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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7영리/구 원 론

[스크랩] 구원의 증거 참된 동기와 목표 /이천우목사

마태복음 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38/6:66-69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 이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제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입니다."

히브리서 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두가지 신앙의 동기와 목표

성경은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은 저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점검하는 것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구별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추구해 나갑니다. 심지어 자기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을지라도 사실상 그것조차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저희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 나갑니다. 이것은 태초의 창조 목적이 회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저희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갑니다. 저희의 구원받은 영생의 증거가 거기에서 엿보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어떤 교회에 속하였으며, 얼마만큼이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속하게 되었는지,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같은 삶의 변화의 실제적인 점검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 행위의 동기와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근거는 성경에 입각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대충 알고 막연히 아는 가운데 억지와 고집으로 자신의 구원을 강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백해무익합니다.

또한 믿지 않는 불신자와 또한 잘못 믿는 거짓 그리스도인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두 사람 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는 관계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비된 형벌의 심판과만 관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실존적 상황의 차원에서 보면, 잘못 믿는 사람은 단순히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에 비해 교회를 혼탁시키는 죄까지도 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믿음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제법 많이 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들 중의 일부는 도저히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 진리에 무지하고 그릇된 행동을 일상적으로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혹은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거짓된 그리스도인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비록 겉으로는 사람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비춰졌을지 모르겠으나,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너무도 쉽게 그분으로부터 떠나가 버림으로 자기들의 본심을 드러냈던 성경적 증거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가능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이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 - 요한과 안드레 - 들이 자기에게로 나아오게 되었을 때에, 저희를 향하여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당시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듣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의도적으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구했던 종교적 '동기'와 '내용'에 대한 적절한 점검은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피해서는 안될 필요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잘못된 동기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은 결정적인 때가 이르면 필연적으로 다시 세상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결코 그 잘못된 동기를 채울 수 있는 만족을 그 안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준은 바른 신앙고백으로 증명됨

오늘날의 교회(敎會)는 어느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는데 너무도 안일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예배당에 단 한 번이라도 출석하기만 하면 무조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일에 신속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상의 많은 문제점이 뒤따르게 됩니다.

어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됨'의 여부는, 그가 어떤 특정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단순한 한 가지 사실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대다수 교회가 이런 식의 조심성 없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소위 '등록'이라는 형식에 과도히 매달립니다. '등록 카드'라 불리우는 종이 쪽지에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게 하는 것으로 그를 교회원(敎會員)으로 간단히 받아들이는 일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또한 그 때문에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갖다 붙이는 소위 '교패'(敎牌)들의 범람을 보십시요.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을 자기 교회의 소속원으로 영구히 굳힐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저급한 사고방식이 그러한 방법을 낳게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등록'의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그리스도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영광스러운 교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원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그로 말미암는 신앙관이 확실하여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을 교회에 등록시키는 일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참여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느 한 사람을 교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갖는 점검으로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확인하는 일에 있습니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진실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의 반열에 속해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이미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조차도 신앙고백을 하나의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암송'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진실하고도 솔직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단지 입술만의 소리로 신앙고백서를 낭독해 내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런 식의 고백으로써 그 내용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죤 칼빈(Jhon Calvin)과 같은 개혁자는 그것의 중요성을 생명과도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념비적인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기독교 강요'는 바로 이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해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 사실이 가져다주는 제반 진리들을 바르게 고백하는 이 진실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결코 어느 누구도 교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세례를 주어서도 안 됩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의 신교 목사들은 이 신앙고백을 위하여 요리문답을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한 시대의 경건한 목회자로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은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마다 이 문답을 확실하게 공부하였는지 안했는지를 철저하게 점검하곤 하였습니다.

교회는 진실한 신앙고백을 한 자들만이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한 구성 요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이 가진 거짓된 믿음에 매우 민감하게 주목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그 말미를 장식하는 일련의 교훈들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29절을 보십시요. 먼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도리어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문과 넓은 길을 찾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계속해서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지만, 그러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시키는 가르침"을 엄격히 구별하여야 할 일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 그리고 실제 "자기기만성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수 있는 현실성"에 대해서 준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21-23). 저희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저희는 주의 이름으로 실제로 귀신을 쫒아내었습니다. 저희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셔서 다시 한 번, 신앙의 집을 지음에 있어서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음 사람"의 대조적인 비유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1-27).

과연 성경은 그 본질이 드러나기까지,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거짓된 믿음의 길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은 결정적인 때에 이르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짓된 제자였음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분의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기까지는 적어도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인 것 같았습니다.


