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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기 도 원 연 구

왜곡된 기도원 운동이 교회를 병들게 한다


기도원 운동은 한국교회의 독특한 현상으로 세계교회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것은 개인이 산에 움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소박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8.15 해방 이후 오늘날과 같이 건물을 짓고 조직적으로 기도원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용문산 기도원 운동과 성령운동을 통하여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는 집단적인 신앙생활보다 개인적으로 종교적 욕구를 해결하려는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 △사회적으로는 일제의 강점기ㆍ6.25전쟁ㆍ산업화 과정에서 억압당하는 가난한 민중의 불안 심리, △ 교회적으로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의 상실과 기존교회의 세속화, △성령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성령운동의 영향 때문이었다.

기도원 운동은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헌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ㆍ육체적 질병을 치유 받고 절망과 좌절에서 희망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했으며,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를 했다.

그러나 기도원 운동은 그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본회퍼의 말처럼 사람들의 약점을 노리는 ‘값싼 은총’의 선포이다. 기도원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교회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갈급한 상태에 있다. 기도원의 설교와 간증은 이러한 인간의 불안 심리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단편적으로 인용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부름에 ‘따름과 복종’이 없는 값싼 은총의 선포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자판기의 하나님’으로 만들었으며, 복음을 질병의 치유 수단ㆍ모든 문제의 해답서ㆍ물질 축복의 증빙서로 변질시켰다. 그 결과 기도원 운동은 △사회적 책임성을 상실한 탈 역사적인 신앙,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열광주의적인 신앙과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물질적인 기복신앙을 조장했다.

또한 기도원 운동은 상업화되어 초기의 수도원적인 이상과 기도처로서의 본래의 사명을 상실했다. 기도원은 대부분 원장의 개인적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기도원을 운영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게 되었고 기도원이 대형화되면서 방대한 조직과 인원과 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온갖 편법을 동원해 더욱 헌금을 강요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도원이 기생하게 되었다.

상업화된 기도원은 ‘헌금을 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 ’는 강압적인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을 보증하는 다양한 간증을 이용하며 심지어 축복을 받는 수단으로 물품구매(설교테이프, 신앙서적, 심지어 화장품까지!)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장사꾼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서 더욱 대형화된 기도원은 많은 재산을 축적해 착복하거나 사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있어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마치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을 연상하게 하며(요2:13-22) 중세 수도원의 타락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나 안타깝다.

끝으로 기도원 운동은 올바른 신학 훈련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성령의 은사를 강요해 그리스도인을 은사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게 했다. 지나친 은사의 강조는 인위적인 성령체험과 신비적 종교체험(특히 환상과 계시)을 강요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인용하며 또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열등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성령의 은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예. 행8:18-20).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의 약점을 파고들어 예언기도로 금전을 챙기는 그리스도교 선무당들의 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는 건전한 성령운동을 변질시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래 신비적이지만 역사성을 상실한 신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며, 은사를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는 사회윤리를 상실해 불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든다. 성령의 은사는 신앙생활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강요해 받을 수 있는 어떤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또한 영적 능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선천적 재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용될 때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야” 한다(마10:8).

이러한 기도원 운동에 대한 비판은, 물론 건전한 기도원 운동을 염두에 둔 비난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기도원 운동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건전한 기도원 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충정어린 충고다. 기도원 운동의 타락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잘못 인도해 교회를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개인의 신앙과 영성을 강조하는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영적 능력을 상실한 목회자와 제도적 교회에 실망한 그리스도인이 더욱 많이 기도원을 찾을 것이다. 기도원이 온전한 복음 선포를 통하여 탈 역사적인 신비주의와 열광적인 은사주의를 극복하고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를 청산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서 참으로 영적인 쉼과 활력을 얻는 기도처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