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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신세계정부운동

예수 유일주의란 무엇인가?

부  록  9

예수 유일주의란 무엇인가?

 

*  이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출간한 「오순절 표적 부흥의 실체: 펜사콜라, 빈야드, 아주사 신드롬」를 옮긴 것입니다. 성도님의 유익을 위하여 여기에 올린 것이니 무단 복제를 하지 마시기 바라며,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판사와 책 이름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예수유일주의 교리란 한 마디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아버지도 예수님이요, 성령님도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 즉 기도, 침례, 찬양 등을 다 예수님과 연결시켜 행해야만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이 이 교리를 지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오순절/은사주의 진영 교회에서 급속도로 이 교리를 수용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주로 은사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이단 교회들이 묘하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 빠진 이들이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한번 잘못된 길에 빠지면 연쇄반응에 의해 계속해서 더 큰 잘못에 빠지게 된다. 이 글은 미국의 슈너벨린(William J. Shnoebelen)이 작성한 조그만 보고서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부디 이 짧은 글이 성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탄은 옛날에 만들어 놓은 이단 교리를 다시 한번 더 써먹는다. "예수유일주의"(Jesus onl yism)라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이 독특한 교리는 주로 오순절 교회 특히 "연합 오순절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런 부류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일환으로 이 교리가 다시 등극한 것은 불과 75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 운동은 오순절 교단(가령 하나님의 성회 등과 같은)의 새로운 분파로 급속히 알려졌었고 교리적인 근거가 없는 관계로 오순절의 운동의 주류에서 거부를 당했으나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이상한 이 교리로 인해 수많은 성실한 영혼들이 삼킴을 당하고 있는데, 이 교리의 기초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이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즉, 한 하나님 안에 세 분의 구별된 인격체가 있음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그들도 삼위일체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첨가된 이교도적 개념(삼신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삼위일체를 한 존재의 세 가지 양상으로 설명한다(일명 양태론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2) 다음으로 이 교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이고 따라서 모든 믿는 이들은 이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만일 당신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나타난 식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면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구원받지 못한 잃어버린 자라는 것이다.

3) 2번과 연관하여 그들은 대개 침례중생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바꾸어 말해 물속에 들어가서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그들의 대부분은 구원받기 위해 실제적인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실로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을 믿음.

2. 물 침례

3.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그들의 별명이 여기서 나왔다.)

4. 다른 언어로 말하기(방언)

자. 이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단순한 복음(고전 15:1-5)과 매우 동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형태의 선행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믿음만을 말하는 신약 성경의 복음 말이다(엡 2:8-9). 예수유일주의가 주장하는 복음은 "행함이 없어도"라는 말 대신에 최소한 두 가지 "행위"를 포함한다: 1)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 2) 방언.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두 가지 사항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예수유일주의자들의 대부분은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침례 중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음에 의논을 할 것이고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세하게 토의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삼위일체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여기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를 통해 믿는 이들이 어떤 식으로 성경에 접근해야 하며 또 예수유일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교리는 결코 새로운 교리가 아니다. 사실 오늘날의 많은 이단들(몰몬교, 여호와 증인 등)은 이미 신약시대 초기의 사도 시대에도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인 예수유일주의 교리는 프락시아스(Praxeas, 주후 190년경)라는 사람이 선구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락시아스는 이상한 교리의 바람에 흔들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소위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점은 사실 우리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실로 어려운 교리를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실 수 있을까? 또 세 개의 '신들(gods)'이 아니면서 어떻게 아버지와 성령님을 구분할 수 있을까?") 또한 그는 당시 다른 이단들, 가령 영지주의(Gnosticism)나 양자론(Adoptianism: 養子論: 예수는 본래 보통 인간이었으나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는 주장)과 맞서 경건한 싸움을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프락시아스는 소위 양태론자(Modalist)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태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유일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 주는 신학적 용어이다. 양태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Father)를 완전히 드러내셨을(the perfect revelation of the Father)뿐 아니라 실제 아버지 자신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세 가지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 양식, 아들 양식, 성령님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평상시에는 액체 상태의 물로 존재하지만 어떤 조건에서는 고체상태의 얼음으로 또 어떤 때에는 기체상태의 수증기로 존재한다. 즉, 물이라는 같은 본질이 때에 따라 세 가지 다른 양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국내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말게 모르게 이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으나, 이것은 엄연한 이단적 교리이다.)