잘못된 동기로 신앙하는 자들

지금까지의 사실을 고려하건대 참으로 어느 누군가가 교회에 항상 출석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참된 동기와 목적이 아닌 한 제아무리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 할지라도 사실에 있어서는 전혀 무익할 뿐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본문을 통하여 이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셨던 능력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지는 현장에 있었던 당시 사람들은 거의 대다수가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요 6:1-2).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의 진리'에는 미처 관심이 없었고, 단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특이한 현상들'에만 주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능력을 어떤 특이한 기적을 자기에게로 끌어내리려는 목적으로 그처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3-25). 오늘날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근본적 동기와 목적이 이런 것이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에 크게 위배됩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각종 기적과 능력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복음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증거하는 표적(標的)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 2:22).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의 의미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해석하기를 '표적'이라고 명명하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 요한복음 2장 18절, 3장 2절 등에서 계속해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복음서 도처에서 발견되는 예수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 기적과 능력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기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적인 도래를 증거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만일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그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계속해서 잘못된 동기(動機)와 목표(目標)를 가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살펴볼 이 관점은 어떤 의미에서 일견 유익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매우 치명적인 잘못을 낳는 차원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이 세상에 대한 '정치적'이며 '사회 개혁적'인 차원에다 두는 경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저희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던 경우가 바로 이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실제로 자유주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첫 설교에 대한 기록인 누가복음 4장 17-20절의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본문을 잘못 해석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 구절이 '구약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제시되어 왔던 것으로서의 '예언의 성취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의 해"에 대한 개념의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결점을 희석시켜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거나, 또는 망각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매우 교묘한 사단적인 유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자칫 잘못 "종교적 영웅주의"를 추구하도록 하는 그릇된 행동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 죄가 지적되지 않고서는 구원의 필요성을 가지지 못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깨닫게 하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무서운 진노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깨닫도록 하지 못한다면 복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실제로 기독교를 정치적이며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운동권 성향의 목사들이 보여 주고 있는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복음의 빛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이번에는 "떡을 얻거나"와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날에도 당시와 같이 마찬가지로 모순되게도 의식주(衣食住)등의 문제를 해결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육체의 욕구로 말미암는 이기적이고 소욕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할 경우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가운데 그처럼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그러한 차원에서 가지는 사람은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육체의 욕구로 말미암는 어떤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0-28).

이런 식의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저 옛날의 가륫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림으로써 그랬었던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이 이르면 결국 교회를 심각한 파멸로 몰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어떤 조그만 이해 관계로 커다란 분열을 발생시키고, 당파를 조성하며, 싸움을 벌이고, 끝내는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실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 유익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교회와 관련한 물품을 판매하는 자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비록 그들이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교회 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사업의 대상을 교회으로 할 경우에 성공하기 위해서 비신앙적인 일도 서슴치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가령 이스라엘에서 요단강물을 수입하여 '성수'라고 하며 판매한다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못과 동일한 크기와 모양을 재현하여 판매하면서 마치 판매하는 못이 성도들에게 고난을 경험시켜 줄 수 있는 것처럼 잠재의식을 갖게 한다든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정당한 방법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다 물러갈 사람들입니다. 이 원리는 교역자들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겉으로는 입만 열면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교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사실상 자기 배를 섬기는 삯군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5절에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비사를 보십시요. 삯군들은 제 목숨을 위하여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12-13). 또한 자기의 배를 섬기기 위하여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써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사실 삯군 목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진리는, 다만 그들의 배를 만족시켜주는 목적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결국 이런 교역자들 역시, 본문의 사람들과도 같이 결정적인 판단의 때가 오면 가차없이 예수님을 떠나고야 말 것입니다. 데마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당시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군중은 상당히 큰 무리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냥 간단히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여자와 아이들 외에 장정들만도 무려 5,000 여명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 시대의 흐름으로 말미암은 보편적인 군중심리에 의해서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다 예수님으로부터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 2절의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와 66절의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는 길이니까 자기도 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또는 그 어떤 특정인이나 특별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체면치레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내 아들이 교역자이니까 부모된 입장에서 아들의 체면 때문에라도 출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나는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출석하여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신학까지 했는데 예배만큼은 의무적으로 출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희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잘못된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 물러가 버립니다.


