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7영리/교 회 론

바른 설교를 듣는 교회에 다니고 싶다

바른 설교를 듣는 교회에 다니고 싶다
- 목사와 저주 설교, 이에 대한 대응 -

  죤 스토트( John Stott)는 “설교의 실제는 설교자의 인격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회가 비인격적인 목회자의 강압적 설교로 성도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목회는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고 목회에 중요한 부분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목회의 바른 원리로 바른 설교가 선포 될 때  한국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의 전횡으로 교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을 막아야할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1:7)라고 하였다. 그러면 먼저 설교의 의미와 교회 공동체에서 설교를 주로 담당하는 목회자의 자세를 살펴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I.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의 원형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61장의 말씀을 읽고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 하였느니라’”고 설명(눅4:16-21)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설교를 공식적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지만 설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설교와 관련되어 신약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헬라어는 ‘케루세인’(kerussein)이다. 이 단어는 53번에 걸쳐 ‘전파하다’(preach)로, 5번은 ‘공포하다’(publish)로 번역되었다.  또 다른 신약성경의 단어는 ‘유앙겔리조’(euaggelizo)이다. 헬라어의 두 단어가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말하다’라는 의미로 복음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파되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는 아무 메시지나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유앙겔리조)과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케루세인)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심은 “복음(유앙겔리조)을 전도케(케루세인)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라는 말씀은 설교에 대한 정의를 잘 나타낸다.
  교회의 중심요소 중의 하나는 설교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믿기 때문이다. 설교의 메시지는 복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고, 그 상황에 적절하며, 필요에 응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의 마음에 청중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채워지지 않고 강단에 선다면 의례적인 설교이고 생명력이 없는 죽은 설교일 것이다. 이렇게 상황에 성육신적인 접근을 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라 할 수 있다.

II. 설교자로서의 목회자

첫째, 설교자는 말씀사역에 대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롬10:13-15) 설교를 맡은 자는 자신뿐 아니라 그 공동체가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의 은사를 확인해야 한다. 소명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일정한 과정만을 거치는 (신학교 과정이나, 시험으로 목사의 자격을 노회로부터 받는 것) 것으로 설교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 공동체는 사도행전 6장에서 보여주었듯이 일군(집사들을 세우면서도)을 세울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세우는데 중점을 두었고  “온 무리가 기뻐하여”라는 공동체의 인정이 있었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과 삶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목회서신들을 통해 설교자가 가져야할 경건의 삶(딛2:6-8), 인품(딤후2:24)에 대해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 우선됨을 알 수 있다. 물론 말에 대한 기술 즉 전달하는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 제도적 교회는 자칫 설교자의 재능만을 보고 소명을 확인하려 하기에 그들의 말솜씨에 교회공동체는 때때로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슬픈 일이다.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로서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설교자의 책무는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것인데 “이는 성도를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함”(딛 1:9)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설교자들은 가르침과 선포 사역에 있어 말씀에 열중하며 삶으로 보여주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설교자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깊고 넓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데는 정확한 이해 그리고 해석(exegesis)과 주해(exposition)가 필요하기에 바른 신학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설교자는 누구나 자신의 신학을 갖고 있고 그 신학은 주로 신학교의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어 진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지적능력을 갖추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며 기본적으로 갖추지 못했다면 설교자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넷째, 설교자는 전하는 말씀으로 삶과 시대를 적용하고 조명하는 영성이 있어야한다. 설교자가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민감성과 함께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해 복음의 소식을 증거 하는 교회 밖으로의 설교가 교회안의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돕는 것과 동일하게 중요하다. 결국 교회는 세상을 향해 있기에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설교의 현장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설교사역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언제나 설교를 바르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며 또한 삶의 필요들을 관찰해야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변화하는 이 세상과 연관시키려고 몸부림치며 깨어있는 영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III. 저주설교란 무엇인가?

