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연합과 일치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
2006년 3월 16일(목), 대전 새로남교회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본 에큐메니즘의 원리
이광호(홍은개혁신학연구원)
1. 서론
신약성경에는 에베소1) 교회와 직접 연관된 사도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다. AD50년경 부터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까지 20년이 채 못되는 기간 동안 여러 성도들이 에베소를 방문해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2) 바울, 요한, 디모데, 아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 수없이 많은 선배들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진력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도는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으로서 그 곳에서 성경을 강론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들을 남겼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기 오래 전부터 그곳을 방문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베소가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기를 원하는 바울을 마케도니아로 부르셨다가 나중에 그곳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유대인 회당에서 몇 달간 성경을 강론했지만 심한 반대에 부딪쳐 중단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바울은 주님을 따르기로 한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에서 장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다.
또한 그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을 제작하여 판매하며 영리를 취하던 상인들로 인해 극심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들이 시민들을 선동하여 에베소 전역에 적지 않은 소요가 일어났던 것이다. 나아가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맞서 싸워야하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바울은 나중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말씀으로 교회를 지키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 잠시 머물게 된다. 그 때 그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해 교회를 위한 교훈을 주었다. 바울은 나중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다.
그리고 사도요한 또한 에베소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에베소 지역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는 말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교회에 중대한 교훈를 남겼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계시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에베소 교회와 관련된 신앙의 선배들의 사역과 성경기록들을 통해 에큐메니즘에 관련된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에베소 관련 사역(사도행전 19장; 디모데전서 1장3-7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준 바울의 교훈(사도행전20:17-38), 에베소서의 계시,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를 통한 교훈(계시록2:1-7) 등이 본 주제를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필자는 그 말씀들에 나타나는 교훈들을 좇아 교회가 취해야할 에큐메니즘에 대한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도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통한 교훈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던 초기 석달간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 강하게 반대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그 일이 중단되었다. 다수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바울은 많은 핍박과 위협을 당했으며 그곳에서 맹수와 싸워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전15:32). 그는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교회 가운데서 구약 성경과 더불어 오신 메시아에 관해 가르쳤다. 동시에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다.
바울은 또한 에베소 지역의 불건전한 사상적 배경과 하나님의 교회가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에베소에도 헬라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세상의 악한 자들은 교회 바깥에서 철학사상을 통해 성도들을 미혹했다. 교회 내부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제자 디모데로 하여금 그곳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돌보도록 각별한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3-7)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디모데를 권면하여 에베소에 머물도록 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더 머물게 된 것은 그가 자원한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는 바울의 권면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를 통해 당시 에베소 지역의 교회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본문 가운데는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던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교훈들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교인들에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여 엉뚱한 것들을 가르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성경적인 확고한 근거가 없이 교인들의 마음을 끌고자 하는 어리석은 가르침들이다. 그것은 비단 거짓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를 혼탁케 하는 허황된 주장들을 말한다.3)
거짓 교사들은 성경의 교훈을 떠난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그것은 의도된 악행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경륜을 떠나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교회에서 허탄한 논쟁을 일삼게 되면 결국 인간들의 지식을 자랑하게 되는 천박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것을 엄격하게 경계해야 함을 알고 그것을 디모데에게 당부했다. 바울이 진리를 떠난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지식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순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 사랑은 인간들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의 허탄한 교훈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이성적 판단에 의한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것을 통해 진리와 거리가 먼 헛된 지식을 쌓게 된다. 세상의 논리를 앞세우는 자들이 세상적인 경험과 지식을 통해 교회의 교사가 되면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허탄한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여 교인들을 엉뚱하게 지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종교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도들을 가르치지만 성경을 떠난 그들은 진정한 교회의 교사가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의 교훈을 알지 못하며 성경을 배경으로 삼아 무언가 증거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가운데 있는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염두에 두고 염려했던 대부분의 허탄한 내용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로 말미암는 그런 현상은 현대 한국교회의 강단을 심각하게 더럽히고 있다. 사도바울이 진지하게 지적하고 있는 그 문제들이 한국교회 가운데 범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진정으로 자각하고 지적하는 소리를 듣기 매우 어렵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교회적 문제에 대한 선행되는 신학적 검증 없이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일치와 연합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도리어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의 종교적 노력을 통해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 낸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본질을 떠난 정치적 야합 이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성경의 교훈에 따른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3.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준 사도바울의 교훈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 도착했다. 그가 흩어진 여러 교회들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때 방문한 여러 교회들로 부터 연보를 거두어 당시 기근에 빠져있던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다. 그것은 단순한 구제차원이 아니라 흩어진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임을 고백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그곳으로 초청했다. 바울이 직접 에베소를 방문하지 않고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형편을 감안한다면 에베소에 있는 여러 명의 장로들에게 연락해 그들을 밀레도에 초청하는 것 보다는 자기가 직접 에베소를 방문하는 것이 훨씬 간편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에베소를 방문했다면 보고 싶던 성도들의 얼굴을 보며 반갑게 교제할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직접 에베소를 방문하지 않고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는 번거로운 방법을 취했던 이유는 개인적인 신병상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면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던 바울이 그 곳을 떠나 마케도니아와 고린도 지역으로 떠날 시기에 큰 소요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도 한 몫 했을 것이 틀림없다.
