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죄인의 손안에 놓인 하나님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와 현대 교회의 모순된 실상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로이드 존스의 평에 따르면, 교회 역사상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교할 수 있다면, 그는 에베레스트와 같은 존재’이다. 그를 빼고는 미국 교회 역사는 물론, 미국의 정통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말할 수 없다. 그런 그가 18세기 미국의 1차 대각성 부흥 운동을 주도하면서 남겨 놓은 유명한 설교가 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 of an Angry God)이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무심히 듣거나 웃으면서 지나칠 수 없는 설교이다. 왜냐하면 이 설교에는 불신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그들이 반드시 직면하게 될 두려운 지옥불 심판에 관해 너무나도 생생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심오한 신학 사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치고 너무 단정적(conclusive)이고, 가학적(sadistic)이지 않은가’하는 의심과 비난을 하고도 남을만한 설교이다. 그러나 교회사가들 중에 매사추세츠 주의 엔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에드워즈가 행한 이 설교와 함께 세계 교회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진정한 회심과 영적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회자와 성도에게서 매우 낯선 풍경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에드워즈의 설교와 정반대의 내용을 전하면서도 에드워즈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의 시대에 있었던 부흥이 오늘 우리 시대 가운데 재현되기를 갈망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에드워즈가 전한 이런 유의 설교에 부담을 가질뿐더러, 심지어 부정적으로 여기면서도 에드워즈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현대 교회 성도들의 모순된 실상(實狀)에 관해 스프롤(R.C. Spoul) 목사는 에드워즈가 이 설교로 미국 대각성운동의 불씨를 지폈지만, 오늘날에는 그 제목이 정반대로 이해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복음주의에 속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더 이상 죄인을 향해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을 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과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고분고분해 진 하나님을 찾고 있다. 바로 이런 모습의 하나님을 가리켜, 스프롤은 ‘분노한 죄인의 손안에 놓인 하나님’(God in the hands of angry sinners)이라고 풍자하였다. 기막힐 정도로 위험스럽고 두려운 우리네 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패러디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감추려는 현대 교회의 다양한 시도들
죄인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특정 시대에나 활동하신 분으로 가두어두려는 노력들이 교회 안에서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이미지(개념)를 바꾸는 일이다. 이 시대의 하나님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거나 신중하거나 엄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애정이 넘치며 때로 유머와 위트를 겸비한 하나님을 선호한다. 하나님은 성도에게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구원이든 간에 그것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분이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신앙을 조건으로 삶의 행복과 성장과 축복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취향을 이해해야 하며,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과 불길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받아주고, 끊임없이 용납해 주어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세상과 구별하는 문턱을 높일 이유가 없으며, 불신자와 구별된 성도의 삶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누구에게나 희망을 줄 수 있는 보편화된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는 듣는 이로 하여금 죄책감, 당혹스러움, 절망 따위의 감정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복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만 한다면 세상과 천국에서 누리게 될 지복(至福)이 예비되어 있다는 식의 무한 긍정주의 내용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손안에 놓고 좌지우지 하려는 이러한 시도만큼 하나님의 커다란 공분(公憤)을 살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미 ‘허물과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엡 2:1) 자신의 죄상에 대해 인식하지 못할뿐더러, 그 죄상을 철저하게 깨닫고 각성하여 마음을 도려내듯 절절한 심정으로 그러한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 지향하는 목표요, 그로 인해 주어지는 참된 부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핑계로 자기 손안에 있는 욕망과 오만과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성품을 애써 감추는 행위야말로 저주받을 불경건이요, 가장 저질스런 죄악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경외심은 참된 신앙의 핵심
거룩과 공의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이다. 죄악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평가와 심판의 주권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결단코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은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실 참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경외심’(시 111:10; 잠 1:7; 욥 28:28)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요구이시며, 성도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다(*).
캘거리개혁신앙연구회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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