교인을 향해서 표적설교, 협박설교, 저주설교 등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설교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중상, 비난, 저주, 모욕, 등의 어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과도하게 남용하여 훼방, 또는 욕설로 공포감을 심어주는 설교를 말할 수 있는데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복주의를 바탕으로 한 축복과 저주를 혼용하여 두려움을 심어주는 설교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을 보면 기복주의를 장려하는 목회 풍토가 만연하다. 이는 기복 신앙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문화의 영향이다.  물량주의적 사고, 세속주의적 목회 기준, 상업주의의 팽배, 성공주의의 목회관 등 비 신학적 목회 풍토에 목회자와 교인들은 병들고 있다. 이런 기복신앙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에 관심을 끌게 하고 헌금을 강요한다. 마치 설교자 자신이 축복과 저주를 줄 수 있는 것처럼 과시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허상을 쫒게 하거나 두려움을 갖게 한다.

예) 헌금 봉투를 들고 “이것을 헌금이라고 바치며 복 받으려고 하느냐?” “목사 차가 너무 후졌어” 또는 “목사관이 이 모양이니 그러고도 복을 받겠어?” 하며 헌금을 강요 “헌금을 많이 바치면 축복받고 인색하면 암에 걸려 죽는다.” “십일조 도둑질하고 장사 잘되겠어?”라는 등의 비성경적인 설교.

2. 목사(설교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설교

신약 성경에서의 목사라 불리는 목회 직은 직책이라기보다는 은사의 하나이다. 초대 교회의 직책은 집사와 장로(감독)뿐이었다. 교회는 예언자, 교사, 목사, 복음전하는 자(엡4;11-12)의 목회적 은사을 맡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안의 직위인 감독과 장로의 용어가 서로 교환하며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딛1:5-7) 특히 이들을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감독들 episkopoi, 빌1:1, 장로들 presbyteroi 행11:30)은 어떤 특정한 한사람이 독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고(엡1:22-23),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함께 순종 할 때(엡2:22) 주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 유지는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각각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를 위해 은사가 사용되어져야 한다.(벧전4:10)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의 목사 칭호는 너무도 다양하고 출처불명의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불의 사자, 주의 종, 하나님의 종, 예언의 종, 제사장등 어떤 특별한 권위가 목사만 되면 자동으로 부여된 것처럼 스스로 기만에 빠져 있다. 목사만이 가장 큰 능력과 권위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니 자연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과장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주의 종”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하면 벌을 받는다는 예를 들어 설교 시에 두려움을 심어 주어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억지로 끌려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교권주의자들이 저주설교를 많이 한다.

예)아래의 설교는 지난2003년 12월 22일 성도중앙교회에 부흥회 설교 차 온 경서교회 홍00목사의 설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사람의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할 도리를 다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오래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렇게 악랄하고 잘못된 일은 우리가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자가 있어요. 못 박혔던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교인들을 가리키며) 바로 그들이 오늘 여기에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따귀를 때렸습니다.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던 그 무서운 족속들이 이 안에 있어요. 그 중에서 주범이 세 명이라고 그럽니다. 그 세 명은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교인들, '아멘') 창자가 터지고 뇌가 터져버리고 중풍이 들어 교회에서 기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아멘).

하나님의 종의 멱살을 잡은 자에게 다리가 부러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주받을 자가 따로 없어요. 내가 보니까 여태까지 제가 생각한대로 저주받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는 자들이 저주를 받고 다리몽뎅이가 부러지고 창자가 터지고…. 우리가 전국 방방곡곡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기자들도 형사들도 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아십니까? 담임목사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저주받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지금 듣고 왔습니다. 이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가리키며) 이들 중에 화인 맞을 자가 있는 데 이들이 지금 마음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저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들이 떳떳하다면 교회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저들의 심장에 들어가 썩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불방망이로 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가족을 멸종시킬 줄을 믿습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 말씀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3~4대까지 복을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천대까지 저주를 한다고 그랬어요. 능력 받은 하나님의 종이 저주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게 교회를 지었습니까. (손 목사를 가리키며) 이 목사님이 30년을 바쳐 교회를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놨는데 (울먹이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저런 악랄한 자들을 천하가 보고 있습니다....이 시간 우리 '주여 삼창'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저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을 대적한 자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여러분 다윗이 간음죄를 지었을 때 용서했습니다. 다윗을 용서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우리 손복익 목사를 응원하고 같은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합시다.](뉴스엔조이 제공)