허탄한 말로 교인들을 미혹하던 자들은 힘을 결집하여 바울에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런 형편에 있던 바울이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에베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 그 직분자들에게 교회를 당부하면서 잘못된 사상이 교회에 유입되지 않도록 단단히 당부했던 것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8-31)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은 에베소 교회의 감독자들이 굳건히 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감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여 자신을 잘 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이 진리에 굳건히 서 있지 않으면 전체 교회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독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살피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교회를 위해 진력을 다했던 자신의 삶을 회상했다. 그는 장로들에게, 자기가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며 진리를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말씀의 사역을 했을 따름이지 그들을 통해 개별적인 목적을 추구하거나 종교적인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았음을 고백적으로 말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도로서 본을 보였던 그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우신 이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온 양떼 곧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직분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목양해야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한 순종의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은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는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것은 교회의 안팎에서 성도들을 위협하는 사상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교회 밖에서는 흉악한 이리가 몰래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들을 삼키려 할 것이며, 교회 내부에서도 어그러진 교훈을 전하는 자들이 생겨나 성도들을 어지럽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그 흉악한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교회 가운데 슬며시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이리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악한 신분을 드러낸 채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 이리는 무섭고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양같이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들어오게 된다. 만일 거짓 교사가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성도들은 그들로 인해 불안해 할지는 모르지만 미혹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고 말씀하셨다. 양으로 위장한 이리는 하나님의 예리한 검을 통하지 않고는 쉽게 분별되지 않는다. 도리어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더욱 교활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인 감독자들은 정신을 차려 그 흉악한 이리들의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연약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흉악한 이리는 결코 양떼를 아끼지 아니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자기를 위한 먹이거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이 어린 순진한 성도들은 그 교활한 이리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 일반적인 이성과 경험의 눈으로 보면 그가 도리어 훌륭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정신을 빠짝 차리지 않으면 그 이리들로 인해 양떼들이 크게 상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그런 일을 방지하도록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에베소 교회 내부에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악한 지도자들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며, 성도들을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자기의 제자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말을 듣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 양 선전하기를 좋아한다.
교회의 진정한 교사는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는 제자로 만들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교사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며 그의 제자가 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는 이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무색해진 안타까운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교적 욕망과 야망을 추구하려는 거짓 지도자들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세속적 사상들을 동원해 어그러진 말을 할 것이다. 그래야만 어린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미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사들은 그런 악행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교회의 안팎을 최선을 다해 살피며 경계해야 한다.
