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그냥 묻히기에 아까운 글들이 있습니다.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라 더욱 애착이 가고 마음이 갑니다. 분명 가치 있는 글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늘 대하는 글이라도 거기에 마음을 실어서 마음의 눈으로 읽으면 마음으로 와 닿을 텐데....
오늘 올릴 자료는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바른 신앙의 자세’ /장수민 목사님의 글입니다. 자매카페 ‘말씀사랑 책사랑 교회사랑’에서 퍼 왔습니다. 이곳 주인장은 나쁜 사람입니다. 이 좋은 글을 자신만 보려하다니~~
저는 이글을 읽고 마음이 찡~ 했습니다. 다 아는 것인데도 하지 못함은 웬 이유에서 일까요? 주위의 교회를 둘러 보면서 안타까움에 사로잡힙니다. 성경을 통해 저와 공동체(교회)를 판단함은 지극히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 일것입니다. 아울러 강단을 통해 주의 말씀을 공급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또한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위에 마음이 아름다운 분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큰 행복이고 주님의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들과 그 기쁨과 유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
개혁주의 신앙입문(국제KBS동아리2005.12.17)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바른 신앙자세
(딤후3:15-17)
1.도입 : 성경연구의 자세
성도는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이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거듭나게 되며(벧전1:23, 딤후3:15), 이후 계속해서 말씀으로 인하여 거듭난 생명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벧전2:1-2, 벧후3:18). 그러므로 말씀은 거듭나는 수단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거듭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자라게 하는 영의 양식으로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거듭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이후 성장해 나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하지 않게 되면, 앞서 말씀을 거듭남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재가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의 종교적인 감정 표현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는 다시 말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구원을 누리는 신앙에로 자연스럽게 인도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도 그 안에서 전혀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앙적 활동이 확인되지 않거나, 현저하게 변화된 삶의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 기만적 구원관에 사로잡힌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자(或者)는 하나님께 대한 기독교적 열심은 있는데 그것이 성경의 말씀을 좇는 계시 의존적(啓示依存的) 사색(思索) 신앙(행17:11)에 성립되지 못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을 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으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롬10:2-3).
이것이 자기 기만적(欺瞞的) 신앙의 전형(典型)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기 모순에 빠질까봐 성령님으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하심으로(벧후1:20-21)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 했으며, 이런 결과로 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해서 온전함에 이르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딤후3:16-17).
가령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거듭났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성경 말씀 한 두절을 제시합니다. 이를테면 요5:24을 제시합니다. 이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부분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이 말씀을 믿기 때문에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후 도무지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 성경을 읽기도 하고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형식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자면 전혀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장성해 나가지를 못합니다. 주일날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가 신앙생활 하는 모습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열심히 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을 연구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아니하면 기타 다른 일들이 제아무리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사실은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은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지식’의 결핍이 아닙니다.
‘관계론적 지식’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관계의 부적절함은 결과적으로 인격적 교제에 문제를 야기시키기 마련입니다. 곧 저들은 율법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의 본래적 성격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결핍과 왜곡을 일삼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올바른 순종의 삶을 외면했습니다. 자기 본위의 자의적 숭배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해 지식의 결핍이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에 무지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위선과 가식과 망령된 행실로만 여겨집니다. 영적 생활을 수행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는, 그래서 자신의 종교적 심성에서 발휘된 맹목적인 열심은 결코 신앙의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엄청난 해를 자초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지식 없는 열심을 좇은 결과 끝내는 하나님을 배도(背道)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이방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감은 이런 배역(背逆)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롬10:2-3절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적절하게 경고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고 지적함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구속사적 계시관에 의존해서 신앙하고 생활하지 않았음을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졌습니다(렘17: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시고(롬3:10-11), 인간에게 계시를 주심으로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찾아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일컬어 ‘계시의존 사색신앙’이라 부릅니다. 때문에 만일 이 계시를 저버리고 자기 멋대로 열심을 내게 되면 필시 자의적(自意的) 숭배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 왜곡되게 섬기게됩니다(롬1:21-23). 이것이 우상 숭배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좇는 방식의 신앙 생활을 하지 않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를 좇는 것, 곧 자기의 의를 좇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자기 열심과 자기 의의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 오로지 영혼의 황폐함만을 적극적으로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 나가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젊고 힘이 있고 시간이 있을 때, 주님께로 부르심을 받을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대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전12:1).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며 받들어 나가는 삶을 경영해 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지런히 성경을 바르게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동기와 목적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금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인지에 대한 동기와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성경 지식이 지식 그 자체로만 머무르고 나아가 어리석게도 교만으로까지 발전하는 일에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됩니다.