3.욕설과 폭언으로 지나치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는 협박적인 설교

설교란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자신의 불만을 드러내는 도구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자신의 의도를 지나치게 주입시켜 청중을 선동하여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지식과 연구의 부족 또는 약점 등을 감추려고 신비주의나 권위주위를 도입하여 방언과 예언, 신유 등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성도들을 유혹하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면서 때로는 위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욕설과 폭언으로 저주를 행하는 모습을 본다. 이럴 때는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으로 둔갑한 것처럼 연약한 회중들을 억압한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언어의 소중성을 높이 간직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실체가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과 똑 같은 분이셨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1-3)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개신교는 기독교를 예전의 종교에서 말씀의 종교로 전환시키는 근거를 갖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을 믿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는 어떤 종교보다 성경 말씀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그 말씀의 운반과 전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인 관심은 말씀을 전달하는 언어를 누구보다 깊게 연구하고 그 언어를 통하여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사명자가 설교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회중에게 사용해야 하는 바르고 정중한 언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롬10:17) 이런 언어의 귀중함을 소홀히 여기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설교 시에 폭언(야단치기, 각종 저속적인 언어 사용, 반말, 욕설 등)을 퍼붓는 다면 그것은 설교의 귀중함을 깨뜨리는 없어져야할 저주설교이다.

예) 호레자식 000군을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본인은 물론 처가 삼사대에 이르기까지 눈이 멀고, 사지가 떨어지며, 폭삭 망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규왕 담임목사님과도 상의한 바 있읍니다만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주의 종을 늑멸하였기에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비상한 조치이었음을 온 교회에 알립니다. 지금이라도 000군은 담임목사를 만나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곧 후회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일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을 용납하십니다.

4. 신비주의를 내세운 과장된 거짓(공갈)설교

신비주의를 도입하여 방언과 예언, 신유, 입신 등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진리의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성도들을 유혹하는 행위를 보게 된다. 교인들이 아멘을 연발하면서 설교자에게 심취되는 현상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과장된 표현 즉 거짓으로 더욱 교인들을 부추기다보면 자기 과신에 빠지고 신비주의로 흐르게 된다.
예) 목사가 이렇게 저주의 칼을 들은 것은 ooo 뒤에서 배후를 조정하는 무서운 악마의 세력- 교회를 파괴하는- 을 파악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교회와 주의 종을 늑멸하는 자를 결코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예언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목사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을 대적하는 자를 삼사대까지 멸망시키며, 주의 교회를 지키시는 것을 50여평생 동안 수 없이 보아 왔습니다. 산0교회 정00목사****

예) 자기에게 투시의 은사를 주셨는데 어떤 부자가 헌금에 인색하기 때문에 예언하여 아들이 금년에 죽을 것이라 했는데 죽었다고 협박함. 방언, 입신, 진동, 투시 등의 은사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안수를 받아야하는데 특별헌금을 준비하라고 강요함

5. 인과응보(因果報應)적 설교로 지나친 죄책감과 두려움 조성

한국종교 문화는 죄의식에 호소하는 경향이 매우 짖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에는 죄의식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인과응보”라는 불교적 개념도 지나치게 죄와 벌이라는 등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윤리적 삶을 향하는 논리가 자칫 죄의식을 불러 일으켜 일상의 일들을 두려움으로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독교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뛰어 넘어 예수그리스도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 은혜”에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인과응보”의 논리를 악용하여 공포를 심어주어 벌 받기 만을 피하려는 편협 된 신앙을 갖게 한다. 이러한 죄의식의 뿌리를 복음으로 제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에 더 과중한 율법적 신앙을 심어 외형적이며 외식적인 모습을 낳게 한다. 권위적 왕조체제, 삼강오륜의 사회규범, 차별적 신분제 등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계급적 사회질서 속에서는 교회안의 설교자의 혼합된 논리를 반박하기 매우 어려워 끌려 다니는 불행한 모습이 교회에 있다.

