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이단성 시비
통합측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주최 '제11회 이단사이비대책 세미나'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구춘서 교수(한일장신대 교수, 전문위원)
1.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목회 현장의 어려움
한국교회에 혼란과 고통을 가져오는 이단과 사이비 집단이 교회를 혼돈에 빠뜨리고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문제는 과거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에도 많은 이단 사이비 집단이 득세하면서 한국 교회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이들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이단, 사이비 집단의 교주의 생애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사회적 물의,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교리의 내용, 이들 세력의 크기와 분포, 그리고 이들에게 당한 한국 교회의 피해 사례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이런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많은 교인들이 현혹되어 가입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이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에 현혹되어 가는 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 현혹되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의 심리적 역동성에 대해 입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이루어진 분석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건전하지 못한 이단 사이비성이 농후한 주장들에 대해 목회자들이 왜 현혹되고 또한 이들 목회자들에 의해 동원된 교인들이 어떻게 이런 사이비적인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해 내는지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몇 가지 프로그램들에 주목하면서 왜 이런 프로그램들이 한국 목회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첩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대사회적 영향력 감소, 한국교회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 비난과 냉소적인 소문들, 이에 영향을 받은 교인들의 지속적인 예배 참석률 감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의 역동성의 급격한 저하 등 한국교회의 건강에 적신호가 담긴 진단 결과들이 속속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목회를 감당해야 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빠르게 다원화,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에 때문에 이전에 누리던 권위가 급격히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더욱 위기를 맛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각종 매스컴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는 것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의 또 다른 방증일 것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한국목회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갖가지 이단과 사이비집단이 발호하면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흔드는 사실이다. 교회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교인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단세력의 은밀한 지령을 받고 교회에 들어와 암약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 목회자는 물론 많은 교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여러 이단과 사이비들 집단들이 나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목회자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안정시키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하는 부담을 혼자 떠안고 있다. 당연히 교회를 지키고 바른 신앙생활을 인도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더욱 피곤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목회 현장에서 또 다른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목회자의 권위 상실의 문제와 교인들과의 갈등의 문제이다. 길선주 목사가 유고에 남긴 기록은 우리가 오늘날 목회자들이 경험하는 어려움과 견주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는 은진 미륵이 석공의 망치질을 못 받아들였다면 어찌 걸작품으로 태어났겠느냐고 물으면서 목회자들이 갖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외쳐도 듣지 않고, 2. 학식이 있으면 학식 자랑한다고 하고 3. 학식이 없으면 무식장이라고 하고, 4. 신령하면 신비주의의 미신자라고 하고, 5. 일을 잘하면 사회객이라 하고, 6. 인자하면 우유부단자라 하고, 7. 엄격하면 압제자라 하고, 8. 관청 교섭을 잘하면 행세객이라 하고, 9. 교제에 서투르면 멍텅구리라 하고, 10. 노숙한 즉 노폐물이라 하고, 11. 청년인즉 경박하다 하고 12. 성경만 가르치면 완고하다고 하고 13. 지식을 말한 즉 신령하지 않다고 한다.
오래 전에 목회한 길선주 목사가 나열한 목회자의 어려움은 오늘 우리가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상세한 분석이다. 이런 어려움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만이 갖는 것은 아니다. 역시 꽤 오래된 책이지만 미국의 월리엄 흄(William E. Hulme)은 『목회자들의 어려움』(Your Pastor's Problems) 이라는 책에서 제랄드 케네디 감독(Bishop Gerald Kennedy)이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목회자들에 대해 하는 말을 젊은 목회 지망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전식으로 모아 발췌한 것을 나열하고 있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이다.
그는 영적인 지도자야 (그는 결코 나를 휘저어 놓지 않아)
그는 정치를 강단에 불러들이고 있어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그는 불그레 해 (그는 기득권을 공격하고 있어)
그의 입장은 교회를 어렵게 할거야 (우리 기존 교인들은 기분이 상하고 있어)
나는 교회에 남아 있지 않겠어 (내 맘대로 못하면 교회를 떠나는 거지 뭐)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야 (예산이 초과 달성되었어)
그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않아 (그는 예수님처럼 하려고 해)
적어도 그는 좋은 목회자이잖아 (그의 설교는 별로야)
전교인들이 분노하고 있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문제를 만들거야!)
