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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은혜 로운 말씀

우리의 인생은 소통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하나된다는것에 대한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우리는 늘 우리는 고민하고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고민들이 어떻게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것이며 예수님을 닮은 삶인가? 하는 곰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고  성경을 잘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한다며 입신기도를 강조하는 분들도 계시고 방언을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재산을 내놓아야한다.  욕심이 없어야한다.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죄를 짓지 않아야한다. 죄가 없어야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해답을 찾기위해서  이교회 저교회 돌아다녀봅니다.  그래서 어떤 집사님은  이런 교회에 다니고 싶다고 하는 책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들도 쓰게됩니다.  다들 무엇인가  해답을 찾기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 가운데 해답이 있기도하고 없기도합니다.  핵심적인것을 보면  딱하나로 요약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한다.  작은 예수가 되어야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를 닮아야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집니다.  예수님처럼 집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하는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풀어야하는가?  예수님처럼  사는것이 무엇인가?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도데체 예수님을 닮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3년만 빡세게 살다가 죽는것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는것도.....도데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것에 대해서 또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는 하나되고 통일된다고 하는데? 도데체  하나되는 것은 무엇이고 통일은 무엇이고?  성령님이 하나되게한것을 지킨다고 하는데  성령님이 하나되게 한것이 도데체 무엇인가?  이런 고민들은 어쩌면 당연한 고민들일것입니다.

 

저도 해답을 드릴수 없습니다.  제글은 해답을 드리기 위한 글은 아닙니다.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방향이 맞다면 수긍할것이고 틀리다면 수긍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말은 대부분 수긍할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는것에 대한 기초이고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  자기를 닮으라고 하신것에 대한 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모든 성경의 핵심이고  주제이고  우리가 배워야할 인생의 가치관입니다.  사랑하면 생각나는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사랑?  애인과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아가페적으로 물었을때 왜 베드로는 친구간의 사랑으로 대답을 했을까요.  그렇게 밖에 대답을 할수 밖에 없었을까요?  도데체 아가페적 사랑이 무엇이고  친구/부모/자녀/애인과의 사랑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아가페적 사랑은 바로 사랑의 아주 기초이고 이 기초위에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서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닮는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우리의 삶이라는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되게 하는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무너질것이고  사랑이 없는 국가도 무너지게됩니다.  사랑이 없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참된 가르침이 아니고  사랑이 없이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사랑은 바로 목숨을 거는 사랑인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닮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바로 이런것입니다.  그러나 왜 안됩니까?  그 이유는 목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는 소용이 없는 자이고 제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 자야지만 하나님께 합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할수 있는 인간은 별루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것말고 다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생은 해답이 없이 헤메일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알고자 하는 자들도  이 사랑이 어떤것인지를 알지 못해서  자기는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사람이 죽을때  몇가지 후회한다고 하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욕심부리며 산것을 후회할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아무것도 갖고 태어나지 않고 떠날때도 갖고 가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면서 산것을 후회할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못한것도 후회하겠지요.  이 모든것을 종합해보면  결국  인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지 못했다는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것이 무엇일까요?  이 해답은 우리가 찾아야 할 문제일것입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것은 하나된다는것인데  하나된다는것은 소통한다는것입니다.  곧 통일된다는것이고 통일된다는것은 이신전심이 된다는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예수님과 하나되고 성령님과 하나된다는 것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과 이신전심으로 마음이 통하고 소통하게 된다는것입니다.

 

소통하게되면 뜻이 통하게 되는것이고  뜻이 통하게되면  그 뜻을 행할수 있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뜻은 바로  높은곳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하나님의 요구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요구이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게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게 되는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때문입니다.  정이 끊기고 더이상 아이를 낳을수 없음에도 이삭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제 믿게 된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된것은 아브라함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인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믿음을 준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수 있게된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나서 믿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믿을수 있을만큼 우리를 이해시켰고 우리에게 믿음을 보여주신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큰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들을 주신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시면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자기의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된것은 바로 이런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가 뭔데  내가 무엇이관데? 나를 사랑해서 나에게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했는가?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게되고 하나님의 말슴에 순종할수 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자기 아들을 주시기 까지 사랑했는데  이 예수님을 믿는것을  하나님이 반 강제적으로 하십니까?  믿는것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설득시켜서 믿게하십니다.  물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것은 맞지만  거듭난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성화시키는것이 아니라  천천히 천천히 우리를 설득시키십니다. 

