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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가진자들의 복종 그것이야 말로 성령충만한 삶..

빌립보서 2장 5절~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서 많은 신앙인들은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우리는 날마다  꿈꿉니다. 성령충만한 삶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으며  온전한 신앙인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삶을 꿈꿉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행복합니까?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목사님들은 그렇게 살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목사들이 세상에서 손가락질받고 욕먹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불륜6걸이라고 해서  많은 뉴스를 타는 분들이 계시죠.  우리도 창피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뿐만입니까?  우리 주변의 목사님들의 모습에서도  부끄러운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스개소리로  아내두들겨 패는 직업군을 조사해본결과  첫째가 의사요 둘째가 목사요 셋째가 경찰이라고 한다고 하죠.  아내 두들겨 패는 직업을 보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스트레스가 정말 많은 직종이라고 합니다. 

 

목사라면 사랑이 풍성할텐데? 라고 착각하는 많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매님들....목사님들에게 시집가는거  고려해보아야합니다.   목사님들 그렇게 부자도 아니고  늘 쪼들리면서 어렵게 삽니다.  그걸 감당할수 있어야하고  사모로서의 체통도 유지해야하니 정말 어려운 직책이 목사 사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맞아도 티내지 말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단상에서는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목사님의 얼굴을 보면  아마 마귀처럼 보이는 분들이 사모님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됩니다.   이렇게  많은 신앙인들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는데  현실적으로 볼때 우리는 탐욕을 절제하기 힘들고 분노를 억제하기도 힘들고  사랑하고 싶어도 미워할수 밖에 없으며  원수를 삼고 싶지 않은데 원수가 되기도 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벌어지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서  그것을 원하고 사모하고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오해때문에 비롯된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령충만한 삶은 우리가 살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수 있는 그런 환상이고  우리의 현실은 그런 환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자포자기  하고  그냥 이대로 살다가 천국가면  온전해 지겠지...하며 변화된 모습을 그리며  이땅에서만큼  그냥 편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게  가난하지 않게 사는것으로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살게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땅에서의 성령충만한 삶을 추구하기보다  기복신앙에 치우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드리고자 하는것은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고 변화해야할 부분이 있다는것을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자 합니다.

 

성령충만한 삶의  의미를  한번 찾아보아야합니다.  저는  성령충만한 삶의 근본은  우리가 너무 잘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함께하실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가 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해지면  전도를 잘하게되거나  능력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죄를 짓지 않게 되거나 하는 식의 생각을 하게되는데  이런 생각들이  기분을 들뜨게하고  공중에 붕뜨게하는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가끔 성령충만한 삶 하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과연 그런가요?   성령님이 함께하는 삶이라는것은  특별한것처럼 느껴지지만 특별하지 않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우리의 사고 방식 생각이  변하는것 이상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일을 할때  내가했다. 라고 말하는것과  성령님이 함께 했다.라고 말하는것...좀 의미가 어렵죠.  저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충만은  바른 인격을 갖는것이다. 라고 표현하면 좀더 쉬울듯합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합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철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공부하고 그렇게 살려고 애씁니다.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의 삶을 보면  오히려 기독교인인 제가 많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됩니까?  아 저분 참 훌륭하다. 라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십시요. 거기에 우리는  저분이 믿는 분이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볼수 있어야합니다.  내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낼수 있어야 하는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것이죠.   조금 이해하기가 쉬어졌죠...

 

우리의 인격이 훌륭해지면  그 나타나는 향기가  내가 될수도 있고  부모가 될수도 있고  또 그가 믿는 종교가 될수도 있습니다. 저분은 불교인이래....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았대.  저분은 천주교인이래  마리아의 순결한 영성으로  하느님을 잘 믿어서 그런 모습이 나타난거래....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습에서도  그런 향기가 나타나야 하는것입니다.  저분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찬이래....

 

우리의 모습에서 누가 나타닙니까?  내가 나타납니까?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인격적인 모습  인간적인 훌륭한 모습을 갖는것은  인본주의다 해가며  그것은 성령충만한 삶이 아닌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해야?  선교사가 되어야 목사가 되어야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을 만나면 그분은  참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천주교인인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런일이 벌어지는건  천주교는  행위구원론자들이기때문에  착한 행실을 통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은혜구원론자들이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기때문에 인격적 성숙과 착한 행실에 대해서 너무나 등한이 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세상에서도 그런 분들을 만나기 힘든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더이상 이 기독교는 성장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욕만 먹는  불의한 종교로  낙인 찍혀버릴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내가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온 종교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행위를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은혜를 가르치고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세상의 종교는  자기의 존재가  신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나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된것이라고 말하는 종교입니다. 

 

곧  기독교는  중생,거듭남의 종교이고  세상의 종교는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은것으로 끝인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세상의 종교에서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권세를 얻었는데 바로 이것이 중생,거듭남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얻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육적으로는  아직도 이땅에 살고 있기에  육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것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을 배우는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할  인격인것입니다.  나타나야할 육체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영적으로만 순결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육은 더러운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원론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원론적인 삶으로 인해서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니  우리가 세상에 나가 살때는 거룩하게 살지 못해도 되고  교회안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보이는것이  어쩌면 이런 사고의 틀에서 비롯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우리의 육체를  제어하여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래참고,자비롭고,선하며,절제하고,충성하고,온유하고,겸손하고......이런 모습들이 영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에서 나타나야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가 어디서 발견할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복종에서 볼수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글을 쓸때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빌려온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몸 곧 썩어질 몸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계셨고  그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신것이죠.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는것을 너무나 잘알겁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할수 밖에 없었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힘으로도 할수 있는데?  왜 힘으로 하지 않으셨을까요?   진정한 힘은 권력이 아니라  복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가장 큰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것이 바로  우리가 힘으로서 무엇을 할수 있다는것이 아니라  힘으로서는 할수 없다는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패했습니까?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함으로 복종함으로  오히려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고 사랑으로서 승리하셨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승리할수 있는길은  세상을 악으로 규정하여 힘으로 그 악을 척결하고 물리치는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해야할  곳으로 보고  세상을 이기는 길이 힘이 아니라  순종과 복종으로서 세상을 무릎꿀려야 하는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인것입니다. 