순종이 없는 성경 연구가 이러한 병폐를 초래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 하는 만큼, 그에 걸맞도록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단지 지식만을 쌓아가기 시작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현대판 영지주의에 빠져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지식욕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훌륭하다 해도, 모르는 것이 아직도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실천하지 않는 지식이란 사실상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깨달은 바를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에도 개인적인 경건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한 교회로 하여금 더더욱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에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마땅히 성경을 연구해야 하며, 아울러 이 목적을 더욱 더 견고하게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필요한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전개
성경공부의 제일 된 목적: 구원(救援)
첫 번째로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인도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이 말씀을 보면, 성경, 그리스도 예수, 믿음, 구원, 지혜 등의 개념들이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며, 또한 구원을 얻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즉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의 좀더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영생의 의미이고, 성경을 통하여 이 영생으로서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하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39에서 이 사실을 직접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께 대한 ‘증거’와 ‘영생’의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게 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했다면 영생을 얻은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방식으로 구원을 얻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줌으로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을 가리켜 ‘구원의 방도’, 혹은 ‘은혜의 수단’과 ‘은혜의 방도’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오직 성경만이 ‘은혜의 방도’라는 의미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연결될 때에만 이렇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성경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실 때만이 은혜의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며, 이때 말씀은 능력으로 역사 되어 불신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며(고전12:3), 성도의 믿음을 고양시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끌어 가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어떤 은혜의 방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을 연구했는데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니하였다면, 그는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 때, 성경이 기록된 목적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20:31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목적을 두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에 반드시 이르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익한 성경공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배우고 알아도,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된 것입니다. 딤후3:7에는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한 의미로는 ‘언제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성경공부란 참으로 무가치한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도덕실천의 지침서로 성경을 대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서 성경에서 종교적인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어 안정을 누리고 싶어서 성경을 읽기도 합니다. 혹은 무언가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대답을 찾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뒤적거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그러한 체험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신비적인 심정을 갖고 성경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기타 성경을 그것의 본래적 목적에 맞지 않게 연구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라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복리의 증진을 꾀하려는 일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자기의 삶을 행복하고 윤택하게 하려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을 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증가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게 되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본의(本意)를 크게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게 되면, 이후부터는 더 이상 자기 중심주의로 살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해서 행동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이게 됩니다(롬12:2, 고전10:31). 성경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잡습니다. 만일 성경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바로 잡지 않게 된다면, 이후에는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처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해주는 것인데, 이것을 그릇된 방법으로 쓰고 있다면 달리 무엇으로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나갈 수 없게 됩니다(딤전6:3-5).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성경을 실컷 읽고 연구했는데도 자신의 영혼이 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릇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한에는 교회에 들어와서 제아무리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종교생활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에 속해 있는 자다운 각성과 태도에 성립되는 일입니다. 곧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 실질에 성립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복리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게 되면 거기에서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크신 경륜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진행되어 나가는 구속사의 자리에 걸맞도록 자신의 삶을 해석해서 갖다 놓는 차원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큰 목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성도가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전 여정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도자에게 성경 말씀 몇 군데를 제시한 후에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을 믿겠느냐? 지금 믿는다고 시인하기만 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단순 논리로 구원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거듭나게 되고, 거듭난 이후에는 과연 거듭난 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차원에서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가 일평생 동안 구원을 누리며 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차원에서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6절과 17절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성도의 일생에 걸쳐서 미치는 영적인 영향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할뿐만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로 인도해 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물론 이때의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의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심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 그 자체가 홀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성령과 함께 역사 되고, 성령은 항상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롬8:9).