 

이 설득의 과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의 과정과  우리의 거부와 순종의 반복이 바로 신앙생활인것이지요.  처음에는 반항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역경이 깊어지고  신앙의 과정이 오래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반항보다 순종이 늘어나게 되는것입니다. 

 

성화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들은 거짓말입니다.  거듭난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것이고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는것입니다.  만약 성화의 과정이 없다면 애시당초 거듭난적이 없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수는 있습니다. 

 

거듭나는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음인데  이는 복음을 들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지만 성령님이 역사하는것이고  성령님이 역사해야지만 거듭날수 있고 거듭난자들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수도 있고 못깨달을수도 있습니다.   이 깨닫는 과정은 각각  다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여정과 이삭의 여정과  야곱의 인생의 여정...요셉...모세등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 인생의 과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여정이 다르지만 믿음은 하나이요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것이었습니다.  이사랑은 바로 나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죽을것임을 예언한 그 예언을 믿음이요  이제는 그 예수님이 오신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방법을 배우는것입니다.  율법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것입니다.  율법에는 속죄의 율법과  상급의 율법이 있습니다.  곧 행하면 복을 받는것이 있고 죄를 용서받는것이 있는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것은 속죄의 율법이요 구원이후에 관련된것은 상급의 율법입니다.   

 

곧 속죄함으로 죄를 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것은 바로 속죄의 율법인데 속죄의 율법을 행함으로서 죄를 사하는것이 아닙니다.  속죄의 율법은  예수그리스도가  죄를 속하려 오셔서 제물이 되실것임을 예표하는것이었습니다. 곧 오실 예수님  나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되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속죄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수 있었던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것입니다.  영원히 속죄할수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죄를 사하는 방법으로 주신 제사로 속죄했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제물을 사고파는것을 책망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속죄제사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음을 또한 알수 있을것입니다.

 

상급의 율법은  행하면 복이요 행하지 않으면 저주인것입니다.  이것을 행하면  의롭다 칭함을 얻게되고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됨으로서 죄인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곧 행위로  선과 악이 갈리는것이지요.  이 상급의 율법을 범했을 때 속죄의 율법으로 죄를 속하게 되는것이 바로 율법인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었으니  속죄의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수 있었는데  이 속죄의 율법이 죄를 완전히 사할수 없었으니 결국은 그리스도를 의지해야만 했던것입니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데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해서 결국은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고 심판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율법외에  전통까지 만들어서  이것으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여  잘못된길로 가게 된것입니다.  성경은 이 율법을 행하고 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버린것은 성경이 아니라  이 율법의 행위에 관련된것이고 전통에 관련된것입니다.  바울의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성경임을 아셔야합니다.  성경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은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행위를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이 구약이 말하는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의 핵심입니다.  율법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엇이냐? 이것이 어려운것입니다.  이것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것이 사랑이라면 무조건 목숨을 버리는것인가? 이것이 사랑인가? 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헛된 죽음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버리는것이 사랑이라면?  다들 목숨을 버려야 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우리가 전파해야할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아닙니까!  이것을 깨닫는자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예수님을 영접할것이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왜 나를 위해서 죽느냐고 반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차이인것입니다.

 

사랑....예수님의 사랑  하나됨.....소통.......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합니까?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해야하며  내 아내와 내 자녀와  내 이웃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것일까요? 이 소통을 고민하고 이 소통의 방법을 깨닫고  참된 소통을 하는것이 바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될것입니다. 

 

