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록 4
한국 목사님의 빈야드 체험 수기
* 이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출간한 「오순절 표적 부흥의 실체: 펜사콜라, 빈야드, 아주사 신드롬」를 옮긴 것입니다. 성도님의 유익을 위하여 여기에 올린 것이니 무단 복제를 하지 마시기 바라며,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판사와 책 이름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구미 흰돌 교회의 권경흠 목사님께서 직접 터론토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글이다. 목사님께서는 "교계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이런 현상을 추천하는 글을 쓰는 지도자들이 많은데, 과연 그들이 이런 현상을 직접 보고 그런 글을 쓰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목사님의 용기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낸다.
15년만의 해외 나들이라 기분이 즐겁다 못해 황홀했다. 일본 나리따 공항을 경유해서 날짜 변경선을 넘어 현지 시각 오후 4시경에야 우리는 터론토 국제공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주최측이 지정한 호텔에 짐을 풀고 일행은 기대 반 불신 반으로 조금은 흥분된 상태에서 첫날을 그렇게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나이아가라 폭포」관광을 나섰다. 목회의 모든 시름과 억눌림을 잊고 모두들 마냥 즐거워했다. 그러나 시중의 가격보다 배는 비싼 가격으로 식당 상점 등을 안내 받아 얄팍한 목사 주머니는 금새 빈털터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여기 저기 불평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행기편도 직항이 아니고 우회편을 이용해 불편했던 일이며, 토요일이면 또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하는 일 등 주최측이 잘못한 것인지 얄팍한 여행사 상술이 개입된 것인지 어쨌든 성령이니 능력이니 하는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로 묘한 불쾌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일행은 주최측이 마련한 세미나 (그들은 이 모임을 세미나라 불렀다) 장소에 모였다. 이미 그곳에는 주최측 멤버로 보이는 몇몇의 젊은 사람들이 방송시설과 악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세미나 장소에 책상이 없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책상 없는 의자가 참석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곧이어 찬양이 시작되었고, 기타, 하모니카, 키보드 등으로 무장한 젊은 사역자 (이들은 멤버를 사역자로 부름)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찬양곡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우리는 괴상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하모니카를 부는 청년이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때로는 껌을 씹어 가며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음색은 감미로웠지만 영 마음이 불편했다. 눈치를 채었는지 후에 책임자인 P목사는 그가 어두운 시절을 보내다가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이라는 납득이 안가는 말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기를 약 1시간, P목사가 등단하였고 간단한 인사가 있은 후 각자의 교회 연고지를 물었다. 호남, 영남, 강원, 미국, 캐나다.... 그리고 재등록한 사람까지 일일이 물었다. 48명 중 능력 받아 능력 목회를 하겠다는 목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개척한지 얼마 안된 목사, 개척하다 낙심하여 교회의 문을 닫고 쉬는 목사, 그리고 성도들에게 시달리는 목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빚을 내고, 신용카드로 현금을 마련하여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실패하면 빚 갚을 일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었다.
P목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의 말 중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 한마디가 들어 있었다. "빈야드에서는 빈야드의 찬양을 해야 합니다. 한얼산에서는 한얼산에 맞는 찬양을, 오산리에서는 오산리 성격에 맞는 찬양을 해야 성령을 받고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의 찬양을 해야 은혜를 받습니다."라는 열변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나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 찬양을 하여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치유가 가능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진다는 주장이었다. 성령도 찬양에 따라서 임재하시는가?
첫 강의는 스콧(Scott)이라는 젊은 청년이 맡았다. 소개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복음 사역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머리를 혼란시키는 일이 이 청년에게서 또 일어났다. 자신은 오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첫 시간의 강의를 하려 했으나 문에 들어오는 순간 성령께서 「겸손」을 강의하라고 하셔서 겸손을 강의해야겠다며 겸손에 대하여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깨달은 일이지만 그곳에서의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이름 아래 즉흥적이었다. 설교의 본문도 내용도 즉석에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것이 빈야드 예배였다. 그래서 그 세미나의 끝에 가서는 많은 목사들이 "이제는 설교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말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이유인즉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때그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괴상한 논리였다.
