콕에서 열린 불교-카톨릭 수사들의 에큐메니컬 모임에 참석했다가 호텔에서 감전사고로 죽었다. 수도생활에 묶여 지내던 그의 평생 소원은 아시아의 불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멀튼은 또 신비주의 페미니즘을 수녀들에게 강의한 적도 있다. 나우웬과 멀튼이 숭앙하던 노르위치의 율리아 등 수많은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기도 했다. 남성 중심이고 여성 사제를 엄격히 금하는 카톨릭에서 페미니즘이 논해지다니, 퍽 역설적이다.
나우웬의 ‘토마스 멀튼, 명상적 평론가’는 멀튼의 사상에 끼친 선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관찰했다. 또 명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의 효력에 관한 찬사로 점철돼있다. “멀튼은 수도원을, 하느님을 알기위해 자신을 정화하는 피난처로 볼뿐더러 영적 행동의 센터로 보고, 이 세상의 환멸에 도전하여 (그것을) 벗기는 곳으로 삼았다. 삶의 철저한 요구를 더 발견할수록 자신을 정화하는 삶은 덜 강조했다.”
멀튼의 말년의 책 ‘참선과 탐욕의 새들’(Zen and the Birds of Appetite)에선 기독교계 신비철학자 마이스터 에카르트와 일본의 선불교를 비교하면서 제2부 전체를 선승 다이세쯔 스즈키(일명 D.T.Suzuki)에 몽땅 할애하기도 했다. 그는 [0=무한]이란 등식에다 불교의 '공'(슈나타) 즉 비움과 동시에 크리스토의 사랑의 영으로 충만해 질 수 있다고 대입시켰다.
멀튼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수많은 여성들과 섹스를 즐겼고, 말년엔 한 수녀와 깊은 로맨스에 빠지기도 했다. 그녀와 단둘이 수도원 한 귀퉁이에서 장시간 키스를 하며 시간가는 줄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것이 그의 노년의 모습이었다. 나우웬이 평생 비공개적 동성애자였듯, 멀튼도 성적인 비밀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카톨릭을 빠져나와 정상적인 결혼을 했으면야 무슨 문제랴만.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놀라운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 '딴 세계의 루머'(In Rumors of Another World)에서 멀튼, 나우웬은 물론, 보편구원론자인 토머스 켈리, 루이스 스미즈, 떼이야르 드 샤르댕, 마담 귀용, 브레넌 매닝, 래리 크랩, 캐런 메인스 등의 글을 적극 추천한다.
얀시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것중 한가지가 멀튼의 글이다. 얀시가 프리랜서 편집자로 있는 크리스채니티투데이(이하 CT)의 탐색기에 'Merton'이라고 쳐보면, 약 90꼭지나 뜬다. 뭘 말해주는가? 얀시의 글을 읽어보면, 오히려 나우웬보다는 멀튼에게 더 영향을 받은 점을 느낄 수 있다. 얀시는 나우웬이나 멀튼이 이처럼 뉴에이지적임을 모르고 그들을 인용할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나우웬과 라벗 조나스
나우웬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추앙하고 답습하는 사람은 한국교회에 그를 소개해온 일부 신복음주의자들이나 그의 책을 수십권 읽은 독자가 아니라, 바로 나우웬에게서 직접 배우고 따르는 그의 제자인 카톨릭계 인사들이다. 이 점에서 독자들은 착각이나 오해가 없어야할 것이다. [나우웬이 말하는 '기독교'란 우선적으로 카톨릭이며, 나우웬에게 개신교는 카톨릭에 종속된 존재나 다름없다.]
현재 보스턴에 살고있는 저술가/영성상담가/음악가/수련지도자인 카톨릭 평신도 라벗 조나스(Robert A. Jonas) 박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우웬의 가장 친근한 벗이자 제자였던 조나스 만큼 나우웬을 깊이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한다. 나우웬에게 직접 배워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고, 나우웬의 헌신적인 도움과 자문을 받아 자신의 초종교 비영리재단 ‘빈종’(the Empty Bell)을 세운 사람이다. 나우웬 사후 최근까지 해마다 나우웬 굿(?)을 하다시피 추모해왔다.
