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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거듭난(믿는) 사람만이 믿음의 진보를 이룰수 있습니다.

아는것과 믿는것의 차이는 아벨과 가인의 차이입니다.  둘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존귀한 분임을 깨달았고 가인은 그냥 하나님의 존재만 인식했을뿐입니다.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없는 분으로만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아닌 영광을 받으시며 구원을 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이 바라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제멋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원파가 뭔지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하는말  몇월몇칠몇씨에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라고 묻는것에 참  답답함을 느낀적이 있었습니다. 구원파를 만나본적이 없어서 특별히 어떤것인지 감이 잡히지는 않습니다.

 

아랫글에  믿음과 거듭남이 다르다고 말하는것에대해서  전 믿음이 곧 거듭남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을 잘 설명한 장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여기서는 믿음의 조상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조상들을 설명하는 이유가 10장에 나옵니다.

 

10장에 믿음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옵니다.  율법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나옵니다. 이 히브리서 10장을 잘 묵상하면  11장에 나열된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11장 첫구절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실상과 증거들에대해서 설명한것이 바로 11장입니다.  그분들이  믿음의 모범이 되셨으니 이 장을 잘읽으면 이해가 갈겁니다.  선진들이 땅의것을 추구했는지 하늘의 것을 추구했는지를 구별해서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10장에 율법이 주어졌지만 율법으로는 인간을 온전케 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온전케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십니다.   10장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믿는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가 주안에서 부활한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거듭남과 믿음은 다른것이 아닙니다.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자가 거듭날수 없으며 거듭난 백성이 믿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때  태어나자마자 숨을쉬고 울음을 터뜨리지 아이가 태어나서 한참후에 내가 태어났구나고 생각해서 숨을쉬고 울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죽습니다. 

 

주안에서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거듭난 백성은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트립니다.  오히려 거듭난 백성이  믿음을 깨달아가는것이 늦게될수 있습니다.  태어나도  부모님이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리고 이삭을 바치기까지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랫글  믿음과  거듭남이 다르다고 말하는것은 순서가 틀린것입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났다는것을 깨달은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면  태어남을 알수 없습니다.  중생하지 않은 죄아래 죽은 자는  하나님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걸 알게되고 그것을 믿게된것은 바로 중생했기 때문에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알게된것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거듭났다는것을 잘 모르겠다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말고  주님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요.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할수 있다는것은 이미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구원파의 글에서  거듭나면  죄를 짓지 않고  의로운 자가 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회개할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것처럼 말하고  믿지만  죄를 짓는 사람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은  죄아래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인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고 틀린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다윗도/솔로몬도/요시아도/히스기야도/모세도/삼손도/과연 구원받은 선진들일까요?  성경에  그분들은 믿음의 선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듭났는데 왜 죄를 지었을까요?  온전히 의로와졌다면 왜 죄를 지어서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들어야 했으며  왜 선지자들이 그들을 책망하고 견책했을까요?

 

거듭난 백성이 믿음으로 온전히 성장하여  젖먹이신앙에서 단단한것을 먹을수 있는 신앙으로 자라는것이 바로 믿는자들의 삶입니다.  구원파의 주장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된다? 이렇게 말하는것입니다.  거듭났으니 이제 율법의 간섭이 필요없다고 말하는것도 이것입니다.  율법을 구원파가 무시하는 이유는 거듭남을 뭔가 다 이룬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넌 백성들이  모세가 없는 사이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래서 심판을 받아 죽었으며  불뱀에 맞아 죽었고  물이없어 원망하고  고기가 먹고 싶어 원망했고  또 가나안앞에서는 10명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정탐꾼들로 인해서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하고  결국 홍해를 건넌 백성중에 여호수아와 갈랩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다 죽었고 그 후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그럼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인가요?

 

거듭난자들에게 필요한것이 율법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지도입니다.  거듭나지 않는  죄로인해 죽어있는 백성들에게 율법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  율법을 봐도 그 율법이 뜻하는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율법이 뜻하는것은 율법이 인간을 온전히 깨끗게 하지 못한다는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지도를 펼쳤더니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주님께로 가는 길을 몰라서 결국 둘둘 말아 지팡이로 썼다는것입니다.  지팡이 쓰는 사람은 소경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백성들에게 율법은 지도이고  그 지도를 보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떴으니 이제 그 지도를 볼수 있게된것입니다.  그렇게 지도를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되었고  그길로 가게된것입니다.   율법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율법은  하나님께로 가는 삶에 대해서 설명해주는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수도 없고  행할수도 없으니 완성케 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그것이고 예수님이  자기의 짐이 가볍다고 하신것이 바로 그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당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율법의 길은 좁은길입니다.  그러나 믿는자들은 다 그길을 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끌고가기 때문입니다.  이건 참 설명하기 어려운데  거듭남은 지도의 입구에 들어섬과 같고  출구로 가기 위해서는  인생이라는 삶을 살아야하는데  삶을 살다보면 선택해야 할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경은 입구조차 찾지 못해서 헤매는것과 같죠.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 중생케하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른 길을 찾아 가는 것은 이제 믿는자의 선택입니다. 그 길을 안내하는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뜻 계명을 지킴으로서  한발짝씩 하나님께로 가는것입니다.  그 길이 어려울수도 있고 고통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 길을 갈수 있도록  성령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어째든 출구로 갈겁니다.  출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죽음을 의미할수도 있겠죠.  믿는자들에게는 죽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되는것입니다.  그때까지 달려갈기를 다 달려가는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하는것입니다. 그 싸움을 알게 하는것이 율법이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것이 아니라 완성시킨것입니다.

 

믿는자들에게 삶에서의 책임은  이웃들에게 믿는자의 모습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잘 읽어보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것입니다.  율법을 폐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말고 이웃도 사랑하지말고 살라는것인지? 율법이 그 자체가 구원을 줄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 은혜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가 될수 밖에 없었던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만이 율법의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자들은 율법의 의미를 깨달을수 없습니다.    지팡이를 집고가는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이라는 입구는 찾아 들어왔는지 몰라도 출구를 영원히 찾을수 없을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천국에 못갈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지옥자식으로 만든다고 책망을 받는것도 이때문입니다.

 

구원파는 율법을 무시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이름을망령되이 부르지 않고/우상을 섬기지 않고/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고/부모를 섬기고/간음하지않고/도적질하지않고/이웃의것을 탐내지 않고/거짓증거하지않고....이것이 율법인데 이걸 무시하는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것입니다.

 

반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고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합니다.  구원받은자로서 입구에만 서있으면 안됩니다.  율법이 어렵다고 한발자국도 안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치하지 않으실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거듭난)  믿음의 진보를 이룹니다.  등을 떼밀기도 하고  손을 잡아 끌기도 해서 변합니다.  술주정꾼은 변하여  성령에 취할것이며  담배에 찌든 폐는  주님의 깨끗한 숨결로 가득찰것이고  더러운것을 내뱃는 입술은(나도욕하면 안되는데) 주님으로 인해서  사랑의 말들을 하는 입술로 바뀔것입니다.   이것이 변하는 것이고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삶입니다.

 

하루 이틀에 안될것이고 평생에 걸쳐서  나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붙잡고  이제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고 고백하며  나의 가장 소중한것을  하나님앞에 들고 나가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게되면 하나님은 나의 소중한것도 지키시고 자기의 것도 더해서 주실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느끼는 삶입니다.

 

구원파의 글?  미혹하는 글입니다.  우리는 금방 깨달을수 있습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자기의 감정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미혹하는것에 속지마시고  분별하는 지식을 쌓음으로  거짓을 구별하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누리는 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