한국인의 특징인 '한'(恨)의 정서는 저항의 몸짓으로 표출되기 보다는 숙명적 체념으로 바뀌어 사회적 정신운동으로 발전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이유는 “인과응보” 사상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 특유의 깊은 죄의식과 연결된다. 현재의 삶은 전생의 업보이고 현세의 업보는 다음 세상으로 이어진다. 중생은 이 업보의 고리를 통해 끝없이 윤회한다. 불교 또는 토속적 종교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기독교안에도 “가계저주론” 같은 위험한 사상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의 위험성" 제하의 합신 측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 저주론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세 가지다. 첫째,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된다고 하는 점이다(그 통로는 유전인자, 부모의 삶, 추수의 법칙, 악한 영, 혼의 결속 등 5가지라고 한다).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고 하는 점이다. 셋째, 유전적인 죄는 죄의 뿌리를 끊지 않는 한 가계를 타고 계속 내려간다고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합신 측은 "성경의 저주론과는 거리가 먼 악한 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이목사 가계저주론 집회 참석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합신측은 이 날 "(이목사의 가계저주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상담을 온 내담자의 삶의 정황을 통하여 임상적인 현장에서부터 얻어낸 이론"이라고 결론 내린 이단대책위원회의 보고를 그대로 받았다.  이단사이비대책위원인 박형택 목사는 "한국교회가 유행에 너무 민감해 때로는 어떤 사상의 흐름을 성경적인 여부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면서 "가계저주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고 지적했다. (월간 <교회와 신앙>1999년 8월호, 10월호, 2000년 3월호 등에서 제공한 기사)

IV. 대응 어떻게 하나?

1. 목회자의 잘못된 권위를 세우는데 자주 사용되는 성구들의 바른 이해

a 모세와 아론, 미리암(민12장)
b.고라의 반역(민16장)
c.다윗과 사울 (삼상24:1-7)
d.엘리사와 아이들(왕하2:23-25)
e.저주의 시(7, 35, 58-59, 69, 70, 82-83, 109, 137, 140편)


a, b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의 오류(민12장), 고라의 반역(민 16장)에 대한 고찰

민수기 즉 ‘광야에서[In the Wilderness]’라는 뜻이다. 우리말 성경은 인구조사를 의미하는 ‘숫자들[Numbers]’로 부른다. 그러나 신학적 의의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광야에서 불평하는 백성들과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엄한 심판’의 책으로 각인되어 있다.
고라(Korah)와 다단(Dathan)과 아비람(Abiram)은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사건이 민수기에 나온다(민16:1-2). 레위인들과 일반 지도자들이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대제사장직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모세와 아론에게 독점적으로 부여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중재자 직에 대한 불평에서 비롯되었다(민16:3, 13, 28-29). 본문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의 지도력에 대한 신성불가침이나 면죄부를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단순히 지도력의 정당성을 제시해주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고라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당을 짓는 것에 의한 것이지 모세의 실수나, 지도력의 월권을 묵인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수기를 모세 오경의 연속체로서 성경을 읽는 다면 모세와 아론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지도력의 불완전성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은 단순히 그들의 책임과 의무의 재확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수기를 읽는 우리들은 이전에 아론과 미리암이 행했던 동일한 반역을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2:2). “모세와 아론은 분수에 지나치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야웨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야웨의 총회보다 더 높이느냐?” (16:3).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을 기억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 사건이 좀더 넓은 문맥에서 보았을 때, 지도력과 그에 대한 반대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옹호와 징벌)이라는 흑백논리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 본문의 의미는 불완전한 지도자들과 불신앙의 백성들의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고라자손의 형벌은 15장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도적이고 경멸적으로 행해지는 고의적인 죄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있다(15:30-31). 이러한 고의적인 죄는 제사장의 노력으로도 속죄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그 죄책을 당사자가 담당해야 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15:31; 16:31-35).