소통이란 존중입니다.  인간을 존중하는것  하나님을 존경하는것  자연과 소통하는 것은  자연을 존중하는것이요  세상과 소통하는것은 세상을 존중하는것입니다.  존중은 바로 나를 낮추고  다른이를 높이는것입니다.  만물중에 가장 으뜸인 인간은  또한 만물을 가장 존중할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 땅을 맘대로 하라는것이 아닙니다.  이땅을 존중하고  땅에서 나는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을 존중하지 않고  이 세상을 존중하지 않을때  그 결과는 결국 인간의 패망으로 다가오게 될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끼리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인간은 서로 같이 망하는것입니다.  전쟁도 소통이 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요.  다툼도 소통이 되지 않아서 그런것입니다.  소통과 함께  긍휼함 이해함이 있어야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긍휼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이 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것은  우리가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소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님은  직원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규가 없고 노사관계가 원할해지고 그것은 결국 회사의 발전을 가져올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소통 자녀와의 소통이 해결될때  가정내의 불화는 그칠것이고 자녀의 탈선도 막을 수 있을것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소통이 될때  나라가 바로서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불통이되면  회사는 망할것이고 가정은 불화가 끊임없을것이고 나라도 어려워질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되어야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지는것입니다.  그럼 이 소통의 핵심은 또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이고  또한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려고 하는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것이라고 하지 않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내것으로 만드는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중에 가끔씩 입신이니 하며 하나님과 하나되는것을 하나님을 내안에 내가 하나님안에 있다고 말하는것을 말그대로 해석해버리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렸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아닙니다.  영혼은 원래 죽지 않습니다.  첫번째 태어나고  두번째 태어나는것이 바로 거듭나는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는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서 죽었다고 하는것은  그 죽음이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단절이 죽음이요  하나님과의 단절을 해결할수 있는것이 성령님 뿐이라는것입니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들은 이제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소통와 관계가 열리게된것으로 우리를 소유하려고하지 않습니다.  만약 소유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소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려고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내것으로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회사가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회사를 망하게 하는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만을 위한 하나님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축복을 받더라도 나/우리교회/우리회사/우리가정입니다.  믿는사람끼리 축구시합을 하면 하나님이 누구편 들어줘야 합니까?  믿는사람끼리  취직경쟁/입학경쟁을 하게될때 누구편을 들어주기를 요구하는것입니까?  이런 편들기를 요구하는것이 바로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는것은 소통하는것이 아닙니다.   소통하는것은 내것으로 만드는것이 아닙니다.  회사를 주인것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직원들의 회사가 되어야하는것이 참된 소통입니다.  가정은  남편의 것이 아닙니다.  가정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교회도  우리 교회만의 소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교회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이런점에서 대형교회의 추구는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는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소유하는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것으로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도 사랑은 소유하는것이 아니라 자유르 주는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들과 차별이 있습니다.  그 차별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것?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구제를 할때 오른손이 하는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것은 바로 소통입니다.  돈을 주는것이 구제일수 있지만  돈을 받는 사람은 그 돈을 받는것이 아니라 마음을 받기를 원합니다.  돈만 받으면  받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합니다.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주는 방법이 바로 소통입니다.

 

교회가 구제를 떠벌리면서 하는것이 바로 소통하는것이 아니고 사랑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용히 하는것이고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것입니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면서 기쁘게 구제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사랑인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이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두가 다 자기것을  자기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것입니다.

 

참된 소통은 바로 내것을 주는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것을 나누는것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내 자랑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것이 바로 참된 소통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것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길이 이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전파하는것이 전도입니다.  참된 전도는 하나님을 소유케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는것입니다.

 

참된 인격자는 바로 이 소통의 기술을 배운자입니다.  소통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것을 포기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여기까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웃과 소통하는 방법을 깨닫는것 말입니다.

 

이 깨달음이야 말로 참된 사랑을 깨닫는것이고 성화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꼭 깨달아야 하는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 소통을 바르게 깨달은 자들이고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안자들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판 형제들을 만났을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수 있었던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유하기를 포기하고  욕심부리기를 포기하고  참된 사랑으로 소통하는 날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가기 직전이거나  고난을 많이 겪었을 때입니다. 죽음앞에서 욕심이 사라지고 고난속에서 참된 사랑을 깨달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유익을 위해서 주는것이지 미워하기 때문에 주는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참된 소통을 깨달을때까지 우리는 날마다 고민하고 고통하며 기도하고  애통하는 과정을 겪게됩니다.  이 과정을 마친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했다고........

 

사랑하는 주안에서 하나된 형제님들  언젠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한 형제로 자매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것도 남의것도 없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것이 다 내것이 되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질것입니다.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이땅에서  몇년동안 훈련하고 고생하는것입니다.  이 고생이 끝나는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실것입니다.  그것도 몇년동안 사는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나라를 말입니다.

 

영원히 사는 나라  내것도 없고 남의것도 없고  모두가 내것이고 남의것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 세상말입니다. 참된 소통이 있는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완전한 나라가 주어질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이땅에서 소통을 배우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성숙하는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