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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은 사 주 의

[스크랩]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⑨(完) 성령의 역사를 구별할 수 있는 표지 (펌)

심층기획]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⑨(完)


조나단 에드워즈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그들의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 존 윔버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 체험과 동일시하며 빈야드 운동을 건전한 개혁주의에 기초한 것처럼 위장했던 것과 같다. 신사도 운동가들 역시 자신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적인 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 죠지 휫필드,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국내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 중 한명인 홍원표 목사(Again1907 섬김이)는 ‘은사주의와 복음주의의 경계에서 바라본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글에서 “현대에 있어 ‘부흥’이라는 것은 은사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부흥”이라며 “오늘날의 영적 현상들과 너무나 비슷한 일들이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도 있었다”고 말한다. 홍 목사는 “이런 시기에 우리는 부흥의 불을 끄거나 잘못 가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에드워즈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에드워즈로 하여금 손을 들어주라고 부탁한다면 지금 은사주의자와 복음주의자 모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년대 초반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미국 교회가 극단적인 신비주의 운동으로 혼란 가운데 있을 때 은사 운동에 대한 건전한 진단과 평가를 내림으로 미국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과연 에드워즈가 양쪽 모두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지, 이 시점에서 그의 글 - ‘성령의 역사를 구별할 수 있는 표지’(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 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전정희 기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사도 시대 때는 성령의 부으심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임했다. 그러나 진짜 성령의 역사가 풍성했던 만큼 가짜 역사도 많았다. 마귀가 성령의 평범한 역사나 특이한 역사를 모두 다 흉내 내느라 몹시 분주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과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규칙 - 분명히 구분이 되는 표지 - 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요한일서 4장은 바로 이 규칙을 제시하기 위해 씌여진 것으로 성경의 다른 어느 곳보다 더 분명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비상한 때에 우리는 이 원리들을 조심스럽게 적용해야만 할 것이다.

근거가 희박한 논쟁

먼저, 어떤 것이 성령의 사역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때 믿을 만한 증거로 내세울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 일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1.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일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성경적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한, 그 일이 아주 특이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교회가 해왔던 방식’에 근거해서 어떤 일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성경에 나와 있는 예언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한하시지 않는 부분에서 그분을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강렬하다”

어떤 역사로 인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떨거나, 신음 소리를 내거나,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몸을 뒤틀며 비통해 하거나, 몸이 아예 넘어간다고 해서 그것만 보고 그 역사를 정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이런 것들에 대한 규칙을 주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몸에 이런 현상들을 일으킨다고 해서(물론 이것은 참 성령의 표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만 보고 그들이 성령의 영향 아래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한편 이런 외적 모습만 보고 그들이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어서도 안 된다.

복음의 진리가 제대로 전달되면 강렬한 반응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즉, 몸의 힘이 빠진다든가, 몸을 뒤틀며 비통해 한다든가, 심지어 큰 소리로 울부짖는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지옥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지옥의 비참함이 너무 무섭고 그곳에서 영원토록 지낸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영원히 상실될 위험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면, 그는 자신의 그 연약한 몸으로는 그 비참함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영혼 속에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드러내게 되면 인간의 힘이 쭉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다소의 사울과 빌립보 감옥 간수는 둘 다 정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떨었다.

3.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이 기독교에 대해 많은 잡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그 사실만 가지고 그것은 정당치 못한 일이라고 쟁론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진정한 기독교는 절대 바리새인들이 한 것처럼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공동체 내에 아무런 소요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회생과 부흥을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감동하거나 동요되었다는 이유만 가지고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적이며 영원한 일들은 너무 크고 무한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받을 때 어느 정도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기억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사도들을 보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행 17:6).

4.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이 너무 지나치다고 해서 그 일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쟁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 상상하지 않고는 비가시적인 일들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마음과 애정(affections)이 더 많이 관여하면 할수록 그 상상도 더 강렬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진리를 처음으로 마음에 명상하며 감정적으로 음미할 때 특히 더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기절한다고 하자. 또 회심하면서 그 끔찍하던 두려움이 즉시 극도의 기쁨으로 변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상상에서 오는 것과 지적이며 영적인 것 사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다. 많은 사람들은 상상에서 오는 것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체험에 대해 간증할 때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이 많다.

