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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기독교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은 상처를 안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상처를 치유할수 없어서 치유를 하지 않으신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며  비아돌로이사의 그 길을 가실때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실때  �긴상처 흘리는 피를 그냥 가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 상처는 바로 나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그 상처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고통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못박히실때 안아픈것이 아니며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목마르지 않으신것이 아닙니다.  아프셨으며  목마르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우리 기독교인들을보면  고통을 싫어하는모습을 많이 발견하게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상처를 치유받고 하나도 마음의 무거운것이나 아픔이 없이  깨끗하고 아무런 아픔도 없고 미움도 없고 온전히 사랑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지키심안에서 병마도 없고 상처받음도 없고 늘 행복하고 편안한 삶 평안한 삶을 사는것처럼 착각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 삶이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여기 이 지구에서 이 육신을 가진 삶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본향에 있고  우리는 이곳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삶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다른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고통과 아픔의 연속의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이 내리치는 채찍을 맞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부자의 삶도 평안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난한 삶이 행복할수 있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오히려 항거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는 자들을 위한 방패막이 삶이 되는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교자의 삶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주님이 뿌린 씨가 내 마음에 뿌려져서  내마음에 뿌려진 그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구원받은 백성의 삶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어야하는 삶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순교한 분들은 평안하고 행복했나요?  그러면 순교자가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정복했나요?  아니면 세상이 주는 칼에 목숨을 바쳤나요?  세상이 던지는 돌맹이에 목숨을 바친 삶이 바로 순교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죽는것이 헛된죽음이 아니었을까?  고민을 해봅니다.  순교자들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어떤분은 좀더 큰 고통을 받고 어떤분은 작은 고통을 받고 그러나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세상에서 볼때 헛된 죽음이었습니다.  불쌍한 죽음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뒤에 바울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가 있게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정신이  지금의 교회에 살아있나요?  오히려 순교자의 정신이 아니라  정복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군림하는 기독교를 바라봅니다.  이젠 기독교가 세력화가되고 힘이 쎄져서  대통령을 만들어냅니다.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고  대한민국을 바치는 그런 힘을 가진 대한민국 기독교가되었습니다.  단군상을 무너뜨리고 사찰을 무너뜨려달라고 기도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모습을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권한을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권한은 세상을 힘으로 이기고 정복하는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몸에 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 세상을 이기는 참된 삶입니다.  죽음이 곧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가셨던것처럼....

 

세상은 아픔과 상처투성이입니다.   세상은 외로움과 고통이 가득한곳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가 싸매줘야할 곳입니다.  세상은 어둡고  세상은 타락하고  세상은 더러운곳입니다.  우리가 할일은 세상을 정복해서 뒤집는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동화되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이되어야하고  소금이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상처를 우리가 안고 가야 하는것을 의미합니다.  병자들을 돌보고  창녀와 과부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돌봐야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미래가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이땅의 삶이 전부입니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삶이  그들의 모든 삶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죽음후의 세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땅에서 잘먹고 잘살아야하는 당위성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해야한다고요?   가끔씩  전도가 열매인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전도를 통해서 세상사람들이  상처를 치유받고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서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되는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서 그런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도는 미련한것입니다.  정말 미련한 방법이 전도입니다.  그러나 아름답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수 없으니까요.  씨를 뿌리지 않으면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니까요.....

 

전도는 열매가 아니라 씨뿌리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하나님이 거둡니다.  내가 거두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두시는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사람의 마음밭에 들어갈때 성령님이 역사하여  열매를 맺게합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중생한 자들의 삶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인들은 중생한 자들입니다.  곧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받은 백성들이고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중생한것은 나에게 들려진 복음이 성령님의 역사로  역사하여 생명을 얻게 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이며 역사입니다.   그렇게 중생한 자들은  상처를 치유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에 유행하는것이 병을 고치고 상처를 치유받는것입니다.  그리고 내적치유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말이 나옵니다.  내적치유가 뭔가요?  내적치유/상처를 치유받는다는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내안에 있는 모든 상처가 깨끗히 나음을 입어서 온전해 지는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자들이 구원받은 백성들이  과연 미움이 없고  질투가 없고 시기가 없고  그 마음에 온전히 사랑만 가득한가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자들도 상처가 있고 미움이 있고 질투가 있고 시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런것이 가득하다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아닐까요?  왜 성령님을 통해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상처들을 가득안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당연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중생했다고 해서  성령님의 기름부음과 임재함으로인해서 충만한 삶을 산다고해서  마음속의 모든 죄악이 다 깨끗히 된것이 아닙니다.  생각속에서  미움을 버리고 온전히 사랑만 하게된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상처들을 다 안고 살아가고 있는것이  믿는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지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준 사람들을 의지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것입니다.  왼뺨을 친 형제에게 의지적으로 오른뺨을 댈수 있는것이 바로 기독교인인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것이 아닙니다. 원통하고 억울하지만  그 원통함과 억울함을  누르고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 그 길을 가는것입니다.

 

내안에서 사랑함이 나오지 않고 미움이 가득찬다고 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아닌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욕이 나오고 더러운것이 쏟아져 나온다고  성령님의 역사가 사라진  버림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라서 이런것들이 다 나오고 더러운것이 쏟아져 나오지만  의지적으로 복종시킵니다.  누구안에서?  주님안에서 복종시키는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향해서  내리치는 채찍을 맞아 살이 찢기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안고  찢긴 살을 부여잡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세상이 나를 향해서 칼을 내리친다면 순수하게 그 칼을 맞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상대방을 향해서 저주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사랑을 알게하는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고통과 상처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낙심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치 않을 이유는 우리의 삶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를 죽이는 자들의 삶은  100년이 전부인 삶이지만 우리의 삶은 영원한 삶이기 때문에  죽음도 기쁘게 받을수 있고  세상이 주는 상처들을 안고 살아갈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받고 있는 상처들을 떠안고 살아갈수 있는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말이 나오게 해야합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저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고 생각할수 있게 해야합니다.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것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상처를 치유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받을 상처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그 상처를 몸에 지니고 세상의 아픔을 지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발견하게 하고  우리를 통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가난한 삶이며  애통하는 삶이며  배고픈 삶입니다.  그길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길을 따라가는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삶 그것은 힘이 아니라  희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