청년은 원고도 없이 즉흥적으로(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강의를 한시간 정도 했다. 그들의 강의(설교)는 특색 있는 것도 아니었고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도 없었다. 단지 평범한 논리의 전개였을 뿐이다. 세미나 강의치고는 너무나 허술했고 졸속 강의였다. 오후에도 마찬가지로 찬양 그리고 강의가 진행되었다. 오후에는 믿음에 대하여 강의하였지만 알맹이 없는 껍질의 강의가 평신도에 의하여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왜 이런 반복된 순서가 계속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세미나 일정 중 빈야드 교회에 집회가 없는 월요일 하루만을 제외하고는 매일 저녁 빈야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일정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빈야드 교회의 집회도 역시 호텔에서의 세미나와 다를 바 없었다. 비로소 나는 빈야드 능력집회가 천편일률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지금 소위 능력 세미나라는 것이 빈야드 교회 집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제2진과 함께 합류하게 되었다. 약 110명이 왔다고 했는데, 그들도 역시 어제는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했겠고, 바가지도 썼을 것이다. 개중에는 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선배도 있었고 후배들도 있었다. 같은 교단의 동역자들도 있었다. 광주의 어느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단체로 와 참석했다. 등에는 「H선교회」라고 새긴 유니폼까지 입고 등장했다. 신학생들도 있었고, 직장인도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어떻게 여기 왔느냐?"는 질문에 선교차원에서 왔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이제는 제법 규모가 큰 세미나 그룹으로 변모하였고 능력을 배우겠다는 우리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날 강의는 바세리(Vasarie)라는 여인이 인도를 했다. 그녀 역시 신학적인 토대가 없는 평범한 교인으로서 거룩한 권세, 성령의 권세에 대하여 논했는데 역시 원고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앞뒤도 맞지 않는 괴변 일색이었다. "P목사 저 양반은 강사도 즉흥적으로 청했나?"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의는 계속되었고, 시차에 못 이겨 잠자는 사람, 커피를 마시려고 일어나는 사람 등 조금 문란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상한 말이 그녀에게서 튀어 나왔다.
자신이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 소리를 거룩한 권세(성령의 권세)라고 믿게 되었고 감사를 했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 밑에 있던 청중들은 "아멘"하고 화답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하는 절규와 함께 내 머리는 어지럽게 흔들렸다. "으르렁거렸다. 그러면 사자가 아닌가? 사자라면 이리인데, 성경에서 이리라면 사탄으로 정의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목사들이 아멘을 해?"이제는 더 이상 듣고 싶은 생각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왕 왔으니 참석해야지."라는 마음에 인내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실망은 더 커져만 갔다. 사역하는 시간(강의가 끝나고 능력 받는 순서) 몇몇 목사와 어떤 기도원 원장은 바닥에 쭈그리거나 누워서 개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는 모습은 완연한 개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어느 성령이 점잖은 목사를 데려다가 개로 만든단 말인가? 목사를 개 흉내 내도록 하는 것이 과연 성령의 권세인가?
전 날 터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찬양이 있은 후 몇몇 사람들의 간증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여자의 간증이 있은 후 콧수염을 한 남자 한 사람이 등단하였다. 그는 괴상한 몸짓을 해 보였다. 마치 권투를 할 때 훅을 맞아 앞으로 꼬부라지는 몸짓이었는데, 몇 마디 이야기를 하다가는 꼬부라지고, 또 꼬부라지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계속적인 반복의 몸짓이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속칭 성령받은 사람의 몸짓은 하나 같이 똑같았다. 심지어 P목사까지 같았다. P목사는 이튿날도 똑같은 몸짓으로 일관했다. 그것도 멀쩡하다가 강단에 올라와 이야기만 하려 하면 그런 모습을 반복했다.
바로 그 모습이 그 순간 다시 재현된 것이었다. "주님! 목사를 개로 만들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며 나는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주일에는 빈야드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빈야드 물결이 한국에 소용돌이친다기에 무척이나 기대했는데 나는 역시 실망하고 말았다. 그곳에서도 지난 며칠 동안의 세미나 일정과 똑같은 것이 진행되었고, 혹시나 하는 나의 기대를 여지없이 짓밟았다.