<교회를 통한 말씀 선포>
그런데 여기서 좀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한다고 할 때, 이것이 개인적인 측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의하는 일입니다. 개인이 혼자 성경을 읽고 깨닫고 하는 방식은 성경이 은혜의 방도가 되어 성도를 구원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정당한 방법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사람들이 혼자 성경을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소간 불미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 성령께서 말씀을 쓰시는 일은 거의 부재하고, 순전히 개인의 종교적인 기지만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면, 이런 사람들의 신앙활동을 보게 될 때, 거의 십중팔구는 도무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효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을 떠나서 일하신다는 것은 호리 만큼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교회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몸을 위하여, 몸을 향하여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을 때, 이는 일차적으로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오신 이 큰 전제하에 비로소 성도 개개인에게 오시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께서 쓰시는 거룩한 구원의 도구가 되어 은혜의 방도가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이 선포될 때에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신앙의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벧전2:2). 또한 교회는 말씀으로서 성도를 양육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말씀의 수종자를 세우시고 이들로서 말씀을 선포케 하사 당신의 택한 백성을 중생 시키십니다. 또한 성화에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성도가 교회의 품을 떠나 개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깨닫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도 한계가 있겠지만,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느냐의 측면에서는 더더욱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교회가 말씀을 교회의 권위로서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할 때에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말의 보다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말씀의 수종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은사를 주시어 말씀을 바르고 의미 있게 선포케 하시어 성도들의 거듭남과 양육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교회에 세우신 목사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를 특별하게 귀한 사람인양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교회에 목사라고 하는 직분과 제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교회적으로 검증 받은 사람이어야 만이 비로소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분 내키는 대로 나서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의 전문가인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게 되면, 성도들은 이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이를 생활에 반영해 나가야 합니다
성도가 평소에 성경을 일상적으로 읽고 연구하는 생활이 뒷받침되고 있다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에 입각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의 여부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연구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종종 사이비 목사들이 나타나서 거짓으로 전하고 미혹해도 그러한 일들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사의 말씀 선포가 과연 성경적 근거를 정당하게 갖는 것인지, 아니면 사이비적인 것 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서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가 선포하는 말씀이 도무지 성경적 사상에 배치된다면, 이때에는 지체 없이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성도 개인이 어떻게 말씀을 전문적으로 배운 목사의 성경 지식을 당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저런 연조(年條)를 가진 성도들이 서로서로 모여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채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자 다양한 기독교 문화와 접해 있고, 주위에 다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도 교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충분히 말씀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으면 그가 더 이상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타락하지 않고 보호됩니다. 반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다면, 이때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때에 성령께서 이것을 가장 유효하게 은혜의 방도로 쓰시게 됩니다. 물론 성도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하여도 구원의 도리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좀더 폭 넓고 깊은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세우신 말씀의 수종자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큰 원칙을 전제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하여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도 자기 혼자 개인적으로 읽고 깨달은 말씀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 주관이란 것에 의해 신앙의 큰 틀이 형성되기 십상이고, 따라서 교회와는 상관없는 순전히 개인주의적인 신앙형태를 띠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을 쓰셔서 그를 사용하시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됩니다. 특정 개인이 개인적으로 성공하는 것과 성령의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일상생활 속에서 이 말씀을 좀더 깊게 성경으로 상고하는 것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고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행여라도 혼자 개인적으로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이리 저리 끌고 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로부터 선포된 말씀에 입각하여 자신의 신앙자세를 반듯하게 만들어 나가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고, 다음에는 이를 성경으로서 상고함으로 더더욱 확증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며, 끝으로 삶의 현장에서 이를 실제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이 선포되면 이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식의 신앙생활의 실상이 있다면 이는 그만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 실상이 나와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입으면 삶을 전환하게 됩니다. 은혜가 이렇게 만듭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은혜를 ‘왕 노릇 하는 권세’라고 표현합니다(롬5:21). 은혜는 느낌이나 기분 혹은 관념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은혜는 왕 노릇 하는 권세입니다. 은혜는 흑암의 큰 권세 아래 갇혀 있던 성도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는 것이기에 가히 왕 노릇 하는 권세인 것입니다(골1:13). 