예를 들면, 2년전인 2003년 1월18일, 뉴욕 맨해튼 121가 콜퍼스 크리스티 성당에서는 ‘토머스 멀튼과 헨리 나우웬 - 크리스토와 동양을 조망하며’(Thomas Merton and Henri Nouwen, Looking East with Christ) 란 영성수련강좌가 있었다. 자신이 디렉터로 있는 ‘빈종’과 자신이 이사로 있는 헨리나우웬소사이어티, 자신이 수시로 드나드는 성공회 단체 '루아'(RUAH. 루아는 히브리어로 '호흡', '영'의 의미) 영성계발센터 등과 공동 주관했다.
‘빈종’이 어떤 단체인지는 아래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것 말고도 조나스는 매년 나우웬 관련 모임을 가져왔다. 조나스는 위 모임에서 아시아의 (불교)영성과 토마스 멀튼 및 헨리 나우웬의 상호관계, 기독교의 성삼위일체와 불교의 트리카야와의 컨텍스트 속에서 멀튼-나우웬의 관계를 논했다.
조나스는 하버드 대학원 시절인 1982년, 신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나우웬을 처음 만났다. 나우웬은 80년대 중반에 하버드를 떠나 카나다 라르슈에서 생활하면서 90년대초 여기저기서 라르슈 강좌와 모금행사에 동행해줄 것을 조나스에게 부탁해, 조나스가 참여하면서 간혹 명상기도에 관한 강의와 함께 선피리 '샤쿠하치'도 불었다['수이젠'이라고도 불리는 선피리는 대나무로 만든 일본 전통 불교악기로 한국의 대금과 비슷하다]. 이를테면, 사이드킥과 도우미 겸 특송연주자였던 셈이다.
89년 즈음, 조나스는 이미 성공회, 카톨릭, 유니테리언을 상대로 명상기도를 이끌고있으면서 필요한 사람들에겐 돈을 받고 심리요법을 시술했다. 그 당시 트라피스트인 토머스 키팅 신부의 '명상 아웃리치'(CO), 존 메인을 승계한 프리먼의 '존 메인 크리스천 명상회' 등이 카톨릭권의 명상기도를 이끌었다. 또 메릴랜드 베데스다의 '샬렘 인스티튜트'가 같은 선분 위에서 신구교 간의 가교 역할도 했다.
위에서 비친대로, 조나스는 1993년 '빈종' 건립당시 나우웬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보스턴 인근의 '기독교적' 명상기도수련센터인 ‘빈종’(www.emptybell.org)은 입구에서 실내까지 온통 일본불교 냄새가 물씬 나는 기도처다. 최근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불교 혼합식 영성수련을 제공해왔다.
나우웬은 죽음을 얼마 앞둔 1995년 석달간 이곳에 머물며 '사랑의 내적 음성'(The Inner Voice of Love), '그 잔을 마실 수 있나?'(Can You Drink The Cup?), '여정을 위한 양식'(Bread for the Journey) 등 세 권의 책 초고를 썼다. 또 매일 이른아침 자기 방 또는 빈종에서, 주일날은 전체 멤버들과 함께 영성체를 나눴다.
나우웬의 죽음은 그런 조나스에게 엄청난 상실이었다. 멀튼과 나우웬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한 조나스는 나우웬 생시에 3권에 달하는 나우웬 저작집을 서문을 달아 편집했다. '사랑받는 자의 아름다움'(Beauty of the Beloved)도 조나스가 편집했다. 불교-기독교연구학회(SBCS) 회원인 그는 또 달라이라마와 함께 인도, 이탈리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등지에서 3회에 걸친 불교-기독교 수련회를 이끌었다.
조나스는 자신의 영성수련 비법으로, 매일 카톨릭 명상기도에다 샤쿠하치의 소리를 접목시켜 ‘경건’을 쌓고있다. 불교, 카톨릭, 세속음악계 등에서 많은 연주회를 하고있다. 불교명상 음악을 녹음한 그의 연주음반(CD) ‘죽금 불기’(Blowing Bamboo)가 나와있고 가장 최신 음반은 ‘폐허로부터의 새 생명-선불교, 켈틱 성가와 명상’이다. 전형적인 뉴에이지 음악이라 하겠다. 위 수련회 당시에도 대피리 연주를 비롯한 동서양 음악과 함께 각종 프레즌테이션, 묵념(명상), 대화가 곁들여졌다.
