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
롬 16:1-2 / 1995.12.10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기를 소원하고 있지만 지금 그런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5장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야 했습니다. 그 일이 예루살렘교회에 선교보고와 구제하는 일로 이방교회가 헌금한것을 가지고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것입니다.
28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연약함과 신자된 어린 수준을 이해하고 자기가 방문하기 전까지 저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뵈뵈를 저희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뵈뵈는 여자집사였습니다. 물론 이 뵈뵈가 바울의 역활을 감당할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믿음과 신앙이 일천하기 때문에 누군가 도움이 될만한 자를 보내야 할 필요를 바울이 느낀걸로 압니다.
2절에...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주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하는 것입니다. 뵈뵈는 지도자로서 충분한 실력과 권위를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다. 로마교회가 그를 통하여 받아야하는 유익과 함께 협력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소홀하거나 실수할까봐 성도들의 함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명령을 덧붙인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모든 교회 성도들이 분명히 해야할 문제입니다. 실제적인 교회안에 필요한 문제인지 알고 그 문제를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성도님들이 격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느냐 못만나느냐는것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좋은지도자를 만난다는 자체에 함정이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란 성도가 가만히 있어도 모든것을 대신하고
그를 우러러 보기만해도 은혜가 되는 그런 사람을 지도자라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그런 지도자를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현실적인 문제는 약점을 가지고 부족한 지도자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있습니다. 공부잘하는 아이는 서울대 보내고 공부못하는 아이는 신학대에 보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혹은 성도들을 위하여 종을 세울때에 그 종이 가지는 개인적인 재능과 탁월한 부분때문에 그를 쓰느것이 아니라는것을 아셔야 할것입니다.
출3장에 가시면 모세의 소명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억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3장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는 그 스스로가 지도자의 자격과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갈수 있는 유일한 근거와 조건은 12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종 영적인 지도자들은 다 그가 가진 탁월함 때문에 직분을 수여받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썼다는 이유때문에 권위를 갖습니다. 그 권위는 본인의 실력과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으로 권위를 갖습니다.
원님태운 당나귀입니다. 서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님이 없으면 그 당나귀는 잡아먹어도 되는것이니다. 교회안에서 오해가 있는데 목사들에게 오해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에게 잘하는것이 목자에게 잘하느것과 같다. 목자에게 잘하는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다.
그말이 맞을수 있죠 그 목사가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되며 사심이 없으며 똑바로 일하고 있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때느 그 목자의 말을 따른다는 차원에서 일치할 때는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쫓아야 합니다. 가차없이 내쫓아야 합니다. 목사가 벌써 올바른 종노릇을 안하면 당나귀가 원님안태우고 혼자 놀러 다니면 잡아먹어야합니다. 당나귀도 잡아먹나? 그건 아무 쓸데 없는 것입니다. 서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원님안태운 당나귀도 당나귀만 보면 절하니까 당나귀가 이상해진것이고 원님태울생각을 안하는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고 하나님을 명령을 수행하는것 이외에는 자신이 가진 권위와 지위가 개인적 차원에서 쓸모가 없다는것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여호수아 1장에 가시면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에 대한 부름의 장면이 나옵니다.
1장 5절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여호수아는 소심했던것같습니다. 여리고 쩔쩔 맸던것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이렇게 까지 권면했던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것이 아니냐.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것과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어느것으로도 모세와 여호수아 영적인 지도자들은 자기 일을 수행할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것이 아닙니다.
왜 이문제를 깊이 다루어야 하냐면 우리가 영적인 지도자에게 구하는것이 무엇이냐면...모든 문제에 탁월하며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요구를 해요. 개인적으로 그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면..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으면 우리의 실망이나 갈등이 없도록 완벽한 자를 세워달라면 안됩니까? 하는 요구를 성도님들이 하는것입니다.