이 예배에서도 기도는 없다. 대중기도도 없었고, 목사의 기도와 축도도 없었다. 죄의 고백과 사도신경의 고백도 없었다. 오직 빈야드 찬양, 광고 그리고 설교뿐이었다. 이 날의 광고는 지난달에 옆 건물을 매입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또 다음 달에는 다른 건물을 매입하겠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교회의 중간 자리는 빈야드 교회 교인들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 제3국인, 관람객 등이 상당수 자리를 잡았다. 역시 이 날 광고 시간에도 한국 목사들은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항상 설교 전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항상 한국인이 최우선이었고, 또 제일 많았다. 그들은 이미 한국 목사 3천명이 그곳을 다녀갔다고 자랑했다(P목사의 말). 그래서인지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인은 특별하게 소개되었고, 제일 많이 박수를 받았다. 어떤 목사들은 손을 흔들며 답례하기도 했다.
이 날의 다른 점이란 담임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는 것과 사역 시간에 본교회 교인들만 위해 안수했다는 것뿐이었다. 계속되는 강의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세미나 일정도 틀에 박힌 그대로였고, 그들의 강의 내용은 대부분 겸손과 믿음이었다. 심지어 빈야드 교회의 집회에서도 같은 내용이었고, 특히 겸손에 대한 강의는 다윗과 사울의 비교가 계속 반복되는 인상을 받았다.
빈야드의 예배는 형식이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 나름대로 형식이 갖추어져 있었고, 교회의 직분이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직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빈야드의 능력 세미나(빈야드 주일 예배도 마찬가지)는 항상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모두 일어나 빈야드 찬양을 약1시간 정도 부르는데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찬양이라고 했다. 이때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 배짱 가지고는 앉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찬양곡의 대부분은 생소한 것들이었고, 찬양을 하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고조되면 리더가 무엇인가 간절한 어조로 읊어 대기 시작했다(Narration) 전체적으로 무언가 거룩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인위적 노력이 엿보였다. 찬양이 끝나면 광고와 간증이 있었다. 이 때의 간증자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으며, 간증이 끝나면 항상 기도하여 쓰러지게 했다.
이어 설교가 진행되었는데 집회의 설교는 목사가 할 때도 있었으나 세미나 기간 중의 설교(강의)는 주로 평신도가 맡았다. 이 설교는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고, 이때마다 항상 자신의 경험담을 쏟아 놓았다. 빈야드 집회에서는 설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더 중요했다. 바로 그들이 말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교가 끝나면 빈야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역이 시작되었다. 사역이란 은사를 체험하는(?) 시간인데 속칭 능력 받는 시간이라고들 했다. 빈야드 교회에서는 희망자들을 나오라고 한 후 선을 그어 놓은 뒷자리로 (세미나 가간 중에는 앉았던 의자들을 좌우로 밀어 놓고 중앙에) 열을 지어 서게 했다. 그리고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손을 앞으로 내밀고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게 한다. 그러면 그 다음 능력자(사역자)가 와서 기도를 했다.
이들은 무조건 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넘어지지 않으면 30분이고, 40분이고 기도한다. 그래도 안되면 "믿음이 없다. 나무막대기 같다."며 비꼬고 지나간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때 능력자는 껌을 짝짝 씹으며 능력 준다고 손을 갖다 놓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넘어뜨리기 위한 기도의 방법도 거의 대동소이했다. 손을 얹고 주문을 외우듯 기도하고, 안 넘어지면 손가락을 모아 이마에 가져가고, 그것이 안되면 귀 뒷부분을 살며시 누른다. 이쯤 되면 거의 다 넘어지게 된다. 그래도 안 넘어지는 간 큰(?) 사람에게는 가슴에 손을 갖다 대기도 하고, 이 때 여자 사역자는 약 10센티 떨어져 흔들기도 한다. 마치 장풍을 일으키듯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무당(巫堂)이 강신(降神)한다고 까지 비꼬기도 했다. 최종적인 방법으로 두 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살며시 밟는데, 이것이 반복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넘어지게 된다.
세미나(빈야드 교회 집회)에서는 이렇게 반복하는 것을 사역이라고 한다. 이 행위를 반복하게 되면 능력을 받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만약 이 때에 넘어지지 않으면 의도적으로라도 넘어지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온다고 하는데 그래서 세미나 당시 좌파로 분류된 J목사가 넘어져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실패하고 돌아왔다.