5.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한다”

어떤 일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 일은 성령으로부터 온 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실 때 여러 가지 방편들을 다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특정한 수단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 일에는 하나님이 관여하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본보기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영적 방법이며 동시에 합리적 방법이다.

6.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박하고 변칙적 행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일이 성령으로부터 온 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가운데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박하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따라서 만일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명은 되지 못한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바울이 일일이 다 고쳐 주어야만 했던 고린도 교회, 그 교회는 성령께서 참으로 역사하신 신약의 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인간적 경솔함이 얼마나 많이 수반되었었는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뜨뜻미지근한 것은 아주 혐오스러운 것이고 열심은 정말 훌륭한 은혜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미덕 중에서 이 열심이라는 미덕을 엄격히 지켜보고 조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열심을 조심하지 않으면 그 안에 부패-그리고 특히 교만과 인간적 열정-가 혼합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7. “사람들이 미혹을 받는다”

어떤 일을 잘못 판단한다든가 심지어 사탄의 속임수들이 한데 섞여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 전체가 다 성령에 의해 행해진 일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무오하게 인도하실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다. 현시대나 다른 시대에 살았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주관적 충동이나 인상을 그것이 마치 장래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 위해, 혹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계시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너무 큰 비중을 둠으로써 미혹을 당한다.

8.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고 있다”

만일 ‘회심했다는 사람들’이 엄청난 오류 가운데 빠지거나 창피한 일을 행한다고 해서 그 일이 전반적으로 성령의 일이 아니었다고 쟁론할 수는 없다.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어떤 역사가 진짜가 아니라는 증명은 될 수 없다. 이런 일들은 개혁의 때에 항상 있게 마련이다. 사도 시대만 해도 이런 종류의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이단에 빠졌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형편없이 악한 일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때 성령의 역사로 회심한 사람들이요 한동안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까지 용납되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일에 마귀가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의 참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9. “그 설교자들은 심판에 대해 너무 강조 한다”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에 대해 너무 많이 강조한다고 해서 그 일이 곧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쟁론해서는 안 된다. 만일 지옥의 고통이 정말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정죄에 빠지거나 그것에 대해 무감각해질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목사들이 그 끔찍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들이 그 진리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오직 하나님의 율법만을 설교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복음도 설교되어야 한다. 사실 율법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전파되어야 한다. 사역자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다. 율법에 대한 강조 없이 복음만 설교하게 되면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참 성령의 사역임을 증거 하는 성경적 징표

지금까지 나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결론짓기에는 충분치 못한 증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성경적 표지들에 대해 말해 보겠다. 이 문제에 대해 요한일서 4장만큼 분명하고 충분하게 언급된 곳이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1. 그것은 참 그리스도를 높인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분이신 참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높이 평가하도록 만든다면,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진리를 믿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실한 징표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면, 그것이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시어 역사 속에 실제로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게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면, 그것이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구세주시요 그들에게는 그분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계시한다면, 그것이 그들 마음 가운데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그리스도에 대해 고상하게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심어 준다면,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그 역사가 틀림없이 참 성령의 역사임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징표이다. 물론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의 확신이나 애정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을 반영 하는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이와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참 성령의 역사라는 징표이다.

가령 퀘이커교도들이 높이는 ‘내적 빛’과 같은 신비하고 환상적인 그리스도일 수 없다. 이처럼 자기들 상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높이 평가하지도 또 그분을 의지하지도 않게 된다. 오직 참 성령만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고 간증한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지독하게 증오한다. 특히 인간의 구세주로서의 그분의 직임을 증오한다. 그는 절대 이 진리들을 강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드는 성령은 그분에 대해 이처럼 지독한 증오심을 갖고 있는 뱀의 영이 아니다.