c. 다윗과 사울의 관계 이해

다윗의 굴에 숨어 있다가 사울과 만나게 되자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기회임에도 그는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고 그 일 조차도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 라고 말했다. 여기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이 목사나 설교자를 지칭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성도들과의 차별을 둔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의 시각은 원수라 할 찌라도 사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거룩한 신성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유진 피터슨,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참조 P96). 오히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왕국을 의미하기에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이고 무력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고 한다(24:15).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변호하고(24:10) 사울의 잘못됨을 지적하며 돌이키기를 호소한다. 사울은 이러한 다윗의 권고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였다(24:16). 본문을 통해 우리는 사람에게 담겨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성을 보며 서로 존경하며 인정해야한다. 또한 서로의 잘못을 무력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고 도와주어야한다. 최종적인 판단 자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인내해야 한다. 은혜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왕국을 내다보는 다윗의 신앙의 표현이지, 사울이 하나님이 세운 특별한 사람이라서 악행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사울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했으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왕국을 믿고 준비하고 있었다. 

d.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의 해석

열왕기하2장 23-25절의 말씀으로 종종 목회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구절이나 조금만 살펴보면 목회자의 권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통해 주의 종 엘리사를 놀렸던 아이들이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단순하게 해석하며 성도들과 목사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아래와 같은 설교가 유명 인터넷 정보 매체에 나와 있는 것을 예로 들어 본다.

[예)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서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조롱하거나 괴롭혀서는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1. 종을 조롱한 자들은 죽었습니다. 본문 "(왕하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알고 했던지 모르고 조롱했던지 아무 상관  없이 그들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주의 종을 괴롭히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롱하는 것은 유익이 없음을 깨닫고 그와 같이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아니함이 좋을 것입니다.

2. 주의 종을 멸시한 자들은 죽었습니다. 본문 "(왕하2:23)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멸시를 했는지를 모르지만 멸시한 결과는 비참하게 짐승에게 찢기어서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무서운 벌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를 멸시하고 비방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주의 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본문 "(왕하2: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 하였습니다.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주의 종이 축복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저주를 했는지는 알 수 없고 주의 종의 저주를 들어준 것을 보면 저주 받은 사람들이 당연히 저주 받을 짓을 하지 아니했겠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므로 저주 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 하겠고 축복 받을 짓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레이스 강해설교, 정oo 목사)]

본문 이해

본문은 엘리야가 승천하며 제자 엘리사에게도 영감이 임한 사건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생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하고 없어진 엘리야를 찾아 헤메이며(열하2:16-18) 심지어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는 엘리사를 비웃기 까지 한다(열하2:23-25). 23절에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하는 것은 엘리야와 같이 승천해 보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머리”라는 용어는 엘리사의 신체를 보고 놀리는 말이 아니다. 엘리사가 대머리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표로 삭발을 했고, 입은 겉옷을 보고 예언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벧엘에 있던 예언자 공동체에서 찾아보기 쉬운 관습이었다(존 그레이, 열왕기하 주석 참조). 다시 말해 엘리사가 말하는 “엘리야의 승천” 즉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것에 따른 심판이지 엘리사를 놀려서 받은 저주가 아니다. 더욱이 이것은 엘리사의 명예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벧엘 동네에 불행한 사건이다.

e. 저주의 시(7, 35, 58-59, 69, 70, 82-83, 109, 137, 140편)에 대한 이해

이스라엘은 개인과 국가적으로 열강들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고, 연단을 위한 시련도 겪었으며, 다양한 재난 등으로 고난을 많이 당하였다. 고난을 당할 때에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탄식과 애도의 시를 노래하고 표현 하였다.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악인에 의한 압제로 인한 것일 때에는 원수들을 저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할 것을 간구하였다. 저주의 시는 원수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간구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과 상충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편의 기자들은 이스라엘의 원수는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로서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주 시는 원한과 복수심에 의한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의인이 축복을 받고 악인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공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도 나타난다(롬 1:24-3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편기자 자신이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7:6, 35:1, 58:6, 59:5). 성경은 원수 갚는 것, 보복이나, 저주가 자신의 것을 채우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해서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를 위해서이고 또한 하나님의 의해서 심판이 행해지는 것을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축복과 저주의 직접적인 권한이 없다. 다만 하나님께 요청하여 축복을 얻을 따름이며 저주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열망에서 드리는 기도이며 종말론적인 것이다.
2. 교회안의 구성원은 동일한 권위 하에 다양한 은사가 있을 뿐이다.