어떤 목사는 넘어져 사지를 바르르 떨기도 했다. 특히 심하게 떠는 사람에게는 사역자가 손을 그에게 갖다 대고 "더욱 더, 더욱 더"(more more)라고 말하며 이것을 반복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지를 더 떨게 되는데, 마치 감전된 것 같은 모습이 연상되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도중에 어떤 목사는 종아리를 비비면 팔딱팔딱 뛰게 되었는데 한 사역자가 다가가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더욱 더, 더욱 더"(more more)를 반복하며 손을 갖다가 대었다. 그러자 그는 더 높이 빨리 뛰게 되었고, 둘레에 서 있던 사람들은 웃으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세미나가 며칠 째로 접어들면서 갖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찬양 시간에 알콜중독자처럼 손을 떠는 사람, 강의 도중에 바닥에 누워 잠자는 사람(평안의 수면), 사역 시간에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는 사람(거룩한 웃음), 억억거리는 사람들. 이제 우리는 "누가 비정상인가?"하는 의문까지 갖게 되었다. 성령을 운운하며 어떻게 이렇게 불경스러운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충동된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어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웃는 웃음을 "거룩한 웃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간증 도중에 또는 사역 도중에 웃기를 잘했다. 여기서는 그렇게 웃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거룩한 웃음"인데 누가 감히 그것을 비판하랴? 얼마 후에는 웃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나는 한 사람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왜 웃음이 나옵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삼아 "그냥 실없이 웃는 것은 미친놈이나 하는 짓 아니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령 받아서 웃는다면 무슨 화를 그리 내느냐?"고 반문했더니 슬며시 자리를 떴다.
그 때 후배인 J 목사가 지난봄에 전주 한일 신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현장에서 귀띔해 주었다. 이처럼 마구잡이로 웃는 사람에게 어떤 목사님이 다가가 "사기 치지마!"라고 말하며 뺨을 야무지게 때렸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래서 그 목사는 성령 받은 사람이 왜 화를 내느냐고 따지자, 그 장면을 목격한 주최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넘어지는 사람들을 면밀히 검토하며 물어 보았다. "넘어질 때 어떤 현상이 있었습니까? 넘어지고 난 다음은 어떠했습니까?" 이렇게 물으며, 나는 입신을 했다거나 혹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누워 있으면 편하다고만 했다. 그래서 "방에 가서 침대에 누우면 더 편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하긴 그래요. 등이 시려 혼났어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현상도 느끼지 않았다. 능력이 임하여 귀신을 쫓아내었다든지 혹은 병이 나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차츰 넘어지는 횟수가 더할수록 계속 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반복된 행위로 인하여 능력을 받는다니 안 넘어질 수가 있겠는가? 한마디로 고급 귀신론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행동이 거침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역의 시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그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능력도 사라지고, 웃음도 사라지고, 떠는 것도 사라졌다. 다시 짜증스러운 얼굴에 따지는 사람들이 나타나 항의하기가 일쑤였다.
그들의 열매는 간증 시간에 잘 나타난다. 언젠가는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의 S목사가 간증을 했다. 자신이 이 능력을 받아 교회에서 사역하였는데, 교회의 반응은 의외로 나타났다고 한다. 찬성파와 반대파. 결국 반대파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교회가 갈라지는 비극이 생겨서 목사가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왠지 "당연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나누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란 말인가? "교회의 분열은 사탄의 장난이다."라고 키프리안 (Cyprian)이 말했는데, 교회를 나누어 놓고 뭘 잘했다고 뻔뻔스럽게 자랑을 하는가? 그리고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이 어떻게 성령의 열매란 말인가?
캐나다 한인 교회에서 어떤 목사가 이 능력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날 집사는 넘어지고 믿음이 없는(?) 장로님은 넘어지지 않았는데, 넘어지지 않는 장로님이 그 집사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목사님이 넘어지라고 해서 넘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 목사는 쫓겨났다고, O목사님이 전해 주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매인 모양이다. 그 목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캐나다 한인 교회에서도 이단시하고 심지어『H』측 캐나다 노회에서는 거기에 참석만 하면 제명처분 시킨다는데, 한국 목사들이 우 - 몰려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떠나 올 때 동역자들에게 진실을 밝히러 가겠다고 장담은 했지만, 속모르는 성도들은 이런 현장에 목사를 보내 놓고 우리 목사님 능력 받아서 돌아오라고 기도할 일을 생각하니 너무나 민망스러웠다. 또 능력 받았다고 사기를 칠(모두는 아니지만) 목사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목사로서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어 표적을 따라 방황해야 하겠는가? 언제부터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어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상술적인 목사로 전락했는가? 마지막으로 목사님들의 양심을 묻고 싶다.
"능력이 어디 배워서 얻는 것입니까?"
"반복된 훈련으로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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