 

세상은 쉽게 우리에게 무릎꿇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무릎꿇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기는 것이 그들은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무릎을 꿇는것은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힘과 권력을 내세우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으로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이땅 기독교는  가진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자들입니다.  가진자들은  그 가진 힘으로 세상을 복종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힘에 잠깐동안 복종하는것처럼 보일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들이 힘을 가지게 될때  기독교는 참패하게될것입니다.  그것은 힘과 힘으로 대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자로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으로서  이땅의 주인으로서  가진자로서  권력과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분이 행하신것은  세상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고  복종하여  십자가를 지신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그 모습이 바로 성령충만한 모습이고  예수님께서도  성령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그 일들을 감당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것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그런 모습에서 저는 한숨을 쉽니다.   가진것이 없으면 없는대로 복종하는 모습이 성령님이 원하는 모습인것입니다.  

 

성령충만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에배소서 5장에 너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니 이 말씀으로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서  맺고자합니다.    집안에서 아버지는 가진자로서 아내는 없는 자의 모습으로    직장에서는  사장은 가진자로서  직원은 없는자로서...한 국가에서는  권력자는 가진자로서  국민들은 없는자로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가진자로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없는자들의 복종을 요구하시지만  또한  가진자로서의 복종을 우선적으로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이장로가 대통령입니다.  그가 권위와 권한으로서  가지지 못한자들을  복종시키고 굴복시키기위해서 권위와 권한을 맘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일까요? 

 

이런 모습을  보이는 중에  많은 목사들은  이런 권위와 권한에 복종하는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맞습니다.  권위와 권한에 복종하는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   권위와 권한에 복종하지 못한 자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아니면 권위와 권한을 맘대로 사용한자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맡은자에게  충성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진자에게 복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책임을 가진자에게 그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책임을 가진자가  충성하지 못하고 복종하지 못했을때는  하나님은 분명히 그 책임을 묻습니다.   복종해야할 책임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책임을 뭍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합니다.  만약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아내탓을 하는 남편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아내를 책망하기 이전에 남편의 책임을 먼저 물을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장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사장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회사가 망했다면  종업원이 망한 회사의 책임을 지지 않고  사장이 모든 책임을 다 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도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그것은  책임을 가진  권력자가 책임을 져야하는것입니다.  국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진자들이  만약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낮은자들에게 묻는다면?  이것보다 더 무책임한 일은 없을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바로 이런 삶입니다.  가진자들이  그 가진것을 책임질줄 아는 모습을 갖는것   곧 맡은이에게  구할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최고의 권위자인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에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라는것입니다. 

 

법을 지켜야할  권력자가 오히려 법을 지키지 않고  법으로 국민을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라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법이라는것은 권력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져있으며 권력자가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법인데도 불구하고  법치주의 운운하며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의 모습이고 이것이야 말로 책임자가 무책임하게 모든 책임을  책임이 없는자들에게 전가하는 모습이라고 볼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땅을 다스리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대한민국의 기독교의 모습은  성령충만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이 세상을 혼동에 빠뜨리고  고통에 빠뜨리고 있음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 기준을 잃어버리게됩니다.   세상의 철학도  과학도  정치도  그것이 추구하는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는 자기 만족에 빠져있습니다.  권력자를 자기 손으로 뽑았다고 생각하는 그 만족이 지금 불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겸손해야할  기독교  복종해야할 기독교 순종하고  낮아져야 할 기독교  특히  가진자들이 복종해야할  기독교가  그 기준을 잃어버리고  권력을 추구하고  세상을 우리의 힘앞에 복종시키고 굴복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꿀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힘을 얻게될때  우리는 그 힘앞에  우리의 신앙을 버릴수 없기에  목숨을 바칠수 밖에없는 상황에 처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성령충만한 삶을 버리고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고  세상의 부와  세상의 가진것으로  우리가 복종해야할 위치에서  예수님처럼 복종해야할  그 모습을 버리고  사단이 원하는데로  돌로 빵을 만들고  사단에게 절하면서 이땅의 주인이 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 성령충만한 삶은  바로  가진자인 내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복종하고 섬기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가진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당신들은  이미  천국의 주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미 모든것을 다 가진자들입니다.  

 

망해가는 이땅  쓰러져가는 이땅   통곡소리로  날마다  비명을 지르고  목숨을 끊어서  이 괴로운 세상을 마감하는 많은  길없이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길이 되어야하고  그들을 하나님앞으로 불러오는  제사장들이 되어야하고  천국을 다스리는  왕의 모습으로서  이땅의 많은 절망하는 분들의 희망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분이 붕떠서  죄를 짓지 않고 능력을 행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는것이  성령충만이라는 착각속에서  헤메이며  참된 인격의 성숙과   사랑의 복종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될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세상이 감당해야할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너무나 잘알기에.....우리의  모든 부족한것들과  죄된 모습들과  악의 모습들을 다 용서하시고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복종하시어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우리를 깨끗게 하셨기에   우리는  행복할수 있지만  이땅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땅을 심판하는 심판주의 모습이 아닌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랑으로서  이땅을 위해  피를 흘릴수 있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성령충만한 삶임을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