그 요구의 이면에 뭐가 있나면 여러분은 가만히 있겠다는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내 가려움을 긁어주고 내가 할것 다하고 내가 딴생각 안나게 해달라는 도둑놈 배짱으로 그러는거에요. 도둑놈 배짱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훌륭한 생각으로 목사가 훌륭하기를 바라는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가만히 있고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것이에요. 자기가 할 책임은 다 놓고 훌륭한 목사라는 이름하나로 모든것을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일들을 떠넘길려는 도둑놈 배짱이라구요.
하나님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세우냐면 못난사람을 세우는데 왜 그런가하면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그것이 무슨 뜻이죠 그가 하는 일과 그가하는 말이 그가 하는 뜻이 인간의 생각과 능력이 기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전달받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것으로 확인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못난 사람을 세우느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가하는 말과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말씀이요 받아온 말씀이여 그가 하는일이 그를 통해서 하는 일이라는것이 부곽되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쓰신다는것이 확인한다느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며 하나님께 시선이 고정되는것이 하나님의 종들의역활이지 그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것을 증명받는것이 본인들의 역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은 미련한자 약하고 천한자를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지도자를 그가 나와 다르다와가 아니라
맡은 역활이 다르다는것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가 하나님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인정해야지 그가 남다르다고 인정하는것은 그가 남다르다고 인정하기 시작하면 서로 시험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며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완벽한자를 세우기 원하는 그 소원의 배경에는 신앙의 더큰 격려와 모범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짐을 떠넘기려는 도둑놈 뱃심이 그속에 숨이 있다느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것입니다.
이 도둑놈 배짱은 확대하면 어디까지 가냐면 목사 하나만을 욕심을 내는거싱 아니라 교회가 그러기를 바래요 우리가 몸담고 사는 내가 소속된 교회가 교회가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소속된 교회가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있는 교우들에게만 불만이 나가는것이 아니라 이 교회를 세운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배려와 간섭에 까지 나갑니다.
어떻게요.
왜 우리교회는 이런것이 안될까.. 사랑이 없을까? 봉사가 없을가? 유명한 사람이 없을가? 기도에 힘이 없을가? 왜 하나님은 교회를 다른 집단보다 더 거룩하며 이상적이며 아름답게 허락하지 않으며 이상하게 다른 모임보다 더 하게 교회를 방치하실까요?
왜 그러실까요? 교회안에는 다른데에는 없는 아름다움과 선한것이 거룩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치사하고 말이 많고 시비걸고 삐쭉거리고 더 엉망인것을 많이 보게됩니다.
왜그렇습니까?
쉽게 인간들이 모인것이라서 그렇지 답이 부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여져서 모여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척 내놓는것을 위하여 교회를허락한것이 아닙니다. 교회보고 뭘 하라고 교회를 만드신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여 우리가 완벽한 힘이 커져서 큰 일을 하도록 목적하여서 교회를 세운것이 아니라. 몬난것들이 모여서 여기와서 여기서 시행착오가 있고 시험이 있고 싸움과 다툼이 있고 그안에서 다툼과 갈등속에서 완벽해지기를 바라는것입니다.
여기는 실험실이요 도장이요 교실이지 완벽한자의 어떤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완벽한 교회라는 이름이 갖는 아름다움과 명예를 치장하고 싶은 도둑놈 배짱의 연장인 것입니다. 나는 어느교회 다닙니다. 이렇게 얘기함으로서 목사님도 멋이쏙 교회도 멋이쏙 누구 이러는것을 바라지 그 속에서 비비고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그 속에서 본인이 크고 상대방이 크고 상대방이 크도록 양보하고 한숨쉬고 쌍 계속 나가 말아 그런 갈등을 겪는것을 여러분이 싫어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우리의 완성에 대한 성경의 내용이 있습니다.