조나스는 또 불교-기독교연구학회 회원이며, ‘광야협회’와 함께 광야지역 보호에 힘써온 신앙인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환경단체 ‘프로젝트 노아’의 공동설립자다. 최근까지도 그는 기독교-불교 교류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또 '잔잔한 물가로-유대교, 기독교와 부다의 길'(Jews, Christians, and the Way of the Buddha)이란 책의 불교 항을 맡아 썼다. 이 책은 유대교와 카톨릭교, 티벳불교, 선불교 등 다양한 종교의 명상을 통한 합일을 추구하는 내용이다.
조나스의 생애도 나우웬 연구에 상당한 참조가 된다. 그는 본래 감리교인으로 유아세례를 받고, 루터교인으로 자라 루터교 목사가 되려고 루터교대학 장학금까지 받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종교에 환멸을 느껴 다트머스대학으로 옮겨 정치학을 전공한다. 재학당시 단 밀러 사범에게 태권도와 함께 도교식 명상훈련도 받는다. 그는 이 정신집중을 통해 "즉시 종교적, 영적 경험으로 빨려들어갔다"고 술회했고, 선불교에 몰입했던 전 성공회사제 앨런 와츠의 책을 통해 "도교가 기독교보다 낫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후 자신도 도시와 농촌에서 태권도와 정신집중을 가르치고 도교식 명상을 하면서 토머스 멀튼의 책('선과 탐욕의 새들', '장자의 도', '신비주의자들과 선불도사', '아시안 저널' 등)과 일본의 D.T. 스즈키의 '신비주의-기독교와 불교'(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t) 등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또 유기농산물 농장을 운영하다 카톨릭 카르멜회 수사들을 만나 16세기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요한'(사도 요한이 아닌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을 알게되자 카톨릭으로 개종해 매일 침묵기도와 수련 등을 하는 3종 평신도 카르멜 회원이 된다.
1980년대초 이혼을 한 그는 성공회 교인인 둘째 아내 마거릿을 만나면서 카톨릭에 회의를 느껴 성공회인이 된다. 마거릿은 곧 성공회 사제가 됐다. 1983년엔 마거릿에게서 생일선물로 9주동안 비파사나 명상수련을 밟은 뒤 5년간 불교명상과 침묵수련, 좌선, 티벳불교 등에 몰입한다.
하버드대에서 교육학과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난 뒤 그는 예수회 웨스튼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명상영성과 함께 명상심리학을 연구한다. 그 역시 나우웬처럼 심리학자이면서 심리요법사이기도 하다. 조나스는 카톨릭이자 독실한 불교신자로 자처한다. 조나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나우웬 말고도 멀튼과 존 에크하르트, 일본 선(zen) 피리 스승이 있다.
나우웬은 조나스에게 다양한 가르침과 함께 고대 사막교부들, 중세 수사들의 신비영성과 관련된 명상기도와 아울러 라르슈 공동체도 소개했다. 그때부터 조나스는 라르슈의 중요한 후원자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빈종'은 표면상 ‘기독교(카톨릭) 명상센터’이지만, 선불교가 혼합된 카톨릭식 절이다.
내부 장식 자체에 불교적 요소가 농후하며 청중은 좌선을 위한 가위다리로 앉아야 한다. '텅빈 울림'이란 뜻의 빈 종(기레이)이란 이름은 일본 선불교 음악에서 따온 것으로 동시에 불교의 마음 비움, 공허한 심령을 상징한다. 조나스의 ‘빈종’ 건립 때, 나우웬이 곁에서 적극 도왔다. 빈종 입주 행사 때 나우웬이 축사를 했음은 물론이다.