프락시아스 이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교사가 등장했다(주후 198년경). 그는 이 교리를 더 다듬어 예수유일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격(Godhead)의 견고한 연합을 가르쳤다. 사벨리우스는 그 신격이 "한 인격, 세 이름"이라고 했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한 인격체가 세 가지 계시의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존재하셨다. 그분이 자신을 땅에 계시하고자 하셨을 때는 자신을 예수, 곧 아들로 드러내셨다. 이제 그 아들(the Son)이 하늘에 올라가 계신고로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님으로 계시하신다. 이런 것이 그가 주장한 양태론의 골자이다.

이와 같이 양태론자(혹은 예수유일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세가지 "모자"를 갖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라는 모자를 쓰셨다. 그리고 오늘날 그분은 "성령님"이라는 모자를 쓰고 계신다. 이는 사실 매우 미묘한 차이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믿고 있는데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대해 충분히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실수로 이런 가르침을 믿고 있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모두 신학자나 교회사가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러한 교리적 궤변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신의 영적 성장에 중요한 사항입니다. 이는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통해 당신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더 잘 알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오류로서, 양태론을 믿기 때문에 예수유일론자들이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단성은 그들 외에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a) 우리는 거짓 신을 경배하고 있고, (b)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지 않았으며, (c) 방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만이 참 교회이다"라는 식을 그들의 주장은 일반적인 이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교리는 심각한 신학상의 위험 요소를 동반하는 데 이 교리가 위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예수님을 기껏 한 사람의 연기자 정도로 본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2)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실 때 갈보리에서 일어난 일을 공격한다.

3) 그들은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를 위해 제사장 직분과 중보자의 직분을 행하고 게심에 대해 문제를 일으킨다.

자, 그럼 이제부터 앞에 제기된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과연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는가?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다른 인격체임을 보여 주는 구절을 여러 번 접할 수 있다. 즉,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과 행동에 있어 성경이 두 인격체를 별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여리고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내려앉으시는 것을 보시더니, 또한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 3:16,1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격(Godhead)을 구성하는 세 구성원이 공간적으로 구별되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물 속에 있고 비둘기는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고 아버지의 음성은 하늘로부터 울려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서로 다른 세 인격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아니라면 왜 이 사건이 일어났겠으며 사복음서 기자들이 이것을 기록했겠는가? 명백히 아버지는 아들 하나님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위에는 성령님이 계신다. 그저 예수님이 요한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복화술사처럼 소리를 내신 것일까? 물론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지만 왜 굳이 그분이 그런 교묘한 속임수를 써야 하겠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또 보라 그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요 17:5)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성령님이 나타나지 않으신 것을 제외하면). 예수님은 앞에서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음성을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속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을 하시겠는가? 이 수수께끼에는 두 가지 답만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말을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인격체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 구절은 어떤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말씀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가? 만일 이 두 분이 동일한 하나의 인격이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정신병동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분명코 예수님(혹은 하나님)은 정신 분열증 환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및 아들이 그분을 계시하실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11:27)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넘긴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인격체라면 우스꽝스럽고도 엉뚱한 일이지 않겠는가?(마치 소포를 자기 이름 앞으로 부치는 사람과 같다) 누가 봐도 여기서 아버지는 다른 어떤 곳에 계시며 예수님과는 전적으로 다른 인격체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논리적으로 따질 때 예수님이 이미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것을 모두 가지고 계셨다고 얘기가 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계시한 이는 혈과 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혈과 육을 가진 모든 존재와 아버지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도 이에 포함된다.). 이 구절은 현재 시제인데 결국 아버지께서는 그 순간 하늘에 계시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베드로에게 나타내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같은 시간에 두 곳에 존재하실 수 있다(즉, 하늘에 그리고 거기 베드로 앞에).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속임수를 써서 베드로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실로 내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내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자, 여기 확실한 구절이 나왔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엄격히 구분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에게 구한 혜택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아버지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다른 인격체가 아니라면 누가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거짓말쟁이나 "다중 인격 장애" 증상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여기서도 분명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로되,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분이시라."(요 8:54)