성도가 이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세 아래 있게 되면 자신의 눈이 그만큼 밝아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상을 바로 알게 되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의 광채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여기에 비추어서 세상이 어떠한 것 인가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얼마나 고귀하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가를 깨닫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 자신이 얼마나 부정하고 온전치 못한 자로 서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더더욱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자기에게 역사 해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고, 그래서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려고 하는 선한 욕구가 충만해집니다. 따라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 풍성히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곧 첫 번째로 교회에서 선포되고 해명되는 말씀을 사모하고 귀 기울여 의지하는 일임에 다름이 아닌 것이며, 두 번째로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부단히 구현해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새 사람다움이 구체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창6:8-9). 이렇게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었다면 그 실상이 나와야 합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도무지 그 생활 속에서 은혜를 입은 실상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아니 구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고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성경을 멀리하는 모순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마침내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어영부영 하는 심정으로 교회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적 종교습관만이 몸에 밸뿐이지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다운 생명력은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말씀에 의거하여 정상적으로 장성해 나가는 성도인 경우 그 실상을 만들어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날마다 더더욱 증대시켜내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 삶의 태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經綸)을 중심으로 삼는 삶’의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구속의 경륜으로서 세상 역사를 주권적으로 집행해 나가시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자기 자신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서 있는 사실을 깨닫는 역사 해석의 안목이 있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성과 내용과 성격을 뚜렷이 받들어 나가게 됩니다. 곧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삶의 방식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는 삶을 지향해 나가는 것과 동질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크고 거룩한 영광이 그 찬란한 광채를 충만하게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고, 이때에 교회라고 하는 형식을 통하여 이것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갖게 되어 자기 자신을 더더욱 교회원다운 자리에 갖다 놓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길 때에 이런 실질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는 데서 되어지는 가장 정상적인 일입니다. 이상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성경의 두 번째 목적 : 성화(聖化)
두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기에 성령께서 이 성경을 쓰셔서 성도를 온전케 하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경은 성도를 온전케 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후 계속해서 성경을 깨닫고 여기에 순종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지며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부지런히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며 실천하는 만큼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다운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옛 사람의 요소는 점차 사라지고, ‘새 사람’이라고 하는 성령의 소욕으로부터 나오는 거듭난 인격적 활동이 명료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집니다.
이런 원리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곧 창세전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 역사가운데 드러내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인간에게 계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동물들처럼 그렇게 이성 없이 본성대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영혼의 기능이란 것이 있는 까닭에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으로 창조된 의의와 가치를 다하며 살아나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인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가 이 일에 협력하고 하나로 일치가 되어 마침내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에 담긴 원리이며 사상입니다(창1:28). 이런 거룩하고 고상한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의의이며 취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이제부터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서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고 일련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그 본래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충만히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곧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이 그것입니다(창2:16-17).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담은 선악과나무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에 불순종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아담은 이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선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악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 관계로부터 격리되어 에덴에서 영원히 추방됩니다. 더욱이 아담의 불순종은 그를 통하여 태어나는 인류 모두에게 치명적인 해독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과 부패에 빠지게 된 일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기능과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인간의 상태란 것이 일반 동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이 있으나 사실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래적 가치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존재하는 근본 가치가 상실되면, 그것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으로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타락했을 때, 이렇게 인간다운 가치를 잃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가치만 상실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큰 죄책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최초의 계시를 불순종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 선악과 금령법(창2:16-17)을 불순종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동시에 처음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에 담긴 창조언약(창1:28)을 성취시키는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을 주시게 됩니다. 언약의 상호 관계성은 이렇습니다. 처음 인간에게 주신 창조언약으로서의 문화명령(창1:28) 속에는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의도하신 바,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대한 거룩한 계획이 함축돼 있었습니다(백성, 땅, 왕권).