조나스의 삶을 바꾼 사건은 나우웬과의 만남 외에도 조산한 어린 딸 레베카의 죽음 사건이다. 깊이 절망하던 그가 찾은 한가닥 '빛'은 그를 만나러 "찾아온" 중세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의 환상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그에게 애도와 영성, 이별과 사랑, 하느님에 관해 영적인 대화로 조언을 해줬다. 이것은 성인 또는 망자와의 교제를 믿는 카톨릭신앙에 의거한 것으로 사실상 망자와의 대화를 금지한 성경상으로 보면, 에크하르트가 아닌 악령의 일종에 틀림없다.
‘러베카, 한 아버지의 슬픔에서 감사로의 여정’ Rebecca: A Father's Journey from Grief to Gratitude (NY: Crossroad, 1996)이란 책이 그래서 나왔다. 이 책의 서문도 써준 나우웬은 짤막한 서평에서 "..이것은 병원에 관한 책이면서 우주에 관한 책이다. 인간에 관한 책이면서 아울러 신적 존재에 관한 책이다"라고 했다.
조나스는 나우웬이나 멀튼, 기타 관련인사들처럼 에크하르트 외에도 고대의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안, 노르위치의 율리안, 빙겐의 힐데가르드, 아빌라의 테레사 등 신비주의 수사들의 명상기도를 본받았다. 조나스는 하버드 채플, 진보주의 신학교인 앤도버, 성공회, 불교연구센터 등에서 수시로 강의를 해왔다.
이처럼 조나스는 끝없이 복잡하고 잡다한 종교와 명상에 몰두하면서 뉴에이지의 길을 걸어갔고, 나우웬도 대동소이한 그의 친구였다. 나우웬, 멀튼과 조나스 등의 공통점은 모두 유럽 출신이며 모두 심리학자라는 것이다.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뉴에이지에 깊이 접속돼 있다.
명상기도-뉴에이지로 가는 길목
나우웬의 필생의 과제 한가지는 "두려운 맘, 자비를 향한 외침, 희망의 빛 줄기, 영적 권능, 세계의 요구를 드러내는 기도"의 힘이었다. 그는 영혼의 빛을 곧 어둠(고독과 묵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에게서 빛과 어둠의 구분이 쉽지 않다. 그가 영성을 갈구하면서 뉴욕주 제네시 계곡의 트래피스트 수도원을 두번 방문해 쓴 그의 '제네시 일기'(he Genesee Diary)를 보면, 그곳의 매일 경험과 수도원적 묵상에 관해 썼다.
5년후 두번째 방문시엔 매일 명상기도에 집중한다. 이 기도를 통해 그는 내적인 카오스와 싸우면서 마음 한구석 "하느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 애썼다. 문제는 그의 명상기도를 통한 '신'의 내재가, 거듭난 참 신 자라면 누구나 매순간 체험하는 성령의 내재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의 기도는 곧 멀튼 식 기도였다.
뉴에이지서 기독교로 개종한 레이 영겐은 고대 광야 수도사들과 선불교식 만트라를 합성한 멀튼-나우웬 식 명상기도(contemplative prayer)가 뉴에이지 식 집중기도(centering prayer)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폭로했다. 미국 최대의 뉴에이지 전인교육센터인 오메가인스티튜의 조운 던컨 올리버의 ‘명상적 삶’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 성요한, 노르위치의 율리안과 함께 멀튼과 나우웬, 토마스 키팅 등을 선구자로 꼽고있다.
멀튼은 러시아정교회, 퀘이커의 일파인 셰이커, 선불교 등의 명상기도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썼다. "이 모든 연구는 하나의 핵심 관심사로 통일돼있다. 즉 서로 다른 전통의 사람들이,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최고경지로 이끌어주는 '길'의 의미와 방법을 배태시킨 다양한 전통의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나우웬, 멀튼, 조나스, 라르슈공동체의 설립자 장 바니르 등은 모두 '명상기도' 운동을 적극 지지하거나 스스로 즐긴 사람들이다. 명상기도의 지도자로는 멀튼과 나우웬 외에도 이블린 언더힐, 로즈메리 루터, 토마스 키팅, 리처드 로어, 조스 홉데이, 비드 그리피스, 데이빗 스텐들-래스트 등이 있다. 개신교계에서 명상기도 보급에 앞장선 사람들이 리처드 포스터, 필립 얀시, 유진 피터슨 등이다.