만인 제사장 직이다 “모든 회중은 각각 거룩하고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신다.” 마틴 루터는 벧전 2:5, 9에 기초하여 이 주장을 전개하였다. 사실 이 주제는 바울의 서신에서 흐르는 신학이며 요한 계시록(1:6; 5:10)에서도 명시화된 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속죄이후에 영원한 대사제직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며, 이제는 인간 대행자나 교회의 일부가 상징적 또는 대표적으로 맡아서 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외에 더 이상의 특별한 성직으로서의 사제는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지어가는 은사만 존재할 뿐이다(엡2:19-22, 4:11).
신약 교회에서는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사제직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개혁자 루터의 주장이다. 목사만능주의와 교권주의를 부추기는 명칭 즉 목사를 선지자나 제사장, 하나님의 사자, 심지어는 사도들의 승계자로 삼아 그 기능과 권위에서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교회의 행정과 성경말씀을 전횡 또는 전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현 한국교회의 헌법에서 말하는 목사에게만 강단권 즉 설교권, 예배의 주도권, 그리고 축도권, 성례 집례권은 다시 생각하고 고쳐야 하겠다. 심지어는 재정집행권까지도 전횡적으로 행사하는 목사들의 지나친 힘의 부여는 목회를 돕는 것이 아니다.

3. 바른 설교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설교자가 자신은 초보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 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나 말씀을 듣는 자 모두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고 점검해야한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진 말씀은 비평할 수 없다”는 일방적 논리는 설교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오는 교권주의의 산물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설교를 듣고 무리들이 놀라며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라고 표현한다.(마7:29). 설교는 듣는 순간부터 평가되고 반응이 나타난다. 문제는 바르고 정확한 분별력이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나 듣는 자 모두가 성경에 충실해야하고 성령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문제이지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인가를 분별하기 위하여는 적어도 아래의 3가지는 갖추어야 한다.
1.바른 설교는 반드시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한다.(시19:7-11, 벧전2:2, 행20:32, 딤후3:16)
2.바른 설교는 반드시 바른 교훈이 따라야 한다.(딛1:9, 행13:10, 엡4:11-16)
3.바른 설교는 반드시 설교자의 바른 삶이 따라야 한다.(딤후4:2-4, 약3:17,18)

4. 계속해서 고민하고 연구할 과제

1. 평신도의 역할 확대 어디까지?
2. 잘못된 목회자의 설교 치리문제 어떻게?
3. 목회자의 삶과 설교를 어떻게 평가 할까?

맺는말

설교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한 성경에 있는 복음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는 청중들의 문화와 언어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Proclamation)요 해석(Interpretation)이요 적용(Application)이다. 특별히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언어 문화권의 젖은 우리는 윗사람에 의한 제안(suggestion)이나 조언(advice) 또는 안내(guide)가 너무나 빈약하고 오히려 명령 또는 분부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설교의 문제도 발생되는데 즉 설교자는 지도자라는 위치에 있게 되고 설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메시지라는 문화적 고정 관념이 설교자들에게 심어져 있다. 이런 영향으로 설교의 기본적인 궤도를 탈선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설교 시 강단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언과 욕설을 금해야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다.(마5:22) 예수님은 욕을 철저히 금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다른 사람에게 대한 모욕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한국사회에 팽배한 욕설은 억눌린 계급적 사회문화의 문제에 있음을 깨닫고 문화를 개선하고 언어를 정화해야 한다. 심지어는 교회 강단에서 설교자 등이 퍼붓는 욕설과 폭언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사역에서 사용되어야 할 바른 언어의 선택과 활용은 필수적으로 있어져야 한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 대신 군림하여 자신의 경험과 판단과 지식을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게 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진지한 해석(exegesis)과 주해(exposition)의 노력과 기도가 있어야한다. 설교자란 세례요한과 같이 성실한 도구로서 말씀의 전달에만 집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외쳐지는 말씀에 동일한 청중으로서 더 나아가 모델로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강단에서 나오는 잘못된 설교 특히 저주설교가 사라지고 말씀의 회복으로 초대교회의 부흥이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