그리고 이 문화 명령적 언약은 내용상 은혜 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계시 속에 담겨진 행위언약으로서의 금령법을 준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담의 창조언약은 은혜의 성격상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담의 창조 언약의 지속적인 효력 발생과 선악과 행위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를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제 삼의 언약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됩니다. 이런 상황적 요청에 의해 주어진 것이 소위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인 것입니다.
이후 여자의 후손 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 성취의 실체를 향해 구속사라는 새로운 특별계시를 전개시키며 죄에 빠진 인류의 구원을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게 됩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바로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됩니다. 이 여자의 후손 언약의 성취인 구속사의 절정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의미에서 구약 언약의 성취자이며 동시에 구약 계시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히1:1-2).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구속사적 특별계시를 주실 때에 단순히 당신의 구원 방식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구원부터 베풀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거나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라고 일컫습니다. 구약 백성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공효(功效)를 미리 앞당겨서 적용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신약 백성들의 경우에는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이렇게 먼저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다음에는 왜 그렇게 구원해 주셨는가를 알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해 지는 인간’이라는 주제입니다(딤후3:17).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져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해져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에 이렇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다워 집니다.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생하시는 생명을 소유했다면 그 생명력의 자연적 발휘로 인해 이것이 가능해 집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다 하는 의미는 성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에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우주적 보편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고전12:13). 오늘 우리가 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역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의미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역 교회의 참된 의미는 보이지 않는 우주적 보편의 교회가 보이는 가시적 교회로 ’여기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지 않는 지역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참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부단히 교회의 참된 표상과 사명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 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에서 한결같이 ’이기는 자에게는‘ 이라는 단서가 붙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약의 저자는 지상의 교회와 여기에 지체로 속해 있는 성도는 ’군사‘(딤후2:4)이며 동시에 ’경기자‘(딤후2:5)로 비유해 설명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바로 군사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선수는 경기의 규칙에 절대 순응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상관은 누구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법도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일이 뒤따라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온전해지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 모든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의 뜻을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행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하게 되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계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에 있어서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주어져있다 할지라도 정작 그것을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극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도들이 도무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교회 제도 안에 묶여 있을 것만을 요구했고, 그렇게 하는데서 구원이 얻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배는 거의 의식으로 채워졌고 어쩌다가 있는 강론조차도 자기네만 아는 라틴어와 같은 언어로 몇 마디 중얼거리듯이 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과연 어떻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적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면 행하지도 못하는 법입니다. 설혹 무언가를 안다고 할지라도 정작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하물며 아예 알지도 못하는 한에는 아무 것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거나 듣기는 하되 정작 깨닫거나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한에는 은혜의 방도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 안에서 생명적 활동과 은혜의 작용을 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 말씀을 도구로 쓰시는 데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단순히 지성을 사용하여 성경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쓰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아가 그에게서 새 생명의 능력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께서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이 늘 일상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성경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무슨 문제를 만난다거나 할 때에 그때서야 부랴부랴 성경을 이리 저리 뒤적이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 몇몇 구절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식이 되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미신적이며 우상 숭배적으로 신앙하는 망령된 행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구원에 이르는 신앙과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유일한 방편인 성경>