2. 그것은 사탄의 관심사에 반대한다

역사하고 있는 영이 사탄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 죄, 세상적 정욕에 대항한다면, 이것은 그 영이 참 영이요 거짓 영이 아니라는 확실한 징표이다. 여기 분명한 대립이 있다. 요한 사도는 반대되는 두 영, 즉 참 영과 거짓 영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다. 그 차이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하여 세상을 이긴 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에 속해서 이 세상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 사도는 마귀를 가리켜 ‘세상에 속한 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도가 ‘세상’이라든가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음과 같은 사도 자신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죄의 관심을 끄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은 또 인간의 타락성과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모든 대상 및 행위들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성과 정욕 자체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사도가 한 말로 미루어 볼 때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쾌락이나 이득 또는 명예를 높이 평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마음이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않도록 돌이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영원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을 갖게 하고 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열심히 구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그들로 하여금 죄의 끔찍함과 그 죄로 인해 생기는 죄책, 그리고 죄로 인해 당하게 될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영의 사역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그것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지적해 준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들며 하나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자라가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령의 사역이다. 마귀는 절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심어 주지 않는다. 미혹의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지시를 구하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사 8:20)라는 부르짖음은 절대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를 전혀 즐겨하지 않는 악한 영들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반대로 악한 영들의 미혹을 색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거짓 영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들 마음속에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높이 생각하는 마음을 심어 주겠는가? 어둠의 주관자가 자신의 흑암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태양빛으로 인도하겠는가? 마귀는 지금까지 항상 거룩한 책인 성경에 대해 죽도록 미운 증오심을 보이며 앙심을 품어 왔다. 따라서 마귀는 성경을 반대하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말씀을 증오한다. 그러니 우리는 마귀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을 높이 평가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4. 그것은 진리를 높인다

영들을 분별하는 또 다른 규칙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며 그들로 하여금 참된 일을 깨닫게 하며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는 것은 무엇이든 참되고 바른 영이라고 믿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역사하고 있는 영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복음의 핵심 진리들,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요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라는 것, 인생을 짧고 아주 불확실 하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자신들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동안 산 것에 대해 하나님과 계산해야 한다는 것, 자신들은 본질상으로나 실제로나 지독하게 악하다는 것, 자신들은 전혀 무력하다는 것 등에 대해 전보다 더 잘 개닫게 한다면, 그 영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참되게 드러내며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

5. 그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초래한다

만일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확실한 징표이다. 사도 요한은 참 성령에 대해 주고 있는 이 마지막 표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표지들과 비교해 볼 때, 이 표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또 훨씬 더 많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영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완전함에 대하여 높이 생각하도록 만든다면, 만일 그 영이 그들로 하여금 만민 중에 으뜸이요 가장 사랑스러운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해 감탄하고 기뻐하게 만든다면, 만일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깨닫게 하여 그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임에 틀림없다.

미혹의 영에 인도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짜 사랑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아주 열광적으로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도 자기애로부터 우러나오는 연합과 애정이 있다. 이런 일치와 애정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의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그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문제들에 대해 자기들끼리만 동의함으로써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게 한 그 이상한 것들을 더욱더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이처럼 고대 영지주의자들과 종교 개혁 초기에 나타난 광신자들은 자기들이 서로 굉장히 사랑한다고 자랑했다. 그 중 한 종파는 자신들을 가리켜 특별히 ‘사랑의 가족’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방금 설명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자연적인 자기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가짜 사랑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참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랑은 그 안에 겸손이라는 기독교 미덕이 빛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을 부인하고 소멸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고전 13:4~5).

결론

사도 요한이 제시해 준 이 표지들만 가지고도 거짓 영과 진리의 영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역사를 가리켜 그것이 변칙적이라느니 이상하다느니 오류가 있다느니 일부 신앙고백자들이 미혹을 받았다느니 스캔들이 있다느니 하며 반대할 때도 그 반대를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표지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13~14에서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이 표지들이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서 역사하는 거짓 영과 참 성령을 구분하는 데 충분치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표지로 영을 분별할 수 있다.

아무튼 사도 요한이 이 표지들을 우리에게 준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들을 테스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 규칙에 따라 영들을 테스트하라. 그러면 당신은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교활하게 가장하고 있을 때조차도 거짓 영과 참 진리의 영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존 맥아더의 <무모한 신앙과 영적 분별력/ 생명의 말씀사 발행> pp.317~335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2006년 07월 10일/ 교회와 신앙 / 전정희 기자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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