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라는것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아는건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행하기위해 큐티를 하는건가요? 전 큐티를 하는 분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 더 중요시 여깁니다. 그것은 귀신도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위해 큐티를 하는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위해 큐티를 하는건지? 도무지 어떤것이 우선인지 모를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큐티를 위한 큐티를 하는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큐티를 하는것인지?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큐티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서 큐티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곧 큐티라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신앙이라는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아는것이 신앙입니까? 아니면 그 아는것을 행하는것이 신앙입니까? 예수님이 귀신도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아는것과 행하는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신앙인것입니다.
큐티가 신앙생활입니까? 아닙니다. 큐티는 큐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이 되어버리고 큐티를 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것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신앙의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하면 나 큐티하고 나서 밥사줄께라고 말하면 안되고 그 즉시 밥을 사줘야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하는데 나 큐티먼져하고? 라고 말하는것이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배시간이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하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데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길을 묻는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길을 묻는 사람의 길을 가르쳐주는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것이 중요합니까? 둘다 중요하죠. 그러나 믿는사람에게는 예배가 중요하지 길묻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묻는 사람에게는 다른사람에게도 물을수 있는 것이니까. 나말고 다른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고 자기는 예배드리러 갈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까요? 안 받으실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받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도 소중하지만 형제와 화목하는것도 못지않게 소중한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때 신앙의 모양은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행실에서 신앙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선순위의 실종입니다. 예배도 중요하지만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는것도 소중한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것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것 이것이 율법의 중심이고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이웃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는것이 당연한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선되지 이웃은 우선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말을 많이 듣습니다. 교회가는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가지 사람보고 가느냐? 맞는말 같습니다. 그러나 전 맞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교회가는 이유는 나와 한몸된 한 형제들과 하나님께 함께 예배드리러 가는것입니다. 교인들은 나와 다른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안에서 한몸된 사람들입니다. 전 나와 한몸된 한 형제들을 만나고 함께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갑니다. 한 지체들과 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라는 건물보다 전 한 형제된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로 맺어준 나의 지체들과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것은 큐티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라면 교회안에서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고 형제를 돕고 마음을 함께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말씀드려 봅니다.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것이 예수님에게 한것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데 양과 염소를 나눌때의 조건이 바로 작은 소자에게 한것을 묻습니다. 병들었을때/배고플때/목마를때/돌아본 사람은 양이요. 돌아보지 않은 사람은 염소가 되어버립니다.
둘다 주여! 하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실것입니다. 말로는 주여! 하고 부를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큐티를 평생에 걸쳐서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큐티가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큐티가 신앙생활이 되어버립니다. 큐티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건이 아닙니다. 큐티를 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지? 그 사랑하고 섬기는것을 보여주는것이 바로 소자를 돌보는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건이라는것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잘 따라 순종하고 사는지? 한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전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남들을 정죄하는 모습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전 차라리 안하고 맙니다. 새벽기도도 안갑니다. 철야예배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릴적에는 저도 많이 참석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냥 다른 형제들을 정죄했습니다. 왜 예배 나오지 않느냐? 왜 새벽기도 안하느냐? 왜 큐티 안하느냐? 왜 철야예배안하느냐? 왜 수요예배는 참석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들이 참석하든 안하든 나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신앙을 가지고 남을 재서는 안됩니다. 나는 이거하는데 왜 당신은 안합니까? 라고 말하는것은 결국 나의 기준에서 상대방을 정죄하는것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술안먹는데 왜 당신은 술먹습니까? 전 담배안피우는데 왜 당신은 담배피웁니까? 전 놀음안하는데 왜 당신은 놀음을 좋아합니까?
이런것들이 바로 정죄입니다. 나는 큐티를 하는데 왜 당신은 큐티를 하지 않습니까? 큐티하면 뭐가 생깁니까? 큐티하면 신앙이 성숙합니까? 물론 그럴수 있습니다. 안하는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걸 안한다고 해서 문제가되고, 한다고 좋은것은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간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되는것입니다. 내가 먹거나 안먹거나 큐티를 하거나 안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것은 내입에서 다른사람을 정죄하거나 나의 행동에서 다른사람을 정죄하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것이 중요합니다. 새벽기도 참석한다고 못하는 사람을 나무라서는 안되는것입니다.
참신앙은 모든걸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주받을 몸에서 자유합을 얻은 그 감사와 감격에 모든걸 품고 살아갈수 있는 넉넉하고 풍성한 사랑을 소유한 성도님들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사람들을 향해서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기보다 주님안에서의 넉넉한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남으로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큐티를 하는 목적이 되어야하고 성경을 아는것으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그 삶을 본받아서 그 삶을 따라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인이 되어야하는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 하나님으로서 모든걸 할수 있고 세상을 멸망시킬수 있고 세상을 무너뜨릴수 있고 권력자들을 다 발아래 무릎 꿇릴수 있는 예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던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힘을 나타낼수 있지만 힘을 내세우고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묵묵히 주님이 나에게 지워준 그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다해 섬기고 죽으러가는것이 바로 참 신앙인의 모습이고 큐티를 하는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큐티가 신앙의 본처럼 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며 신앙의 본은 말씀을 묵상하는것으로 그쳐서도 안되며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큐티를 위한 큐티를 하는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큐티를 하는것인지?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큐티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서 큐티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곧 큐티라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신앙이라는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아는것이 신앙입니까? 아니면 그 아는것을 행하는것이 신앙입니까? 예수님이 귀신도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아는것과 행하는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신앙인것입니다.