4.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훈
(1) 교회연합과 관련된 가르침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는 인간들이 세운 종교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신 말씀과 조화된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교회들은 주님께서 ‘그 반석’의 터 위에 세우신 공동체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면 이미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터가 ‘그 반석’이라는 사실은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 터 위에 세워지지 않은 기독교적 종교 집단은 설령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교회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터 위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한 건물이 건축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정당한 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훌륭하게 보이는 건축물들이 서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경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모퉁이 돌이 아니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가 아니어도 겉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유사교회’가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다. 즉 인간들의 종교적 이성과 경험위에 기독교의 외형을 모방한 그럴듯한 유사교회가 설립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 세워 가시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들에 의한 성경을 떠난 판단은 배격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 모든 교회들이 서로 연결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지상의 교회들은 ‘주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거기서 떨어져 독립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면 이미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5)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가지가 아니라면 이미 포도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개교회주의가 팽배하고 소위 성공한 종교인들을 많이 양산해 낸 것은 교회의 하나됨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편교회의 지체로서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종교 지도자들의 개별적인 성공실패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종교적 욕망에 충실하게 되면 전체적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내세우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모든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서로 연결된 채 세워져 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모퉁이돌인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을 때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임이 확인된다. 지상의 교회들은 다양한 여건과 형편 가운데 놓여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동질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선지자들의 사도들의 터 위에 온전히 세워질 때 하나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이는 어느 누구도 개별적 값어치에 따라 좌우되는 인간적인 취향에 기반한 교회를 세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도 그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쉽게 자기 취향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경영하려는 악한 속성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견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성과 경험에 따른 종교적인 주장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인본주의적 사고에 의한 잘못된 논리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허탄한 야망을 좇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는 성경을 통한 전체적인 교훈에 따라 세워져 가야만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바탕으로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4)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들의 단순한 의도나 경험, 열정에 의해 세워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역사적 고백과 참된 교리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각기 상이한 시대에 발생하는 상황과 사회적 여건이, 성경을 통해 확립된 교리를 능가해서는 안됨을 의미하고 있다. 교회는 시대에 얽매인 종교 조직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되 성경에 붙잡혀 있는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공동체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종교적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신 것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이웃 즉 교회를 위한 성도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1-6)
바울은 주안에서 감옥에 갇힌 자신의 형편을 강조하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직분자가 아님을 고백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개별적 주장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온전한 뜻에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평안의 매는 줄에 의해 하나로 묶여져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겸손, 온유, 사랑, 용납 등의 용어들은 일반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윤리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자의적 해석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용어들은 반드시 진리의 편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그 용어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기 위한 방편으로 허락된 은사적인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온유를 갖추신 분이었으며 사랑이 많고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란 극한 용어를 사용하셨으며 ‘회칠한 무덤 같은 인간들’이라며 독설을 뿜어내셨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과 사도들은 그와 동일한 가치관에 서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겸손과 온유, 사랑과 용납을 요구한 것은 그와 일치되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것이 단순한 인간적인 연민을 당부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요구한 것은 무분별한 조직적 일치나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곧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며 성령도 한 분, 주님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믿음과 세례도 하나이다. 이것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제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들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선물로 허락된 것들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는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에 의한 단일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지상의 인간들에 의한 종교단체가 되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그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지상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온전한 하나의 교회를 세워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모든 참된 교회들은 서로 간 지체로서 하나의 몸임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했다. 이는 단순히 조직에 의한 평면적 일치와 연합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가치를 가짐으로써 하나로 연결되어 수직적으로 자라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교회와 그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의한 가치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로 연합해야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종교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참된 교회들이 성경이 요구하는바 하나가 되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교회가 인간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을 받지 않고 잘못된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 가운데 흩어져 있으나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둔 하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 거짓신앙에 대한 견제를 요구하는 가르침
교회는 항상 거짓 신앙을 분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 거짓 신앙은 일반적인 이성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잘못된 세속의 풍조는 끊임없이 교회를 위협하며 교회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곧 거짓 신앙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런 것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하면서 그런 더러운 것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도 말라고 당부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
성도들을 위협하는 세속적 분위기가 에베소 교회 주변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악한 것들을 단순히 멀리 하라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이름마저 부르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런 더러운 것들은 입에도 담지 않음으로써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주변에 널려있는 악한 것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그런 악행들로 부터 온전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본다: 음행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5:28). 우리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그 더러운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더러운 것들에 대해서는 교회 가운데서 입에도 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현대 교회에서는 그런 내용들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설교를 하면서 그런 성(性)에 관련된 내용이나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에 관한 것들을 발설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풍토가 되어 있다.
