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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거할수 있느냐??

평안님은 구원얻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평안님은 모든것이 궁금한겁니다.  무엇이 궁금하나면 하나님이 어떤분인지가 궁금한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는것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때는 이제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될것입니다.  제가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 경지가 있고 질문을 할수 밖에 없는 경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경륜입니다.

 

아들을 낳을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경지가 있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경지가 있는것입니다.   자기는 속이는 자라고  슬퍼하는 때가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는 분임을 알고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경지가 있습니다.   자기가 꿈꾸는 꿈에 대해서 이해할 못할때가 있지만 그 꿈을 꾸고나서  꿈에 대해서 이해할때 그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경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의심이 있을때가 있으면 그 의문을 해결할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저지를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죄를 안짓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경지가 있는것입니다.   간음을 �찮다고 말하는 경지는 없습니다.  간음이 죄악임을 깨닫고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는 경지가 있습니다.

 

에어컨 장목사님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한 백성이라면  그가 에어컨에 매달렸다가 7층에서 떨어져 죽었을때 그분이 어떤 죄를 지질렀어도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죄로 인한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기억되지지 않고  오로지 의로운일만 기억된다는 말씀을 드리는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평안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그 구원이  떠날수 없습니다.   그 구원이 내손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자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단들이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이 우리교회에 있다.  구원이  우리 교주의 손에 있다  구원이  당신의 선택에 있다고 말하는것은  이단들이 하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희게하지 못하는 인간은  저주받은 인간들입니다. 스스로 구원얻을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구원얻기 위해 노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는 종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내어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왜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것입니다.  처음엔 그렇게 허락하심아래서 안심하고 신앙생활을 할수 있게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자라고 자랄수록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내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걸 알게되고 이해하게되고 믿게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었다....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고...이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저주받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는것입니다.  엎어진 우리를 일으키시는것입니다.  저주받은 우리에게 기쁨을 허락하시는것입니다.  그 허락하시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구원얻은 백성이 하나 생기면 천국이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었다고.....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대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죄에대해서  우리는 이미  벗어난 자들입니다.  지금은 연약한 신앙인일때는 죄를 지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죄송한마음이 들고  하나님앞에 죄악을 깨닫지 못할때는 아무렇게나 살지만  다윗처럼 나단선지자의 꾸중을 듣고 죄를 깨닫게 될때는  회개하는 일이 벌어지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그냥 살게두지 않으십니다.  하늘의 새와  들의 풀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죄악중에 거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저지른 자를 책망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 징계하십니다.

 

에어컨 장목사님은  징계를 받아 죽었습니다.  아마 에어컨 장목사님이 죄를 저질렀을때  그가 더 잘되었다면 아마  구원얻지 못한 백성일수도 있습니다.  죄를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일없이 더 잘되고 교회가 더 부흥하고 더 떵떵거리고 잘살고  인정받고 살았다면 그는 저주받은 자일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게 하실것이고  그리고 책망하실것이고 벌주실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역활입니다.  에어컨 장목사님이 떨어지기전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을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가기전에 그는 아버지를 불렀을 것입니다.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매달려있는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구원얻을 백성이었다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우리에게 경종이 되게 하신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지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중에 거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자고 죄악에 거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죄에대해서 죽고 의에대해서 산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죄악을 저지를수 없는  사람들이 된것입니다. 

 

죄를 저지르면 마음이 무겁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는자들의 증표입니다. 죄를 져도 도적질을해도 미워하고 싫어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마음에 무거운것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는 죄짓는게 좋아라고 생각하고 지옥에 가는걸 그냥 당연히 여겨야할까요?

 

아닙니다.  마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을 붙잡고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놓치면 안되는것입니다.  은혜배푸는 이는 하나님이고  용서받지 못할 백성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은혜배풀기를 간청하면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이 모른체하시겠습니까?  안하기때문에 하나님이  돌아보지 않는것입니다. 

 

죄악중에 거할때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것처럼 느껴질때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실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비유하나하고 글을 맺겠습니다. 

도적질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도적질을 당한 사람앞에가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용서를 구하면 그걸로 용서를 받은것입니까?   용서를 구할때  용서하는 입장에선 사람이  용서했다고 확증해야 용서를 받은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얻을수 없다는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죄의 용서를 구한다고  용서가 된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로서 용서해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야 구원받을수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별 행위를 다하고 별짓을 다해도 용서하는 분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받을수 없는것입니다.   수천억을 갖다바쳐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하는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받을수 없는것입니다.

 

오직 용서는  용서할분이 용서해야 용서를 받은것입니다.  곧  우리가 구원받은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지...용서받기위해서 물질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용서하는 입장에서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이 베풀어준 은혜 곧  죄에대한 용서를 받아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되고  그 피가 나를 깨끗게 했다는 그 확증에 설때.....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확증과 은혜를 받았을때 우리는 그 용서아래서 자유롭게 살게되는것입니다.

 

용서한 사람에게 또다시 죄를 짓는다는것은  불경한 짓입니다.  용서를 받은만큼  정직하고 바르고 진실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또 지을지라도 70번씩 7번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회개하시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결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추신)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신하를 기억하십시요.  용서받은 증거를 확인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임금님앞에가서  일만달란트의 빚을 값을길이 없다고 했을때 임금님이 그 빚을 탕감했음을 기억해야할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자기 종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값을길이 없다고 했을때  그의 모든 자녀와 재산을 다 거두어서라도 받을려구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그 용서함을 포기하고  다시 일만달란트를  갚으라고 명령했던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값지못할 빚을 탕감받은 신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를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용서받은 자의 행동일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행동입니다. 

 

곧 행위가 우선이냐 구원이 우선이냐를 말할때 빚을 탕감받는것이 우선이지  우리의 행위가 우선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의 빚을 탕감하지 않는 그 신하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일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죄를 고하면  언제나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것은  빚을 탕감받은 백성의 삶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