큐티가 신앙생활입니까? 아닙니다. 큐티는 큐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이 되어버리고 큐티를 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것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신앙의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하면 나 큐티하고 나서 밥사줄께라고 말하면 안되고 그 즉시 밥을 사줘야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하는데 나 큐티먼져하고? 라고 말하는것이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배시간이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하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데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길을 묻는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길을 묻는 사람의 길을 가르쳐주는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것이 중요합니까? 둘다 중요하죠. 그러나 믿는사람에게는 예배가 중요하지 길묻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묻는 사람에게는 다른사람에게도 물을수 있는 것이니까. 나말고 다른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고 자기는 예배드리러 갈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까요? 안 받으실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받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도 소중하지만 형제와 화목하는것도 못지않게 소중한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때 신앙의 모양은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행실에서 신앙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선순위의 실종입니다. 예배도 중요하지만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는것도 소중한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것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것 이것이 율법의 중심이고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이웃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는것이 당연한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선되지 이웃은 우선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말을 많이 듣습니다. 교회가는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가지 사람보고 가느냐? 맞는말 같습니다. 그러나 전 맞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교회가는 이유는 나와 한몸된 한 형제들과 하나님께 함께 예배드리러 가는것입니다. 교인들은 나와 다른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안에서 한몸된 사람들입니다. 전 나와 한몸된 한 형제들을 만나고 함께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갑니다. 한 지체들과 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라는 건물보다 전 한 형제된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로 맺어준 나의 지체들과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것은 큐티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라면 교회안에서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고 형제를 돕고 마음을 함께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말씀드려 봅니다.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것이 예수님에게 한것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데 양과 염소를 나눌때의 조건이 바로 작은 소자에게 한것을 묻습니다. 병들었을때/배고플때/목마를때/돌아본 사람은 양이요. 돌아보지 않은 사람은 염소가 되어버립니다.
둘다 주여! 하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실것입니다. 말로는 주여! 하고 부를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큐티를 평생에 걸쳐서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큐티가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큐티가 신앙생활이 되어버립니다. 큐티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건이 아닙니다. 큐티를 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지? 그 사랑하고 섬기는것을 보여주는것이 바로 소자를 돌보는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건이라는것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잘 따라 순종하고 사는지? 한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전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남들을 정죄하는 모습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전 차라리 안하고 맙니다. 새벽기도도 안갑니다. 철야예배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릴적에는 저도 많이 참석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냥 다른 형제들을 정죄했습니다. 왜 예배 나오지 않느냐? 왜 새벽기도 안하느냐? 왜 큐티 안하느냐? 왜 철야예배안하느냐? 왜 수요예배는 참석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들이 참석하든 안하든 나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신앙을 가지고 남을 재서는 안됩니다. 나는 이거하는데 왜 당신은 안합니까? 라고 말하는것은 결국 나의 기준에서 상대방을 정죄하는것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술안먹는데 왜 당신은 술먹습니까? 전 담배안피우는데 왜 당신은 담배피웁니까? 전 놀음안하는데 왜 당신은 놀음을 좋아합니까?
이런것들이 바로 정죄입니다. 나는 큐티를 하는데 왜 당신은 큐티를 하지 않습니까? 큐티하면 뭐가 생깁니까? 큐티하면 신앙이 성숙합니까? 물론 그럴수 있습니다. 안하는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걸 안한다고 해서 문제가되고, 한다고 좋은것은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간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되는것입니다. 내가 먹거나 안먹거나 큐티를 하거나 안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것은 내입에서 다른사람을 정죄하거나 나의 행동에서 다른사람을 정죄하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것이 중요합니다. 새벽기도 참석한다고 못하는 사람을 나무라서는 안되는것입니다.
참신앙은 모든걸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주받을 몸에서 자유합을 얻은 그 감사와 감격에 모든걸 품고 살아갈수 있는 넉넉하고 풍성한 사랑을 소유한 성도님들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사람들을 향해서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기보다 주님안에서의 넉넉한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남으로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합니다.
그것이 큐티를 하는 목적이 되어야하고 성경을 아는것으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그 삶을 본받아서 그 삶을 따라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인이 되어야하는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 하나님으로서 모든걸 할수 있고 세상을 멸망시킬수 있고 세상을 무너뜨릴수 있고 권력자들을 다 발아래 무릎 꿇릴수 있는 예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던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힘을 나타낼수 있지만 힘을 내세우고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묵묵히 주님이 나에게 지워준 그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서 목숨을 다해 섬기고 죽으러가는것이 바로 참 신앙인의 모습이고 큐티를 하는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큐티가 신앙의 본처럼 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며 신앙의 본은 말씀을 묵상하는것으로 그쳐서도 안되며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 한국기독교정보학회
글쓴이 : 신재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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