현재 카톨릭 중심으로 전세계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급속도로 보급되고있는 명상기도 운동은 뉴에이지 영성과 직결된, 지극히 위험한 활동이다. 명상기도는 'meditation'이라고도 불리지만, 성경의 묵상과 혼동해선 절대로 안된다[이 차이에 관해서는 나중 상술한다]. 명상기도에 일단 빠져들면, 자칫 헤어나지 못할 악령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로렌스 프리먼 신부와 명상기도
카톨릭-뉴에이지 식 명상기도의 세계적 확산은 심각한 문제이므로 여기 상론한다. 현재 명상기도운동의 세계 지도자는 런던에 있는 세계크리스천명상커뮤니티(WCCM)의 디렉터인 로렌스 프리먼(Lawrence Freeman) 신부다.
베네딕트수도회 지도사제로, 런던 코크포스터 소재 올리베탄 베네딕트 회중 소속 크라이스트 더 킹 수도원의 수사인 프리먼은 20세기 명상기도운동의 선구자인 존 메인(John Main) 신부의 제자다. 메인을 도와 1975년 WCCM의 전신인 크리스천 명상센터를 런던에 개설했고 1982년 메인의 사후 계속 이 운동에 앞장서왔다. 메인은 생시에 토마스 멀튼의 수도원을 찾아와 명상기도 세미나를 공동 주최했고, 이것은 멀튼에게 나름의 큰 영향을 미쳤다. 프리먼은 옥스퍼드 출신이다.
▲개신교에도 폭넓게 번지고있는 좌선식 묵상기도. 뉴에이지와의 구분이 명확치 않다. © 김삼
WCCM은 매년 정기적으로 존 메인 세미나와 몬테 올리베토 수련회를 런던과 세계 각처에서 개최한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50개국에 27개 명상센터와 천여개의 명상그룹을 두고있다. 프리먼은 일년내내 전세계를 두루 다닐 정도로 이 운동에 미쳐있고 매우 활동적이다.
올해 2월에도 인도에서 순례중이다. 방문대상지는 존 메인에게 말레이지역 명상을 가르친 라마크리시나의 수도승 스와미 사트야난다의 다르키네스와라 신전, 힌두교 여신 칼리의 사원인 칼리가트, 칼리신전, 캘커타 마더 테레사의 집과 에이즈환자를 돌보는 테레사의 크리파 사회복지재단, 힌두교 사제 스리 라마나 마하르시가 세운 티루바나물라이의 라마나슈람 등 주요 명상기도처들. 이런 것이 위대한 영성으로 가는 길이라니, 사뭇 엽기적이다.
프리먼이 세계 각곳에서 주관하는 기도모임에 꼭 따라붙는 것이 요가 교습이다. 힌두교, 불교계와 끊임없는 대화와 교제를 나눠온 그는 급기야 티베트불교 지도자 달라이라마와 만나 '평화의 길' 대화모임을 갖기도 했다.
프리먼은 "명상은 모든 위대한 종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전통"이라며 "그것은 초종교 대화에 중요한 공통분모와 세계평화의 바탕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즉 그가 명상기도를 이끄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세계종교의 단일화에 있다. 지금까지 프리먼의 모임 초청연사들중엔 달라이라마 말고도 라르슈 설립자 장 바니르도 있다.
프리먼의 스승 메인은 소위 '만트라(Mantra) 기도'를 보급해 카톨릭을 비롯한 교계에 폭넓게 보급돼왔다. 만트라 기도는 짧은 한 두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형태로, 메인이 가장 추천하는 문구는 아람어 '마라나타'이다. 요한계시록과 파울 서신 등에 나타나는 마라나타는 "주여, 어서 오소서"란 뜻을 갖고 있지만, 만트라기도에서는 뜻이 중시되지 않고 단순한 반복이 중시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셨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나우웬도 그의 책 '심령의 길'(The Way Of Heart)에서 만트라 기도를 적극 권장한다. "외마디 낱말의 조용한 반복은 우리가 정신과 함께 심령으로 내려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심플한 기도방법은 능동적인 존재인 하느님께로 우리를 열어준다." 그러나 만트라 기도는 힌두교에서 왔지,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다. 셜리 뒤불레이는 그런 그를 가리켜 "거룩한 삶은 한편 설교보다 낫다"는 초기 수사의 말의 구현으로 봤다.