현대의 성개방 풍조가 교회 내부에 침투해 들어와 있음은 염려할만하다. 동성애 문제를 교회가 수용하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교회가 소외된 소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푸는 것인 양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입에 떠올리기 조차 부끄러운 그런 내용을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토론을 통해 수용여부를 결정지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 가운데서 그런 더러운 것들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자들과는 신앙적으로 교제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은 입에도 담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세상의 논리를 통해 성도들을 속이려는 자들이 있다. 변천하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수용하여 교회에 주입하려는 자들은 악한 자들이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엡5:6,7)
교회는 헛된 말로 속이려 하는 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하며 성도들은 그에 속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대어 자기 주장을 하지만 실상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헛된 사상을 유포하는 자들을 경계하며 그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그들과 연합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사도바울은 그들의 악한 주장을 교회 가운데 폭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11); "Have nothing to do with the fruitless deeds of darkness, but rather expose them"(Eph.5:11, NIV)
우리 시대에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크게 오해되고 있다. 모든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는 것이 마치 사랑인 듯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자기변명을 위한 방편이 되며 성도들을 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 그들을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의 의미 가운데는 그들의 거짓 주장을 폭로함으로써 교회를 일깨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5)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삼아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교사들의 말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가운데서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거짓 가르침이 진리를 대체하게 될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상의 많은 교회들이 타락했던 원인은 세속적인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사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게 되면, 거짓이 진리인양 행세하면서 어린 성도들을 혼란으로 몰아가게 된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악한 이리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양들을 현혹한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배경으로 하여 거짓 교리를 유포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그 거짓들을 버리고 이웃 성도들과 더불어 항상 진리(truth)를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진리는 인간들의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항상 진리를 입에 담고 있을 때 상호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관이 없는 기독교적 집단을 멀리해야 하며 그들의 거짓 주장들은 과감하게 차단해야만 한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그것을 통해 지체로서 서로간 세워주며 격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5.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를 통한 교훈
요한계시록은 AD70년, 사도교회 시대를 마감하는 시점에 기록된 말씀이다.5)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 사도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처해 있던 교회들의 혼탁함을 보게 된다. 따라서 계시록은 이후의 교회들이 악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가야 할지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의 앞부분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소아시아의 각 교회들이 안고 있던 거짓 교훈에 관한 문제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특별히 에베소 교회에 주어졌던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주변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당시 로마제국 가운데 매우 특이한 지역이었다. 소아시아 지역은 그리스 철학의 발상지라 할 만큼 유명한 지역이었다.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탈레스를 비롯한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과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고대 작가였던 호메로스, 이솝 등이 그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활동을 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졌던 만큼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타 지역에 비해 지성적이었으며 다양한 철학 사상들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그리스, 로마에서 생성된 종교들이 난무했다.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 중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아데미신을 섬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복합적인 철학사상과 종교사상이 에베소 교회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더러운 세속 사상들을 교회 안에 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했으나 성도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악한 사상을 용납하지 않은 점을 인정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우리 시대 다수 교회가 그런 자들을 감싸안는 것이 마치 사랑인 양 생각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난다.6) 오늘날 교회가 그런 잘못된 사상을 시험하고 교회 가운데 드러내려고 하면 사랑이 없는 태도라고 도리어 심한 질책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항상 거짓 교사들을 가려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자칭사도라 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계시록 기록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신실한 자세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자칭 사도들의 거짓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그런 신앙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면 교회 내에 상당한 불화가 발생하게 될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교회내의 외견상의 평화가 깨어짐을 의미한다. 자칭 사도라 칭하는 거짓 교사들을 시험하는 일은 결코 평탄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악한 자들은 도리어 자기들이 진짜라고 더욱 큰소리로 외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세상적 논리와 철학을 앞세워 성도들을 설득하며 미혹하고자 할 것이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그들의 세속적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빠져들기가 쉽다. 그것이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악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참 진리를 말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다. 그런 핍박을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거짓 교사들은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을 행하기에 강하지만, 진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으로 인해 담대하나 세상에서는 연약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짓 교사들로 부터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종교적 열망을 추구하다가 겪게 되는 천박한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당하는 고귀한 고난이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그 점을 인정하고 계신다. 그리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 이는 에베소 지역에 성도들을 위협하는 이단 사상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 주님께서도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주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미워한다거나 주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올바른 신앙자세가 아니다. 그에 대한 판단기준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본문을 통해 처음 사랑을 회복하도록 요구(엡2:4,5)하신 하나님께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신 점을 보게 된다. 즉 마땅히 미워해야할 내용을 분별하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칭찬할 것을 칭찬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계시록에서 말하는 니골라당의 행위7)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니골라당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니골라당을 종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무리들로 이해한다. 위의 요한계시록 2장 6절의 의미를 계시록 2장 2절과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비교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계시록 2장 6절에 기록된 ‘니골라당의 행위’가 2장 2절의 ‘악한 자들’ ‘자칭 사도’와 선명하게 구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의 윤리적으로 그럴듯한 행위를 분별해내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윤리화되면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 교인들은 그것을 매우 훌륭한 것으로 보게 된다. 사회를 위한 봉사와 이웃을 위한 구제행위를 보면서 그것이 마치 교회의 역할인 양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었으므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부터 비난을 들을 소지가 있었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세상의 윤리적 행위를 통해 교회의 의미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그것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격려했다.
