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모태신앙이 아닌 중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은 구원의 순간이 체험되고 믿기전과 믿은후가 분명히 구분되겠지만 모태신앙은 어렵습니다. 믿어온 중간에 고1학년때부터 믿음에관한 의문이 생기게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연구한것이 있다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말은 많이 쓰이지만 도데체 이것에 대한 딱부러지는 설명들을 들을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바쳤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지만..내가 의문을 가진것은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이 생겼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느부분까지 구원이 선물이고 어느부분부터는 책임이냐....하는 문제는 평생에 걸친 큰 숙제거리였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 쓴 아브라함에 믿음이라는 글을 쓰면서 한고비 넘겼고, 근자에 와서 어떤부분이 선물인가 어떤부분이 책임인가에 대해서 드디어 깨달았다.
믿음이라는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언 어떻게 생기는가 어떻게 자라는가 좋은 믿음은 어떤것인가 잘못된 믿음은 어떤것인가? 앞으로 몇시간에 걸쳐서 이부분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고 나누길 원합니다. 내가 이 걸 끝내기까지 죽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란 정의에 대해서 기독교 백과사전에 보면....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학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란 절대자를 이해하는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것과 대조적으로 신앙은 계시에 응답하는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믿음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하는것이다.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찾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서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생명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따라서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려질수 있다는 신약의 선언에서 이루어져있다.
믿음이란 사실에 대한 확신과 인격에 대한 신뢰인데 기독교신앙에서의 믿음은 인격에 관한 신뢰쪽이다.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반응이다. 신앙이란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다.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것은 인격적인 신뢰이며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만 만들어지는것이다. 믿음이란 인격과 기계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기대하고 설득을 하고 신뢰를 하고 하는 일종의 조작과 조종이 아니라 그이상의 것을 상대방의 의지와 결정에 대하여 기대를 해도 좋은 관계를 말하는것이다.
열심을 부려서 하늘보좌를 흔든다는 표현을 쓸수 있는것이 여기에 있다. 소원을 빌어서 받을 자격은 없지만 때를 써서 울면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서서 혹은 하나님이 귀찬않아서라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중요한 요소는 인격과 인격사이에서 가능한 관계를 말한다.
히브리서 11장은 1차적은 믿음은 어려운 곤경에 처한 현실적으로 고난속에 처해있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쓴 책이다.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는 그를 믿는 신앙때문에 고난을 감수해야한다. 고난을 감수할 책임이 있다. 는 쪽으로 믿음을 설명하는것이다. 믿는 사이에서는 어느한쪽이 모든거을 책임지는것이 아니라 주고받는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아들을 주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부분이 있고 인격의 관계에서는 능력이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믿음의 대상으로 부름을 받은자는그 상대방의 인격앞에 자기의 인격을 동원하여 제하는 책임이 있는것이다. 예수믿는자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급한 자리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근거로하여 하나님의 자녀되었고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우리가 하나님앞에 내려놔야 하는 책임을 감당해야한다. 하는것이 히11장의 믿음입니다.
봐라 구약의 인물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름받은 자녀로서의 책임을 가당했는지봐라...믿음을 놓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감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때문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 이미 있었던 물건을 가지고 만든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했다. 말씀으로 창조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것은 이 창조주가 인격자라는것이다. 말이라는것은 어느 인격에 설명하는 방법이다. 말씀으로 만들었다는것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한다는것은 인격자에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런것을 발언하시는 분도 인격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법칙이나 힘으로 무인격적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때가 많다. 성령론을 논할때 성령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를 놓치고 힘/원칙/능력/으로 생각하고 성령하나님을 조작하려고 한다. 이런것들은 다 말씀을 오해한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는것을 일차적으로 놓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것들의 증거다. 자기가 소원하고 기대하는거에 대한 자기암시 될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동원했을때는 자기에게 암시하는것인데 이런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말씀으로 지어졌다는것과 함께 모든 결과는 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 결과되어진것이다.
좋은 집을 갖기 원한다 건강을 원한다 믿음은 그것이 나타나야 되는것이지만, 이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게 된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베풀기를 원하시고 사랑하길 원하시고 내뜻을 받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설명할때 하나님이 오케이 하면 되는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 뜻을 구하는것이 곧 믿음이라는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니 이 하나님이 이분이 작정하시고 의도하시는 대로 그것이 결과가 되는것이다.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고 무엇을 할것인가를 아는것은 그 결과들을 하나님안에서 보는것이다. 엡1장 3절 찬송하리로다 ....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은날?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게된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진날 구원을 얻었습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할때 믿는것입니까? 예수님을 시인할때 믿는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한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 아들을 준비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서 이미 우리를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는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도 구원을 얻을지 못얻을지 모르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의지 그 예수님을 믿도록 하나님이 간섭하신다. 그래서 믿음을 창세전으로 끌고간다. 하나님이 무엇을 계획하시고 뜻하셨는지를 이미 알수 있는것 아닌가!! 그 뜻이 바뀔리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바꿀 힘이 없고 하나님을 꺾을 힘이 없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곧 결과라는 것이다.
그 세우신 분이 그 뜻을 가지고 있으면 곧 결과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것은 곧 내안에서 믿음을 보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에서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것이고 그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원에 답과 거룩함과의로움의 완성에 있다. 믿는자들은 곧 바라는것들과 보지못하는 모든것들을 하나님안에서 볼수 있게되는것이다.
믿음이란 사실확인이 아니고 물질 확인이 아니고 인격확인인 것이다. 사실과 결과의 확인이 아니고 인격안에서의 확인인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제외해놓고 나혼자가 가진 열심이거나 소원이거나 본인만의 비법이거나 종교적인 주술행위로 생각하는것은 큰일나는것이다.
그래서 욥기에서 이렇게 끝나는것이다.
욥기 41장 ~ 42장
1.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수 있겠느냐 시74:14, 사27:1
2.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4.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출21:6
5.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 두겠느냐
6.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7.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8. 손을 그것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9.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12.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13.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14.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15.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 것 같구나
16.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17.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19.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20.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21.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22.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23.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24.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랫짝 같구나
25.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
26. 칼로 칠지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27.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28. 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매 돌도 그것에게는 겨같이 여기우는구나
29.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30.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 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31.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32.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33.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34.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42장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이전에 하나님은 질서 법 힘 무정한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선하게 살고 죄안지면 축복해준다. 선하게 살면 법칙상 화를 당할일이 없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화는 도데체 왜 일어난것인가?
욥에게 있어 처음 알고 있던 하나님은 인격적인 관계와 신뢰가 아니라 잘잘못에 대한 기준이고 권위였던 것이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이 등장해서 하는 말씀이 나는 무정한 개념이 아니라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과 모든 생명에 인격이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신것이다. 곧 자연을 들어서 설명한것이다.
네 인생에 있어서 나는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네 인생과 인격에 개입하는 아버지고 복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욥의 답변은 아이고 하나님 내가 이걸 몰랐습니다. 귀로만 들었습니다. 이제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제 압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곧 하나님은 존재와 인격에 개입하셔서 의와 선과 영광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욥기의 결말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믿음은 물건과 마법이나 물질로 보면 안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것이다.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고 하나님과 호흡하고 대화하고 하나님과 밀고 땡기는 관계를 맺어야하는 것이다. 믿음에 방향과 믿음과 목적과 크기와 힘은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깊이 영적 교류가 있느냐 하는것이다.
믿음은 곧 우리의 전인격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항복과 닮음을 이해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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