메인은 고대 사막수사, 수녀들,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명상기도를 힌두교, 불교의 명상기도와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사람이다. 이와 같은 메인의 영향을 받은 카톨릭이 매우 많다. 심지어 카톨릭 사제가 아예 인도와 스리랑카 등 현지에서 힌두교와 불교 도사인 요기, 구루, 스리, 스와미 등이 되어 아슐람(암자)을 차려놓고 명소로 이름을 떨치는 예도 적지 않다. 비드 그리피스(Bede Griffths)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피스 역시, 프리먼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영국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출신인 그리피스는 베네딕트 수사 겸 학자가 되어 런던에서 20년을 지낸 훗날, 인도 남부 타밀나두 정글지역에서 명상적, 과학적 생활을 하면서 샨티바남에 카톨릭식 암자를 차려놨다. 이곳은 '세계종교 단합의 센터' 역할을 하고있다는 카톨릭계의 중평이다. 카톨릭 명상기도자들은 인도나 스리랑카 등에 가면, 반드시 이런 카톨릭-힌두도사 암자를 방문하는 것이 순례코스로 지정돼있다.
이 샨티바남 공동체의 공동설립자가 바로 존 메인의 첫 스승인, 프랑스계 우파니샤드 사제 앙리 르소 신부(스와미 아비식타난다)였다. 르소는 힌두 우파니샤드와 기독교의 합일을 추구했다. 그는 기독교 삶은 늘 명상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책 '사치다난다'도 그런 맥락에서 쓰여졌다.
그리피스는 그의 책 '동서의 결혼'(The Marriage of East and West)에서 동양종교는 여성적, 서양종교는 남성적이라며 기독교가이제는 동서의 '결혼' 곧 합일을 다시 추구할 때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힌두교 고전 '바가바드 기타'를 온정이 넘치는 "온 인류의 영적자산의 일부"라며 이를 카톨릭을 위해 해설한 '바가바드 기타-기독교적 주해서'(A Christian Commentary on the Bhagavad Gita)를 썼다.
1991년 미국 인디애나주 뉴하머니에서 열린 존 메인 세미나에서 그리피스는 '크리스토 안의 새 피조물'이란 주제의 강연을 통해 메인을 '현 교계의 가장 중요한 영적 가이드'로 지칭했다. 자신의 책 '실재의 새 비전'(A New Vision of Reality)을 간추려 강의한 그는 '환생', '종교일치의 길', '초월명상' 등 전형적인 뉴에이지와 페미니즘에 관한 얘기들을 했다. 1993년 86세를 일기로 죽기까지 그리피스는 '산야시'(힌두교 성자)로 추앙받으며 살았다.
성경의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읊으며 음미하는 것으로, 뉴에이지적인 명상기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뉴에이지는 명상을 통해 '텅빈 마음'을 추구하지만, 기독교는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채운다. 물론 기독교에도 침묵기도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침묵은 성령 안에서 크리스토를 묵상함이지, 자신의 신격화를 추구하는 침묵이 아니다.
나우웬의 영성신학은 실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최고의 영성'으로서 우리가 본받을 모범이 못된다. 진정한 영성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기초해야 하며 성령에 좌우돼야 한다.
뉴스파워
김삼
'신세계운동 > 신세계정부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펌]<성령운동/긍정의 힘> 그 위험한 정체! (0) | 2007.08.18 |
---|---|
토마스 주남-천국은 확실히 있다 (0) | 2007.08.12 |
'익명 기독교'? 천주교 식 포용주의의 정체 (0) | 2007.08.06 |
� 워런이 세상을 구해낼까? (0) | 2007.08.05 |
통일교도 결국 로만카톨릭에서 나온거??? (0) | 2007.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