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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칼 빈 주 의

[스크랩] 하나님 말씀만 선포하라 (칼빈의 설교분석 )~김기홍목사님

하나님 말씀만 선포하라
명설교 분석10 - 존 칼빈 (1509~1564 )

 

김기홍 kimkh@amennews.com

 

 

칼빈은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하였다. 하나님 소리만 들려도 거의 발작증세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또한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한 이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대로 칼빈만큼 지혜로운 이는 그의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은 가히 하늘의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모든 글에 나타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강요>이다.
칼빈의 신학은 <기독교강요> 첫 부분에 명백히 드러난다. “참되고 완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부분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에 관한 지식이다. 또한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 어느 것이 더 먼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구원의 지식은 오직 성경에서 온다. 그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알게 되었고 또한 그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성경을 통해서만 안다. <기독교강요>는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원과 그 능력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출발점이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한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니 평생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간  낭비하고 멸망하는 게 인간이다.

자신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식에 비추어 자신을 보아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을 한 번 보라. 그의 율법과 위엄을 보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빛 아래 더럽고 악한 모습, 이것이 자신의 참 모습이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멋대로 살아온 자신을 본다. 자신이 당할 형벌을 어렴풋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 공포와 절망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비로운 하나님을 본다. 우리가 받을 무서운 형벌을 자기 몸에 대신 받으신 분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지식을 받게 된다. 구원하시는 분이다.

그 빛 아래 자신을 보면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자신에 관한 참된 지식이 주어진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지식은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그럴수록 삶도 새로운 힘을 얻어 거룩해져 간다.

칼빈의 이 가르침은 모든 개신교 신학의 기본이 되었다. 이 신학에서 그의 설교는 쏟아져 나온다. 그는 인간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세우고 두려움 속에 그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설교했다. 단순하고 간략하게 말했으며 화려한 문체는 피하였다.

(전략) 바울이 첫 번째로 말하는 바는 타락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유익을 주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습 1:15).

여기서 스바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의 날을 자랑하느냐? 그리스도의 재림이 너희에게 유익을 주리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날은 너희에게 큰 두려움과 놀라움의 날이 될 것이다.”
주 예수의 재림이 유익을 주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서 나타나시기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이 세상의 모든 타락에서 떠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첫 번째 요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대로 믿음은 모든 거룩함의 근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순결케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어떤 사람이건 믿음으로써 순결하게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더럽고 추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거룩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참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고 또한 그의 자녀로서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영접하자마자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악하고 헛된 것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싶어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거룩한 제물로 드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그의 영으로써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이 영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영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서 계속 세상의 악함을 따라 산다면 되겠습니까?

“태양은 받지만 그 빛은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연의 질서를 뒤엎는 말입니다. 태양에서 그 빛을 제거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에게서 공의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삶에 손해가 안 되는 한도에서만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삶 전체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실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복종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것들을 의지해 거룩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을 세속화시키거나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행동으로서 그 사실을 보여줍시다.
그러면 우리가 그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 할지라도 이 마지막 날에 우리는 그의 영광과 의를 옷 입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복된 약속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영광과 찬양을 돌립시다.

칼빈의 설교는 조용하고 느렸다. 그리고 즉석에서 즉각적으로 생각해내어 말했다. 그는 철저하게 논리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자기 신학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였다. 대부분의 설교는 준비 없이 행해졌다. 때로는 루터처럼 거칠게 설교했다.
칼빈은 설교하러 나갈 때 성경만을 가지고 나갔다. 그의 제자인 베자는 칼빈이 1년에 286편의 설교와 186회의 신학 강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 모든 설교를 써서 미리 준비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 받아 적어서 2천23편이나 남아 있다.

그토록 많은 설교를 하면서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정연한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뿐만 아니라 루터와 같은 맥을 이루어 아주 복음적인 설교였다. 그의 설교 철학은 앞에서 말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나온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강단에 서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연단에 서게 될 때 우리의 꿈과 공상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아무런 첨가 없이 충실하게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논의되지 않은 것은 강단에서도 하면 안 된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에 쓰여진 말씀들을 토대로 한 것이어야만 한다. 성경을 자기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이용하면 안 된다. 또한 성경전체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을 당당히 하나님 이름으로 행한다.
이 모든 설교철학은 분명히 그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서 나온다. 그의 한없는 지혜가 거기서 나왔다. 그의 복음 이해가 거기서 나왔다. 그리고 성경 외에는 말하지 않는 자세도 거기서 나왔다. 아니 그의 삶 전체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마쳐졌던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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