성도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은혜의 방도임을 알고 평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는 자세를 길러나가야 합니다. 성도에게서는 성경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고 새로운 인생관이 만들어져 나가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기타 어떠한 형태의 신앙생활이란 것도 다 무익할 뿐입니다. 성경으로서 자신의 신앙관이라는 것이 형성되어지지 않는 가운데 제아무리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서 열심을 내게 되면 오히려 무익한 열심을 내게 되어 교회를 망치게 됩니다. 이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열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근거에 입각한 열심이 나와야만 교회가 바르고 온전하게 세워집니다. 성경으로서 무언가 깨달아진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일에도 열심을 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성경이 깨달아지는 데서 나와진 것이 아니면, 우리가 발휘하는 신앙생활의 열심이란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내는 자의적 열심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상 필연적으로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보상심리가 발동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합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재이신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한층 더 깊고 신령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이 이러할진대, 서너 가지 구호와도 같은 피상적인 말씀 몇 몇 가지를 붙잡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로서 기독교라는 것을 형성해 나가겠다고 나서게 되면 이는 참으로 단순하고 유치하며 어리석기까지 한 발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길은 영원토록 요원해집니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은 은혜의 수단이며 방도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은혜의 수단’과 ‘은혜의 내용’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찬송을 열심히 부른 다음에 말하기를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는 ‘은혜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 후에도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무슨 회개의 기도를 열심히 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은혜의 내용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았기에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 알기 때문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는 그대로 모방하여 기도하게 되면 그것으로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은 결과 찬송하게 되는 것이고, 찬송함으로 더더욱 자기에게 이루어진 은혜를 견고하게 붙잡게 됩니다. 이런 것이지 찬송함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찬송이란 은혜의 내용이지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내용과 수단을 혼동하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음을 주변에서 적잖이 보게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깊이 있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배우고, 배운바 교리적 체계와 사상과 원리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전개해 나가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모방과 답습만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꾸미고 치장하는 기독교적 종교외식이 몸에 붙게 됩니다. 사람이 고의적으로 작심을 하는데서만 외식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어도, 정작 그것을 뒷받침 해 줄만한 신앙적 교리와 진리의 체계가 정상적으로 발휘되지 않게 되면 부득불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적 심성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음으로 신앙적 활동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일날 하루만 보더라도 예배당에 나와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도 드리고 말씀도 듣고 헌금도 드리고 찬송도 부릅니다. 또한 성경 공부에도 참석합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신앙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특정한 사람이 정해진 예배 의식에 오늘도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내용은 그에게 이런 신앙적 행동을 뒷받침 해주는 뚜렷한 의식이나 정신이 그의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안에 간직된 그럴만한 당위성에서 나와진 합당한 의식과 각성이 있는 까닭에 거기에서 나오는 방식으로 외적인 신앙적 활동과 행동양식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행동만을 앞세우게 되다 보면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모방과 답습과 종교적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다 깊이 있게 배우고 거기에 따라 행동할 때에 이런 의식과 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정당한 의식과 정신 속에서 합당한 예배와 적법한 신앙적 활동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계시의존 사색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계시로서의 성경말씀에 바르게 기초하지 않고서는 참된 하나님 중심의 성경적 신앙관은 확립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더욱 그리스도의 인격적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옛 사람의 요소는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새 사람이라고 하는 성령의 소욕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인격적인 활동이 더욱 명료해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본문 16-17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기에 성령께서 이 성경을 쓰셔서 성도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상 바울이 말한 두 번째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목적의식의 부단한 상기>
세 번째로 덧붙여서 생각해 보아야 할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성경 연구의 목적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가치관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셨던 순종의 삶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본성을 우리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준행할 때에 이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되십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에 이와 관련한 것들을 섬세하고 풍성하게 배우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주님이 사셨던 삶의 외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덕행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외모만의 모방으로 나타나는 것은 위선입니다. 겨우 외모로 흉내나 낸다거나 또는 그렇게 되어진 것을 과시나 하기 위해서 덕행을 이루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솔하게 섬기려 하는 마당에 그까짓 자그마한 덕행을 꾸미는 등의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제아무리 큰 헌신을 동반한 선행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옷과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사64:6).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동기를 바르게 갖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내적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이 선한 동기를 가능케 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가지셨던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이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의 고양된 의욕은 자칫 잘못하면 은밀한 교만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 자신의 의욕을 과신하는 것은 옛 사람적인 방식입니다. 새 사람을 입은 자다운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의지하십시오. 그의 능력을 소멸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살전5:19). 그를 근심시키지 마십시오(엡4:30). 그의 인도를 적극적으로 좇으십시오. 성령님을 의지하는 이런 일은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고집과 같은 것들을 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경을 연구해 나가노라면 그것이 아주 어리석어 보이는 내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주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진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그 짧은 이성으로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성령께서는 분명히 우리들을 변화시켜 주시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성경 공부에는 어떤 정점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평생에 걸쳐서 이 일은 지속되어야 하겠습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아니하고 반대로 게으름과 나태 속에 방임하지 아니하면서 꾸준히 일평생 지속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중에는 단 일보의 진전도 가져오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사람이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다시금 재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느긋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조급해 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급하게 서두르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일보씩 전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예 이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덧입혀 주신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틀림없이 우리의 맏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참된 자유와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진정한 겸손이 우리 속에서 형성될 것입니다. 