예수님이 곧 아버지라면 그분은 지금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예수님이 그 정도로 지혜가 없는 분인가?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 다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를 사랑하였다면 내가 아버지께 간다 함으로 인해 기뻐하였으니라. 이는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이 구절은 참으로 예수유일주의자들을 난처하게 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만일 둘이 한 인격이라면 어떻게 아버지가 예수님보다 크실 수 있겠는가? 이는 곧 "2 = 1" 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그들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both me and my Father)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느니라"(요 15:24)

"both(둘 다)"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라. 일반적인 영어 표현에서 "both"는 오로지 두 가지 항목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거짓말 하셨던가, 아니면 삼위일체가 성경적이던가 둘 중 하나 뿐이다. 이외에도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구절들이 수없이 많다(마 24:36; 26:39,42,53; 눅 10:22; 22:29; 요 8:28,49; 10:29; 14:12, 20-21; 20:17,21). 적어도 23개의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소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신을 아버지와 독립된 별개의 존재로 묘사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부터 모든 일들이 확정됨을 기억하자(고후 13:1).

문제 구절

이상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유일주의자들은 그와 반대를 가르치는 듯한 몇몇 구절들을 들어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하려 든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24개의 구절에 반대되는 듯한 구절은 3개뿐이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이 구절들을 공정하게 살펴보자.

"이에 그들이 말하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Ye neither know me, nor my Father).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시더라."(요 8:19)

우선 주님께서는 "nor"라는 접속사를 쓰심으로 그분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구분을 두셨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두 분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한 이 구절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가 두 분의 인격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 법(늘 그래야 하듯)이므로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에 대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신 후,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히 1:3)

자, 처음에 나오는 "his(하나님의)"는 아버지를 나타낸다. 또 "Who"는 예수님이다(1,2절을 보라). 3절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라 말하고 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거울이 우리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나타내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인격과 그 영광의 형상 혹은 그 정확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형상이 곧 실제적으로 그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반영이 곧 나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내가 비춰진 모습(나의 반영)을 보았다면 당신은 실제 나를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성경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른 바 "최초 언급의 법칙"(the Law of First)에 따라 "형상(image)"이라는 단어가 처음 성경에 쓰인 예를 찾아보아도 이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모든 땅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니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창 1:26,27)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것인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 하나님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 구절은 단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신의 성품의 영적인 요소들을 부여하셨다(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삼위적인 성향)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극소수의 몰몬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아담이 하나님이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 사실이 예수유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은 분명하다. 이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자신과 아버지가 구분되지 않는 같은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아버지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라는 단어의 정의

또 하나, 좀 더 문제가 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10장 30절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예수유일 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그 중심 단어인 "하나(one)"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보자. 성경이 처음으로 이 "하나(one)"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서로 다른 인격간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그것은 중요한 구절 가운데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 2:24)

