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진리 안에서 사랑(요한1서 파노라마)
노우호: 오늘은 요한 1서로 들어갑니다 요한1서는 잘 아시는 대로 사랑의 말로 가득차있는 서신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일컫기도 하고
요한1서를 사랑의 서신이라도 합니다 요한사도는 연세가 90세가 넘어서 이 서신을 쓰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다보니까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잘 모르고 있고 요한복음은 많이 읽고 알지만 요한1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1서는 참으로 중요한 서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혼자의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이므로 관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시작이 되고 (서로의 신뢰가 구축되어야만 관계가 시작됨) 그 관계가 지속되려면 소망이 있어야지요?
관계가 꾸준히 지속되려면 믿고 바라는 것이 있어야지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으면 그 관계는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함께 소망!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서로 바라보는 소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일을 바라보는 소망은 아주 중요하죠? 그러나 소망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역시 관계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따서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교제를 회복시키는 것은 “믿음”이고 관계를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부터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어디를 바라보고 달려왔느냐 하면 요한1서의 사랑의 교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완전히 회복되는 바로 여기를 보고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그래서 요한1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군요?
노우호: 그렇죠.
만약 교회나 가정이나 천국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라 할 수 없고 가정이라 할 수 없고 천국도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우리가 천국에 갈 필요가 없지요 따라서 가정과 교회와 천국은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또 천국을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고 서로 사랑하는 곳이므로 천국을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요한1서는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덕목인 사랑이 소개되는 곳으로 사랑의 교제를 2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사람과의 교제도 사랑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형제의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것이죠 바울도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의미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요한1서를 읽으면서 성도들이 한번 체크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란 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그야말로 온통 사랑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고 영원히 사랑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천국을 만들었다는 말씀을 말라기 공부하면서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다하고 온 세계 만국방언을 모두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과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고 또 모든 지식과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교만의 재료 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의 신학은 신학 중에 최고의 신학! “사랑의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루터라든지 바울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믿음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굉장한(혁명적인)진리였죠 하지만 그것으로 신학이 끝난다고 하면 이상한 신학이 되겠죠? 이런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 소망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정말 살아있는 참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고 베드로는 소망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에 근거한 진짜 산 소망!) 그리고 요한은 다시 이것을 마무리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신앙생활의 뿌리가 믿음이라고 한다면 줄기는 소망이 될 것이고 꽃은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향기가 있는 것이고 거기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의 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줄기가 없다면 꽃도 열매도 맺을 수 없지요? 반드시 줄기가 자라나서 소망을 가지고 위로 끊임없이 뻗어나서 사랑이 꽃을 피울 때 그곳에 향기가 있고 벌과 나비가 날아와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랑은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쓸 때쯤에는 그의 신학은 정점에 이르게 되었고 훗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사도요한이 에베소에 시무할 때 3사람의 특별한 제자가 있었는데 안티옥의 감독이 된 유명한 이그나티우스가 있고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된 파피아스가 있고 서머나교회의 감독인 폴리캄(순교하게 됨)이 있습니다
김성윤: 이들이 모두 요한의 제자들이군요
노우호: 예,
요한의 직계제자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사랑으로 잘 길렀기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의 큰 업적을 남기는 인물들이 되었고 폴리캅이 시무했던 서머나교회는 아직도 든든히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이슬람국가이지만) 예배당도 아주 보석같이 꾸며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처음에 위대한 사도들이 시무했던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개척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봉사했고 디모데 누가 요한이 섬겼던 에베소 교회) 계시록에 가면 예수님의 책망을 듣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듣게 됨) 결국 사랑 없는 교회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이 충만한 교회여야 됩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 충만,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데
진정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인간관계의 바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렇게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교회만 이단과 사이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식어버리게 되면 금방 이단과 사이이비가 들어와서 영혼을 낚아채어가는 것을 봅니다
만약 음식이 차거나 덥게 되면 곰팡이가 서식하지 못하지만 차지도 덥지도 않아 미지근하면 곰팡이 서식하게 되고 식중독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진리에 대하여는 냉철함이 있어야 되겠고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교회야말로 계속 진리와 사랑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에 감히 어떤 이단 사이비도 접근 할 수 없겠죠
사도요한은 사랑이 있는 교회 믿음과 소망을 가진 참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이면서 이웃을 사랑하되 정말 제 몸같이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까지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요한1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단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기에 야고보서까지 가지 못하고 베드로 전서까지도 가지 못하고 요한1서까지도 가지 못하고 언제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만 머물거나 세상 복만 추구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이나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본다면 감히 교만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의 최고 경지가 사랑의 경지라는 것을 베드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하되
형제우애뿐 아니고 이웃사랑을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까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만약 요한1서가 지시하는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고 아주 이기적인데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한 사람의 분량은 요한1서에 제시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을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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