그분이 태초 이전부터 소유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가 우리에게도 이미 임해 있습니다. 그분이 현재 누리고 계시는 영생의 기쁨이 우리에게 이미 찾아들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가운데 현재 하나님과 친히 나누고 계시는 교제의 기쁨은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칭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 임금에게 복종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도는 지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당당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며, 아울러 성경 연구를 통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각양 각색의 이론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마구잡이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입니다. 여기 저기서 다양한 세미나들이 개최되고, 각종 부흥회들이 계절을 좇아 열립니다. 복음을 다루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이 넘쳐 납니까? 신학적으로 검증도 되지 않은 이론들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무제한 적으로 선포됩니다. 성경의 문맥이나 사상의 통일성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끌어다가 자기의 이론에 뜯어 맞추는 식의 성경강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이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하나의 큰 단체를 이루어 세(勢)를 과시하고 존재하는 까닭에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없는 순전한 성도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지금과도 같은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으로 한 단계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즉 전통에 맹종하고 다수를 뒤따르는 어리석은 신앙 형태를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고 이들의 조직이 크다고 하는 이유에 의해서라든가, 또는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이 이렇게 해 왔고, 그랬어도 아무 탈도 없는 것이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천편일률적 신앙 형태를 저마다 전통으로 붙잡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에 근본적으로 큰 틀이 잘못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는 무익한 열심만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을 접할 때, ‘이것이 그러한가’하는 것을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입각해 주의 깊게 살펴보는 과정을 가짐이 없이 맹목적이고 단세포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만한 수준의 성경적 분별력이나 영적인 통찰력을 아예 처음부터 갖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QT(Quiet Time)의 허와 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는 등의 일을 할 때에는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묵상’이라고 할 때 이미 주어진 기존의 ‘임의적인 틀’ 속에서 성경을 보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했는가를 항상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이라는 전제와 대 명제를 갖고 성경을 접근하고, 앞뒤의 문맥과 총체적 시각으로 주어진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시켜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큰 일(행2:11)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이 땅에 임했는가를 항상 전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이 세대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나가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종말론적인 마감을 하게 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큰 원리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것이 어떤 생명력으로 이 땅에 나타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드려 나갈 것인가의 차원에서 말씀을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려고 할 때에는 성경 계시의 큰 기둥이 무엇이고, 뼈대가 무엇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경 해석은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읽고 묵상하며 가르치는 일은 여럿이라고 하는 복수의 건축자들이 서로 합력하여 하나의 큰 건물을 지어나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든 재료들을 이미 주셨고, 건물이 어떻게 지어져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몸소 건물 기둥과 뼈대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건축자들은 여기에 맞도록 세부적인 기둥들을 세우면서 층층을 올라가야 합니다. 벽을 바르고 내부 장식을 설치해 나가야 합니다. 이때 전체의 설계에 맞게끔 원리와 원칙을 준수하며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완성이 됐다 하더라도 다시 허물고 새롭게 설계도에 맞추어 재시공을 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와 성경 묵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공부 그 자체와 성경 묵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틀 속에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성을 증대시킨다거나 도덕성을 함양시키는 결과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그야말로 벽지를 건물 외벽에 붙이는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또 성경 묵상을 했는데 정작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따라서 잘못 적용을 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할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잘못된 건물을 짓듯이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물결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건물의 구조 자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 곧 그들 각자의 실력이나 기술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일을 잘하고 어떤 일에 특기가 있고 하는 것 등을 피차간에 알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목표 달성에만 급급해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으려고 서둘러 댑니다. 그래서 설계도도 없이 건물을 짓는다거나, 설계도가 있어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어림짐작으로 건물을 짓는 사람의 경우와도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해석도 잘못하고 적용도 잘못하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형제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무례하기 짝이 없게 됩니다. 복음의 사상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마디 말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을 정도로 복음 사상이 빈약해져 있고,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몇 몇 가지 틀만이 복음의 전부인양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맨 날 부르짖는 것이 전도요, 교회 부흥이요, 새벽 기도 참석 잘하기요, 매일 성경 읽기요, 주일 날 예배 잘 참석하기 등입니다. 도무지 이 틀과 한계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성경적 부흥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성경 묵상을 해야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하면서, 참된 예배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열납되는 것인지를 알지도 모르는 채, 이런 것들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주장해 나갑니다.