이 구절이 남자와 그의 아내를 "하나의 육체"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이 구절이 남녀가 어떤 형태로든 하나로 한 몸이 되어 분간할 수 없는 유기적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신비스런 방법으로 비록 각자의 독특한 인격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간의 성적 행위를 통해 그들이 육체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최초 언급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진정 의도하셨던 바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즉, 관계성). 어디 구석진 데서 성결 구절 하나를 뽑아놓고 거기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교리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바른 성경해석이 아니다. 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두 세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고후 13:1).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언급하신 예수님은 앞의 제시된 성경해석을 뒷받침해주는 풍부한 성경적 전통 위에서 그 말씀을 하셨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해 논박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거룩한 계시의 가장 첫 부분에서 발견되는 사실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은 세분 안에 하나로 하나 안에 세분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하나, one "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에카드, ECHAD"(스트롱 성구 사전 259번)이다. 이는 "하나(one)" 혹은 "연합된(united)"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동일한 히브리 단어가 지난 수세기 동안 히브리인들의 가장 큰 믿음의 고백으로 자리잡은 구절안에도 들어있다. 신명기 6장 4절을 보기 바란다"들으라,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님(one LORD)이시니..."

여기의 "하나(one)"라는 단어가 바로 "ECHAD"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자신을 하나의 복합적 연합체(a compound unity)로 즉 "연합된(united) 존재"로 계시하셨음을 의미한다(아담과 이브가 하나의 육체였던 것처럼).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이 단어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민수기 13장 23절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에스골 시내에 이르러, 거기에서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잘라 두 사람이 막대기에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가져오니라."

포도 한 송이를 나타낼 때 쓰인 단어가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ECHAD"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결코 그분은 누구를 혼동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옛부터 있었던 유다인들의 언어적 전통을 따라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것은 결코 자신과 아버지가 동일하다(identical)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아담과 이브가 한 육체였듯이 아버지와 자신이 "ECHAD"(연합체의 한 부분)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유일주의자들이 자기네들의 거짓 교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마 28:19)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유일주의자들은 이 한 구절을 가지고 두 가지 주장을 펼친다. 일단 그들은 이 말씀이 타당한 침례 방식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구절을 자기들의 교리를 지지해 주는 본문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여기 나오는 "이름(name)"이 단수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이 바로 "예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별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건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성령님이 "예수"라고 불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예수"라고 명명된 곳도 없다. 이 한 구절 때문에 그와 같은 교리가 성립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음

사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나오는 "이름(name)"은 하나님의 신격(Godhead)의 세 인격체를 총괄하는 이름(YHVH - 여호와 :Jehovah)이다. 이 이름은 영어 성경에서 주로 "주(LORD)"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주(LORD)"라는 단어는 그분의 이름에 불필요한 반복을 피하기 위해 유다인 랍비들이 대체시킨 이름이다.

성경에서 아버지가 "주(LORD)"로 불려진 예는 수없이 많다. 여기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 역시 여러 번 "주(Lord)"로 불리셨다(마 17:4; 막 10:51: 눅 5:8,12; 7:6; 23:42; 요 8:11 등). 성령님도 빈도는 덜하지만 역시 주(Lord)로 불리셨다(사40:13; 겔 11:5; 눅 4:18; 고후 3:17 등). 따라서 성경적으로 앞에 언급된 그 "이름"이 여호와(Jehovah)라고 보는데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나 성령님을 "예수"라고 일컫는 데에는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소위 럭크맨주의자들로 알려진 과격파들은 아버지도 주요, 예수님도 주요, 성령님도 주이므로 결국 마태복음 28장 19절이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는 것이라고 자의적인 해석을 취하고 이로 인해 큰 진주를 발견한 것인양 의기양양해 한다. 과연 이 구절이 그런 가짜 진주를 지지해주는 구절인가?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구절이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로 되어 있지 '주의 이름으로'라고 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적혀 있는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주의 명령대로 따르는 사람이다.

이제 예수유일주의 교리의 다른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리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을 때 갈보리에서 일어난 사실을 교묘히 공격한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인격의 나타나심이라 가정한다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괴한 교리를 낳게된다.

1) 하나님의 전인격이 십자가상에서 죽었고 삼일 동안 죽은 채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는 그때 일종의 정신 쇠약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인격이라는 가정 하에서) 정상적인 상태의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이같이 외치셨다면 이는 다음 둘 중 하나를 뜻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셨거나(불가능한 일을 말했기 때문임. 민 23:19)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를 겪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이 또한 불경스런 추측이다).

