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또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목회자의 부추김에 의해-교회당을 ‘성전’이라 부르고 있다. 주일에 공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주의 ‘전’(이것은 성전의 약칭)을 사모하여 나왔나이다”라고 기도한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당을 새로 건축해야 할 계제에 이르면, 교우들은 너나없이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얼마 전부터는 지성전이라는 용어까지도 등장했는데, 이는 대형 교회가 필요시 자신의 회중을 지역별로 나누고 각각의 회중이 모이는 건물이나 장소를 이렇게 지칭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를 때 그런 명칭을 사용하는 이들 사이에는 은연중에 최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향이 활성화된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어떤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와만 연관이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자기들이 모이고 활동하는 건축물을 미신적이고 마술적으로 신성시한다. 필자는 이러한 두 가지 신앙적 경향을 가리켜 ‘성전 신앙’이라 부르고자 한다.
성전 신앙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토록 극성을 부리는 것은 세 가지 서로 맞물린 이유 때문이다.
첫째, 구약을 읽으며 성전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중심축이 됨을 빈번히 발견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교회당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둘째, 교우들 편에서 보자면 신앙의 초점을 건축물이라는 명백한(tangible) 대상에 맞춤으로써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 신앙의 본질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지만, 까딱 잘못하면 이것이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목회자 편에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강조할 때 많은 목회적 유익이 생긴다. 주일의 예배 참석을 독려할 근거를 갖게 되고, 또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집회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소위 교회 성장의 기틀이 마련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첫 번째 사항과 관련하여 성경의 교훈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구약에 나타난 성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출 19:5; 24:1~8) 율법을 주셨고(출 20:3~23:33), 이어서 성막의 건립과 제사장 제도를 확립하셨다(출 25:1~31:17). 그런데 그렇게 성막을 건립하도록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땅의 어떤 백성도 꿈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이스라엘에게만 허락하셨으니,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일이었다. 이러한 하나님 임재의 실현은 성소를 지음으로써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할 뿐만 아니라 성소에서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기 위하여 성소를 짓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 체제로 돌입하면서 곧 착수한 일은 솔로몬을 통한 성전의 건립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역시 모세의 이동 성막과 비슷한 목적 때문에 건립이 됨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서, 성전 건립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들 가운데 처소를 마련하시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모세의 이동 성막이든 솔로몬의 영구적 성전이든 그 건립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누리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금 내용과 형식 사이의 연접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안이 두 가지 요소, 곧 내용과 형식이 함께 맞물림으로써 그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였다(주-1). 성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형식은 ‘이동 성막 혹은 솔로몬의 성전’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특정 양식의 건조물(建造物)을 통해서만 가능한 바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명한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형식도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건축 구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창안에 의한 것임을 보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전이라는 형식 자체가 성전에 임하는 이들의 올바른 자세 없이 그 내용-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이것은 이미 성전을 지을 당시부터 하나님 자신에 의해 밝혀진 바였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예레미야 역시 성전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맹신을 질타하곤 했다. (왕상 9:6~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3~4)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성전의 제도와 구조물이 없이도 하나님의 임재/현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포로 귀환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먼저 힘쓴 바는 바로 성전의 건축이었다(스 1: 5, 3: 8~13, 6: 13~15).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그렇게도 사모했던 것이다.
이처럼 내용(하나님의 임재)은 형식(특정한 건축물)을 통해서만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대해 그토록 간절한 마음과 열망을 품었던 것이다(주-2).
새 언약 시대의 성전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 역사는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즉,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관은 깨지고, 성전은 더 이상 구약 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임재 자체였던 고로, 더 이상 여타의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요 1:14에 있는 ‘거하다’라는 동사는 실상 “장막을 치다”(to tabernacle)라는 말로서, 그의 성육신이 흡사 구약 시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는 것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영광’ 역시 모세의 이동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 완공 시에 충만했던 여호와의 영광(출 40:34~35; 왕상 8:10~11)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임재하시고(cf. 골 2:9)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으므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준 분이셨다(요 1:18).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3일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했다(사실 주전 20년에 출발한 제2차 성전의 보수 공사는 46년이 되어서도-그 당시는 주후 26년임-끝나지 않았다. 결국 이 보수 공사는 이후로도 38년이다 더 걸릴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단지 자기 자신이 성전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 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형식으로서의 성전, 곧 건물로서의 성전과 이에 따른 제사 제도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막 16:19; 눅 24:50~51; 히 1:3). 그리고서 성부로부터 성령을 받아 그의 교회에 부어 주셨다. 따라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즉 오순절 이후에는 이렇게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cf. 골 1: 27)로 인해 바로 우리 자신-그리스도인 각 개인과 공동체-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 곧 성전이 되었다. 우선 그리스도인 각 개인이 성전이다. 또 우리는 공동체적으로 성전을 형성하고 있다(주-3).
이리하여 신약 시대에는 성전의 구조물(형식) 없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내용)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참다운 의미에서의 성전은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이지, 예배당 건물이 아니다. 비록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고 교회당을 지으며 ‘성전 건축’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성경 신학적으로 보아 합당한 표현이 아니다. 성전의 종식은 신약 시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서도 지속되는 일이다.
성전 신앙의 유발 요인
필자는 지금까지 성전 신앙이 주로 성경적 요인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말했다. 즉 성경을 읽으면서 구약의 성전을 은연중에 오늘날의 교회당과 동일시하는, 그릇된 성경 해석 및 적용이 그 주범임을 밝혔다. 그런데 비록 이러한 성경적 요인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성전 신앙의 형성이 꼭 이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제 두 가지 새로운 요인을 추가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무교적(巫敎的) 요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성전 신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무교적 세계관과 심성에 침잠되어 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Shamanism) 및 원시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영적 실체나 현상을 어떤 특정한 물체(object)와 연관시키는-혹은 그 물체에다 영적 의미를 투사시키는-일이다. 과거에 원시 종교가 정령 숭배/물활론(animism) 경향을 나타내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이다.