구원받은 새 생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자꾸 억지로 형식을 이끌어 내려고 합니다. 임의로 목표를 설정하고 종교심을 부추겨 성취해 나가려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라기보다는 자기의 종교적 열심에 펀승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의 진위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그런 일들의 결과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건설하고 운반해 가는 일에 유익을 끼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됩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통치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즉 성도 개개인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전 영역에서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왕적 권세를 발휘하는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 되어지는 지를 점검해 보면 성령의 역사인지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인지의 여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
하나님의 말씀의 이중적 작용에 대한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이중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말씀을 믿고 거기에 자기를 의탁하는 사람들에게는 천하를 주고도 얻지 못하는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반면 말씀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서는 도리어 생명을 앗아갑니다. 이때 생명을 빼앗긴 사실이 이렇게 말씀 전파자들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것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계시를 통해 인간이란 죄로 타락한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수없이 가르쳐 오셨건만 유대인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적용으로 일관해 나오면서 구약 종교를 그들 자신의 행복과 복락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자기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것으로 여겼고, 또한 백성들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이런 다분히 육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구약 종교의 큰 정신과 사상을 변질시켜 버렸고, 도리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 열심이 실상은 가장 크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례가 메시아인 예수님을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반역적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강하고 다수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릇된 것을 알았을 때에는 가차없이 신속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가령 구약의 성전이란 것이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건물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경우에도 성전 건축 운운하면서 건축 작정헌금을 내도록 강요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 규례가 신약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계시의 완성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도 알았다면, 더 이상 구약의 십일조 규례의 말씀을 축복의 수단의 근거로 삼아 가르쳐서는 안되고(말3:10), 십일조의 본래적 의미인 생명의 원리 안에서 대표적으로 드리는 것임을 알아 감사의 명분으로 드려야 될 줄 압니다(창14:20).
또한 신앙 생활의 큰 틀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 한 개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잘 믿고 좀더 경건하게 사느냐의 차원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워나가면서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데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렇게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개인적 구원과 구원을 누리는 삶이란 것은 결과적으로 주님의 몸을 공동체적으로 보다 온전히 이루어 나가는 것을 통해 신앙적 실질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올바로 정립하지 않은 채, 제아무리 개인적인 경건과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으로서의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도의 신앙이 주님의 몸으로서의 연합적인 공동체를 확연하게 이루어내는 일에 유기적으로 상합하고 연락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교회를 이루는 구원의 삶에 성립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른 성경적 신앙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3.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미 옮겨진 우리들은 이제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에 최종적으로 들어가야 할 줄 압니다(딤후4:7-8). 이를 위해 언제나 우리의 성경 연구에 참여하시며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항상 자각하며 의지하기 바랍니다. 매 순간마다 그분의 도우심을 요청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언제나 성령께서 자기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동시에 성령께서는 항상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신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입니다.
'성경공부 > 성 경 공 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0) | 2007.10.04 |
---|---|
[스크랩] 예수를 만나라 (0) | 2007.10.04 |
개혁과제로서의 새벽기도 (0) | 2007.10.03 |
[세계의 교계] ‘신의 존재’ 대논쟁 (0) | 2007.10.02 |
모슬렘 대항은 현실적으로는 불가? (0) | 2007.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