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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고침받는걸 두려워하지말자.....

마태복음 13장 15절~16절 말씀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했으며  요즘 나오는 드라마의 줄거리안에 등장하는 악인은 그 죄로 인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고 결국 멸망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두려움때문에 더 거짓말을 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내어 쫓고 죄를 끊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회개한다는것은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곧 거짓의 길에서 돌이켜 바른길로 돌아오는것이 죄를 끊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 길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침을 받는것이 두렵지만 그 두려움은 복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선하시니  하나님을 보는 인간은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앞에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을수 밖에 없었고 심판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셨으니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구원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법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셨으니.....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의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침받는것을 두려워합니다.  

 

고침받는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를 깨닫게되고  고침받는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죄를 져도 책망이 없고  악을 행해도  마음의 부담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말씀을 바로 뺏앗아 가기 때문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달아도  회개할 줄 모르고  돌이킬줄 모르고 더더욱 완악해지는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종이며 죄로 인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알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죄업다고 하고 의롭다고 말합니다. 저주받은 인간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귀를 막지 않고 눈을 가리지 않았음으로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고침받기를 기뻐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 하나님의 백성은  죄 아래 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은  죄의 권세아래있던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성령님으로 새롭게 중생했기 때문입니다.  죽은자는 죄를 깨닫지 못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열풍이 불고 있는  알파코스의 성령사역중에 하나인  금이빨/넘어뜨림 기적을 추구하는게 무슨 죄냐며 항변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이 이렇게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성령님이 금이빨로 변화시켜줄수 있는것이고 넘어뜨려서 치유하게 할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되면  좋은거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죄가 아닐까요?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드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시키고 하나님을  망령된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죄이며  하나님의 존귀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되는것입니다.  이 죄를 깨달았을때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야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리로 돌아와 야합니다.  이것이 죄라는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죄임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합니다.  그리고 돌이켜야합니다.  

 

위 본문 말씀은  씨뿌리는 비유 중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뿌려서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구원이 없는 자들은  말씀을 깨달을수 없습니다. 사단이 뺏아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하나님을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말씀을 들어 깨달은것 같은데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못해 세상으로 나가버린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않고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오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고  깨달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세상을 이기고  환란과 핍박이 올때 그 환란과 피박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하는 자들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열매는 전도가 아닙니다.  이 비유를 전도에 많이 비유하는데 전도가 아닙니다.  말씀을 뿌리는것이 전도이고 열매는 내가 맺는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고 바로 깨달은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내 밭이 좋아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바로 깨닫게된것입니다.

 

좋은 밭에 뿌리운 씨앗도  비바람이 치고 뜨거운 태양이 있고  가라지의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가라지가 자라지 못하게 방해를 해도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백성은 그 주변에 가라지들이 많아도 구원을 얻습니다. 가라지와 알곡의 구분은 농부가 마지막날 타작마당에서 구별할것입니다.  알곡이 그것을 구별할 이유는 없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는자들에게도 환란이 옵니다.  환란은 시험입니다. 믿지 않는자들은 환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만  믿는자들은 환란을 견디어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환란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환란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환란이 왔는데  그 환란을 이기지 못해 세상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니  내 삶이 바뀌는 것이 싫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도 안됩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하나님이 환란중에 그를 이기도록 함께 하십니다.

 

환란은 우리가 거처야하는 시험이고 이 시험을 통과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상급을 허락하십니다.  믿는자들에게는  시험이 항상 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믿는자들은 늘 깨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며  그것이 또한 행복임을 깨달아야할것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다 통과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을때 하나님은 그 합당한 뜻에 따라 그 일꾼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은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인내로 견디어야하며  그 인내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는것입니다.  오직 구원자는 하나님이심을 깨닫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고백을 듣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환란중에 있습니까?  주님을 찾으시고 부르십시요.  주님이 응답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그 아들을 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기쁨으로 시험을 통과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마땅히 담당하지 못할만큼의 환란을 주시지 않습니다.   큰 시험은 그 만큼 하나님이 믿음을 크게 보셨으니 시험을 잘 치루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외로와질수도 있습니다.  그 외로움을 견디어야 하고 그 손가락질을 이겨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사업이 망했거나,  시험에 떨어졌거나,  애인과 헤어지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거나......기독교인이 �는데  형편이 전보다 못해졌을때...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란이 될수 있습니다.   그일로 인해서  손가락질을 당할수 있고 그 일로 인해서  외로와질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이 왔을때  믿는자들은  "하나님 왜 저를 이자리로 이끄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환란은 영광의 자리로 가게하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시험을 잘 치루는것이 바로 신자의 마땅이 행할 바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은  기쁨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뒤에 허탈함이 있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안에서 쏟아난는 생수가 되어 늘 갈증을 느끼지 않으며 기쁨으로 살수 있게 하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보상하실것입니다.  상급을 허락하실것입니다.  "참잘했습니다"라고 말씀해주실것입니다.  우리의 보상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것이 우리의 보상일까요.....아니죠....

우리의 보상은 하늘에 있습니다.  영원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길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평안하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까지 자라는것입니다.  우리의 자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하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무겁지 않습니다. 가볍습니다. 기쁩니다.  주님이 주신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줬더니 인간은 귀를 막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여줬더니 인간은 눈을 감아버립니다.  왜요?  왜 귀를 막고 왜 눈을  감는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에 찔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을 끄집어 내기 때문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돌이키는 것은 힘든것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것입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자기가 더러운 죄인이라는것을 발견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립니다. 왜요?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는것은 두려움입니다.  주님앞에 회개하는것은 두려움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더러운것을 드러내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두려움입니다.  복받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을 통해 고침을 받는 것은 기쁨입니다.  참된 복을 얻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축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봄으로서,  들음으로서 복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은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닙니다.  환란중에서 인내함으로 얻는 소망의 복입니다.  그 복을 바라보고 환란을 이겨내고 인내할때 하나님은 복을 허락하십니다. 

 

죄를 끊고  회개하고  주님의 길로  돌이켰을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이길로 갈수 있도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합니다.  이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사랑하고 죄의 길로 가려고만 하지 의로운 길로 갈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해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길로 갈수 있습니다. 그길은 좁은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주님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봤습니다. 봤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복을 이스라엘 백성이 얻지 못함으로 우리 이방인들이 그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복을  두렵다고 차버리면 안됩니다.  그 복된 말씀으로 인해  삶이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기쁨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 축복은 영원한 삶입니다.  짧은 이 세상에서 얻는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축복입니다.  이 상급을 얻기위해  환란과 유혹을 이겨내고  열매를 맺어 추수할때에  주인을 기쁘게하는  아름다운 성도님들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주님의 고치심의 은혜가  저주받아 심판받을 백성의 자리에서  의의 백성의 자리로  옮겨지게됨을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복되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축복이고  평강이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매일같이 누리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