그리하여 어떤 물체는 액운이나 사단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취급을 받는다. 인디언의 주술 수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사단적이라든지, 영아 살인 현장이 유령의 출몰지가 되었다든지 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반대로 어떤 물체는 하나님의 호의나 은혜를 매개하는 ‘능력 있는’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십자가와 성배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나 성인(聖人)들의 기도처나 일기 등이 행운을 가져다줄지 모른다고 희망을 거는 것도 이로써 설명이 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는 ‘죄의 독’이 내장되어 있었고 생명나무의 실과는 그 자체에 생명의 능력을 본유적으로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어떤 특정 장소에다 ‘성전’이라는 용어를 적용함으로써, 그 장소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신성하고 구별된 곳이 된 것처럼 공공연히 주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꼭 교회당 건물 속에 무슨 하나님의 신령한 힘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건물 구조 내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는 것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다.
(2) 종교 심리적 요인
성전 신앙이 그리도 쉽게 파급되도록 만드는 또 한 가지 원인으로서 ‘종교 심리적 요인’을 거론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당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종교 심리적 효과를 의미한다.
첫째, 교회당은 공동체 의식의 형성과 지속에 기여한다. 인간은 어떤 공간의 공유를 통해서 집단 행위를 수행하는 법인데, 이것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당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당이라는 공간을 통해 공예배를 드리고, 그룹으로 기도회를 가지며, 주일 학교 교육을 실시한다. 이로써 연관된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은 현저한 정도로 확장이 된다.
둘째, 교회당은 그 건축물의 건립 및 유지와 관련하여 구성원들 각자가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교회당 건축에는 (i)헌금을 통한 재정의 투자 (ii)몸으로 참여하는 봉사 활동 (iii)역경이나 반대와 싸워 가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함 등의 요소들이 포함된다. 이런 사항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교회당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교회당은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종교적 경험 및 추억들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종교적 정서는 어떤 특정한 종교 경험을 가졌을 때의 장소·분위기·정황에 따라 크게 촉발된다. 지난여름 헌신 예배 때의 장면, 자신의 주일 학교 교사가 한 눈물의 권면, 단기 선교를 나가면서 무릎 꿇어 기도하던 일 등등은 대개 교회당 안에서 일어난 바이므로, 특정 교회당에의 출석과 참여가 늘어나면 이러한 상기 작용은 극대화된다.
이런 종교 심리적 효과 때문에 우리는 교회당을 중요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성전’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이다.
(3) 각 요인에 대한 평가
필자는 지금까지 성전 신앙의 형성 요인을 세 가지-(i) 성경적 요인 (ii) 무교적 요인 (iii) 종교 심리적 요인-로 제시했다. 이 가운데 (i), (ii)는 바람직하지 않은 요인으로서 한시바삐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iii)의 경우에는 다르다. 종교 심리적 요인은 대체로 긍정적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립적인 성격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ii)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한 개인의 심령 및 공동체의 삶에 있어 (i)이나 (ii)와 긴밀히 연관을 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iii)을 (i), (ii)와 분리된 가운데 발전시키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참된 의미의 성전 신앙을 위하여
필자는 오늘날 유행하는 성전 신앙을 비판함으로써 교회당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항에서 교회당의 종교 심리적 요인을 긍정적으로-아니면 최소 중립적으로-취급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 심리적 요인이 더욱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참된 의미의 성전 신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 건축’은 그 본질상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는 일-‘덕 세움’(롬 14:19; 고전 8:1; 10:23; 14:3; 엡 4:29)-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고전 14:4~5)과 연관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덕(德)을 세우다”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듯 개인의 체면이나 위신을 높여 준다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오이코도메로서, 집이나 권속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짓는다’(to build)라는 의미의 데모로부터 유래한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운다는 것이 ‘덕을 세움’의 원래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개인과 관련해서든 공동체와 연계해서든 사랑, 용서, 섬김 등의 미덕을 통해 개인이든 공동체든 덕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 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 신앙이고, 또 이것이 전제될 때 교회당은 그 종교 심리적 기능을 건전하고 아름답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 지난 번에 다룬 '복'의 경우, 내용은 “하나님의 선의”이고 형식은 “물질적 은택”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가 필연적으로 물질의 은택을 통해서만 표현되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 사이의 본질적 연접 현상은 구약 특유의 것이다.
주-2 ) 이러한 태도는 심지어 오늘날-유대인들은 로마 장수 티투스(Titus)의 공략 때문에 주후 70년 이래, 스룹바벨에 의해 건조된(그리고 헤롯에 의해 84년에 걸쳐 보수된) 제2차 성전을 잃었다-에도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유대인 학자는 미구에 제3의 성전이 건축되기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oshua Berman, The Temple: Its Symbolism and Meaning Then and Now (New Jersey: Jason Aronson Inc., 1995), pp.203~8).
주-3 ) 어떤 신학자는 신약에 나타난 장막과 성전의 표상(imagery)이 구약처럼 나무와 돌의 구조물 개념이 아니요, “새 성전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개인 안에 임재하시는 것(고전 6:19), 회중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고전 3:16, 17), 또 교회 전체에 임재하시는 것(엡 2:21)으로 구성된다”(Paul M. Zehr, God Dwells with His People (Scottdale, Pennsylvania: Herald Press, 1981), p.155)고 함으로써 성령의 내주에 있어 개인·회중·전 교회라는 세 가지 수준을 구별하기도 한다. |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라는 연재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