참된 동기로서의 신앙

성도는 단순히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교회에 출석하는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렇게 하는 정당한 이유(理由)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이 이르면 예수님을 떠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으나 베드로와 그 동료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른 동기와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7-68). 그런데 그같은 결단을 보여준 제자들의 특성을 바르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역시 앞서 예수님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관점들을 모두 다 체험하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가졌던 근본적인 동기와 그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많은 무리들이 가졌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답하여,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에게로 갈 필요가 없으며, 또한 갈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희는 이렇게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적 동기와 목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떠나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점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혹은 다른 제도와 물건들과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상 구원과는 먼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의 보배롭고도 영광스러운 특성상 그 이상의 가치를 전혀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베드로는 단순히 "신앙을 자백"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신앙을 고백" 했습니다. 그는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이심을 알고 그 마음에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한 고백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가졌던 신앙고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 같은 원리로 적용한다면 자신이 왜 그리스도인인지 그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분명하고도 확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주관적인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기 욕심으로 임금삼으려고도 하고, 또한 쉽게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계시되는 진리를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자신의 생각으로 끌어들여 맞추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끝내 예수님 곁을 떠나가 버렸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0절에 보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했습니다. 저희의 이 말은 실제로 그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깨닫기가 힘들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기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떡'을 가르치셨으나, 저희는 여전히 '육신을 배부르게 해줄 떡'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사를 이런 식으로 대해 왔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면 항상 놀라기만 할뿐이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둔감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차원의 저급한 생각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비유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던 순간, 그 즉시 또 다시 "육신의 배를 채워줄 육신의 떡"을 생각하였던 사실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 8:14-2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앙함에 있어서 그 진리성에 대하여 무지한 채 생각 없이 믿는 바람에 이런 어리석은 일이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복음은 진리의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과 분위기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2-14). 유대인들의 실패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희의 '종교적인 의'는 기껏해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극적인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진정 이스라엘의 실패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기껏해야 하나님의 존재성만을 인식할 뿐이었지,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지하였습니다. 저희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이유의 저변에는 언제나 이런 식의 그릇된 잠재적인 육신적 부패성이 자리를 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다만 저희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에 속할 뿐입니다(막 4:19).

성도가 진정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발견되어지기를 소원한다면, 이러한 육신적인 문제를 기꺼이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물질 문제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인물의 한 사람으로 모세를 묘사하여 보게 해 줍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또한 한 시대를 기꺼이 복음의 종으로서 살았던 바울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결단력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단순히 감상적으로 보지 말고, 사실적이었던 실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였기에 그처럼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었는가 말입니다. 그는 참으로 복음의 본질을 '구원론적 개념' 안에서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죄 사함'으로서의 복음이 주는 영광의 극치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물질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죄 사함'을 주신 은혜의 사실과 관계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자기가 믿는 복음으로서의 신앙의 도리가 보유하고 있는 영광스럽고도 복스러운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자랑하면서도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모순이 우리 중에 비일비재합니다. 이는 복음에 반하는 삶을 서슴없이 살아가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복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가치와 그로 말미암은 영광을 온전히 이해한 베드로는 복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저 단순하게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여기서 베드로가 사용한 '보배'라는 말은 '최고의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왜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음과 같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돈으로 살 수 없는 구원을 거저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명예로 살 수 없는 구원을 거저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생명으로도 살 수 없는 구원을 거저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런 것이기에 자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고 확보하는 일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4-46).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규정함에 있어서 단순히 외형적인 측면만을 보고서 쉽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며 근본적인 측면에서 진지하게 점검한 가운데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하여 노심초사하기 마련입니다. 그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구속의 은혜를 좇아 오직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그것 자체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3편 28절을 보십시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 말씀은 그분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불순종의 생활을 벗어버리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불순종하는 삶'이 '죄의 실체'이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바르게 회복하시기 위하여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셔서 기꺼이 고난의 삶을 사셨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던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사실에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종이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사는 삶의 가치관을 확립합니다. 이러한 그분과의 교제는 순종하는 삶 속에서 온전히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과연 복음의 실존은 그분과의 교제 속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말의 발전된 의미는 그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던지기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위하여 받게 되는 갖가지 의로운 핍박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을 감내해 낼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있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입는 것은, 사실상 그분을 위한 고난의 삶으로 부르심을 입는 것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게 될 때 슬퍼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3-16).

결론적으로, 어느 한 사람의 구원받은 진정한 증거는 그가 추구하는 영적 가치관의 올바른 이해와 그 삶에서 풍성히 찾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 단순한 열심과 헌신은, 인간이라면 누구를 불문하고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종교심의 발로에 의한 표현 형태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뜨거운 열심을 내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얼마나 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는가에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핵심적인 사실은,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합당한 인정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 현재적으로 확인되어질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기와 목적은, 베드로에게서 보여졌던 차원의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죄의 문제와 관련한 것이요, 그것을 해결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회복시켜 주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을 이 시대에 다시 재현해 내려는 의도 때문에 되어지는 신앙생활이라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 본 글은 개혁사경회에서 공부한 내용을 교정본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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