6. 결론
이상에서 에베소 교회와 관련된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지상의 참된 교회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모든 참된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임을 인식해야 하며 마땅히 일치적 개념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분별한 일치운동이나 연합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활동을 견제해야 한다. 교회 일치나 연합은 결코 정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 일치를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고백과 건전한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기준은 현실적 상황이나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과 신학적인 검증이 선행되지 않는 연합운동은 도리어 거짓 종교 집단과 음행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앙과 신학에 대한 견제와 경계를 엄하게 당부하고 있다. 그것을 결여한 인위적 연합이란 지극히 위험한 일일 따름이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때 지상의 교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다. 즉 인위적인 운동을 통한 교회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일치가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참 교회의 고백을 버린 자들과 이루어지는 일치나 연합을 고려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 세력을 용납하는 영적인 음행이다. 도리어 참된 교회는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끊임없이 살펴야만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칭 지도자들의 거짓을 가려내고 폭로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연약한 성도들이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교사들의 중요한 책무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일을 소홀히 하면서 일치나 연합을 추진하고자 한다면 불건전한 혼합주의를 부추길 따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항상 위기상황을 직면하는 가운데 존재해 왔다. 지금도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가 마치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거짓 교사들은 주님의 자녀들을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한 먹이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설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을 굳게 하여 사탄의 세력들을 저항해 피 흘리기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 죄악 세상에 대처해야 할 교회와 성도들은 이미 고난의 길에 들어서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은 그와 같은 형편에 놓여 있다.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거짓 교회에 속아서는 안된다. 종교 지도자로 행세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별해 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철학과 시대적 풍조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경영하려는 자들의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며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교훈을 좇아 그런 힘든 일을 감당하는 동안 참된 교회들은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모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로서 동일한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라면 하나로 연합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인위적인 방법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수 종교 정치가들의 노력에 의존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참된 고백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바는, 교회가 세속주의적 거짓 가르침에 저항하게 되면 상당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일에 적극적인 참된 교회들은 저절로 형제임이 확인 될 것이며, 고난을 통한 연합의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즉 진정한 교회일치와 연합은 자발적인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고난의 일치를 통해 한 형제임이 확인된다. 한국 땅에 있는 참된 교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일치와 연합이 이루어지기 바란다.
1) AD 1세기 당시 에베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독자적인 행정관인 '스트라테고이'(Strategoi)가 있었다. 그리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통치 기관으로서 '불레'(Boule)라고 하는 민회관과 시민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순회 재판소가 있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는 '버가모'였지만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2)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으로 본다; 이광호, “요한계시록의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언적 논술”, 정통신학, 제1집, 해서신학연구원, 2005. pp.127-163. 참조.
3) J. Calvin, The Commentary of ⅠTimothy1:3.
4) J. Calvin, The Commentary of Ephesians, 2:20. 참조.
5) 필자는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 시대를 사도교회 시대로 보며, 그 이후 시대를 초대교회 시대로 본다.
6)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단에 대처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리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일반 철학적 가치와 세상의 풍조에 대한 견제를 의미한다. 현대 한국교회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와 풍조를 선전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거짓 교사들은 그것이 마치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인 양 성도들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7) 니골라당의 실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일곱 집사들 가운데 한 사람었던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Irenaeus, Tertullian 등 초기 교회 시대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언어적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니골라'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니콜라이톤'(Nikolaiton)이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와 '정복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니카오'(nikaw)의 합성어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경 민수기 22장 12절의 '발람'과 동일한 의미로서 '백성을 이긴'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이란 발람의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즉 니골라당을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로 짐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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