15장 1절....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너희도 서로 받으라..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어떠냐 하는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어떠냐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가는 일에 개인이 맡은 몫을 다하느냐 못하느냐 이렇게 묻는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인의 경쟁차원에서 너 신앙생활 잘하느냐 잘났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 잘난것이 전체의 유익과 전체의 발전을 위하여 네 맡은것을 잘하느냐 묻는것입니다. 교회안에 사랑이 없습니까? 교회안에 무슨 기도가 부족합니까? 뭐가 부족합니까? 나는 안그런데 너희는 왜 그러냐가 아니라 그곳에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전체 어떤 유익 발전의 역활에 감수함에 그 사람의 잘남이 있는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가 뭡니까? 짐을 서로 지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뭔데요 그리스도가 머리가되사 우리르 몸으로 부르신 그 법 그리스도의 장성한데 충만하데 까지 우리를 요구하시는 그 일을 위하여 서로 짐을 나눠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개인과 개인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묻는 책임이 그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전체속에서 감당하여 전체를 진전시켰느냐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구요. 6장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자들을 바로잡으라. 이것이 짐을 나눠 지는 것입니다.
이 바로잡으라는 것은 틀린곳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고장난 곳을 고치라는 것이다. 팔이 뿌러지면 부러진 팔을 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뼈를 맞추고 기부스를 해서 목에다가 거는 것입니다. 다친건 팔이 다쳤는데 고생은 목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은 그걸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왜요?
팔을 고쳐서 그 팔이 자기 역활을 해야 목이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두팔이 다 짤리면 문을 어떻게 열거에요. 목이 팔다친것을 자기 목에 건다고 억울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짐을 져야하는 이유입니다. 전체를 보는 눈입니다. 이것없이 팔뿌려�을때 나는 뿌러졌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6장 3절에.......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자기의 정직이 자기의 충성이 자기의 거룩함이 자기의 잘남이 나 고장안났다로 그치면 안됩니다. 내가 고장안나고 내가 옳으면 다가 아니라가 아니라 전체에 어떤 몫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잘났다 못났다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성도들의 신앙의 오해가 이겁니다. 우리교회 기도가 없어 사랑이 없어 약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예리한 사람으로 알아요.
비평을 하는것이 지적이고 높은걸로 생각하는건 아니에요. 빨리 덮어야 되요. 빨리 고쳐야 되요 네덜란드 소년이 되어야 회요. 뚝에 구멍이 났으면 먼저 본놈이 주먹으로 막으라고요. 그것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뚝에 구멍이 났어요. 뚝에 구멍이 났어요. 뚝에 구멍이 났어요. 세번만 말하고 추워서 들어갈거에요. 나는 나할일 다했어요. 뚝이 터져서 물바다가 되서 돌아가셨다. 무의미한것이에요. 비평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입니다.
기찻길에서 어린애가 놀다가 참사가 났어요. 어머니가 그러잖아요 내가 거기가서 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럼 다 한거에요? 거기가서 놀지말라고 하면 다한거에요? 자기 몫을 다한거에요? 아니요.
교회라는 곳이 왜 부족하게 모자라게 허락되었는가 이 일들을 서로 만들어가고 채워감으로서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받는것으로 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주면서 크고 배우는것이 받으면서 크며 배우는것보다 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것을 주셨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줄로 알고 각자가 맡은 짐을 지시고 이웃의 짐 교우의 짐 나눠지는 십자가의 정신을 가질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통하여 큰일을 할겁니다.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었느냐 영적으로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 그거 아닙니다. 각자가 맡은 일을 얼마나 잘했느냐입니다.
목사와 선교사가 더 뛰어난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자가 감춰진 상태로 일을 해야합니다. 달리기를 잘하느것이 다리가 튼튼한데 있지 않고 심폐기능이 강함에 있듯이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누구와 비교할수 없는 각자의 맡은 독특한 자랑스러운 책임이 있고 특권이 있는줄 알아야 합니다.
4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전체속에서 내가 진 짐이요. 그 짐의 책임의 특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이 내짐을 다져주기를 바라지 마시고 내가 진짐의 큰 몫을 크게 소리치지 마시고 개인경쟁하지마시고 전체를 향하여 그 몫을 해서 하나님앞에 서는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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