첫 번째 반대에 대해 예수유일주의자들은 이같이 애써 답변할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로 되돌아 가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어떤 성경적 근거도 없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이같은 사실을 부인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을 들어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러나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 20:17)

이 구절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할 뿐 아니라 예수유일주의자들의 설명이 허구임을 드러낸다. 일요일 아침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가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유일주의 교리가 맞다면 하나님은 3일 동안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 우주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단 일초도 존재할 수 없다. 두 번째 제기된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그곳 갈보리에 하나님의 전 존재가 있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께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건 결코 바르지 못하다.

대제사장이 기도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가 다룰 세 번째 논제이다. 예수유일주의 교리에 따르다 보면, 현재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대제사장 직분과 중재자적 역할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께서 세 가지 직분(대언자, 제사장, 왕)을 가지고 계신다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그분은 분명히 대언자이셨다(마 21:11; 눅 13:33; 요 4:44) 이제 예수님은 하늘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신다(히 7:25; 2:17). 또한 재림 시에 예수님은 왕으로서 오실 것이다. 자,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보라!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께서 계시다 함이라. 그분께서 하늘들에서 존엄하신 분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성막의 봉사자라. 이 성막은 주님께서 치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들과 희생물들을 드리도록 임명되었나이, 이러므로 이 사람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느니라. 만일 그분께서 땅 위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터이니, 이는 율법에 따라 예물들을 드리는 제사장들이 따로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라. 모세가 성막을 만들려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받은 것과 같으니, 말씀하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에 따라 만들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재자이심이라." (히 8:1-6)

제사장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바로 중보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이를 위하여 갈라진 틈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겔 22:30). 이 중보는 실제 대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실행했던 바이며 동일하게 현재 하늘에서 예수님이 믿는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바이다. 논리적으로 정의를 내리자면 중보자는 두 사람(여기서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량이다. 즉, 제 3자인 것이다. 만일 예수유일주의 교리가 맞는다면 지금 하늘에는 오직 하나의 거룩한 인격체만이 존재할 뿐이다(성령님과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이 중보하실 수 있겠는가?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속죄함(atonement)이 이루어지겠는가? 우리 구원의 보증은 어떻게 되는가?(빌 1:6) 대부분의 예수유일주의자들이 죄를 범함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데 이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중보자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구원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가 우리에게 미친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는 감히 죄를 지을 수도 지어서도 안 된다(가장 사소한 부분 까지도). 만일 그랬다가는 우리는 다시금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될 것이다.(바로 이런 교리들이 국내에서도 지방 교회, 안식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에서 그대로 가르쳐지고 있다. 그래서 그 추종자들은 치리자들의 말에 100%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리에 빠진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연옥과 비슷한 교리를 가르치며, 제대로 믿지 못한 사람은 1000년 왕국 동안 다른 곳에서 불로 정화되어 단련을 받고 나중에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오 주 예수", "오 주 예수"를 외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현재 하늘에서 중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도 아버지도 온데 간데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성령님께서 위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리시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유일주의 교리의 무서운 부분이다. 그 교리는 예수님의 중보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앗아가며 사람의 얼굴을 하고 계신 하나님 즉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을 우리에게서 앗아가 버린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는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강탈하는 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이번에도 이 구절은 두 개의 분리된 인격을 말하고 있다. 둘 중 한 분은 자신의 신성을 벗고 종과 같이 되셨다. 그분의 낮아지심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으로 인하여 모든 이들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즉 여호와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여호와이셨다가 그 이후에 우주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분은 현재도 계시고 앞으로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예수유일주의 교리가 위험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중보자를 빼앗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 대신 우리 자신의 "죽은 행실"을 의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위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오순절 표적부흥의 실체」의 출처: http://www.inchristjesu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