이렇게 목회 환경은 나날이 어려워져 가는 가운데 목회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점점 혼란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목회자는 리더인가? 제사장인가? 목회자들은 상담가인가? 개교회 목회자가 갖는 세 가지 종류의 어려움을 사례로 보고한 뒤 미국 교회의 자문역을 오래 감당한 앤더슨과 얼 존스(James D. Anderson, Ezra Earl Jones)는 다음과 같은 목회자의 어려움을 나열하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교인들에게 해석해 주어야 할 책임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죄와 실존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갖고 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교인들이 이 세상의 여러 인간적인 필요를 위해 몰두할 때 이 세상의 관심보다 하늘의 것을 찾으라고 도와야 한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활동에 많은 혁신을 가져오려 하면서도 교회와 지역의 전통을 민감하게 의식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은 모든 지역의 목회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목회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갖가지 수단을 도입하여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 기업의 CEO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는다.
이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예배를 주관하고, 목회 상담을 실시하고, 성서를 해석해주며, 교회 교육을 담당하고, 교회의 친교와 선교를 주도하는 전통적인 목회자의 역할 외에도 교회를 책임지고 성장시키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는 기업의 CEO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런 과도한 압력 가운데 우리 목회자들은 무리하게 교회를 성장시키려다 보니 원하지 않게 교회 안팎에 물의를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가운데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이단이니 사이비성이니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권위 상실의 문제, 정체성의 혼란, 교회 성장의 책임과 같은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교회 성장에의 압력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본다.
2. 한국 목회자들이 받는 교회 성장에의 압력
그렇다면 왜 한국의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이라는 압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일까? 이에는 보다 정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문헌적인 조사만으로도 한국 목회자들이 갖는 성장의 압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 교회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런 사회적 변화가 한국 교회에도 성장과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사회이며,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성장과 확장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만든 제품이 세계 시장을 누비며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4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문화는 세계 곳곳에 한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도에서 보듯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의 문화산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문화와 스포츠 등 여러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도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부문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성장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빠른 성장은 세계교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의 성장의 경험은 한국 목회자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이런 여러 발전하고 있는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발전하면 발전 할수록 재빨리 세속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사회의 다른 부분은 빠르게 발전하면서 한국교회도 발전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한쪽의 면이 있고 이 발전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또 다른 면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성장은 세속화를 가져 오고 이런 세속화된 사회는 한국 목회자들로 하여금 성장이라는 문제에 집중하도록 악순환의 원을 만들고 있다.
둘째,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 경쟁자들은 일상에 젖은 현대인들에게 과거 교회가 제공했던 많은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개념을 사용해 보자. 버거에 의하면 현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이 과정을 추동하는 힘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초한 기술이다. 그는 이를 이단의 보편화로서의 근대화라는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지던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선택의 대상으로 바뀐다. 우리의 음식, 언어, 외모, 조국 등 많은 면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던 영역에서 선택의 영역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남녀의 성마저 선택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종교도 이제는 이런 선택의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피터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논지를 우리 한국의 상황에 적용시켜 보면, 우리 한국 사회도 선택이 다양한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유사 자기 초월을 경험하게 하는 많은 문화적 행사, 정치행사, 대중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대규모 스포츠 행사들과 함께 한국 교회도 동시대 한국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선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들 유사 종교 단체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만큼 충성을 요구하고 헌신을 요구한다. 온갖 분장과 의상을 차려입고 응원도구를 들고 운동장을 꽉 매우는 젊은이들이 T.V. 화면을 가득 메우는 장면에서 유사 종교 스포츠에 헌신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갖가지 자원 봉사를 하면서 땀을 흘리고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여하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쾌척하는 유명 정치인의 정치 집회를 보면 이들에게서 어떤 유사 종교적 성격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또한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70년 80년대 대학가를 사로잡았던 운동권 학생들의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은 한국교회 젊은이들의 성경공부 열기를 능가할 정도의 열정과 헌신을 요구했었다. 이들은 그룹 공부 뿐 아니라 농촌으로 농활을 도시 공장으로 나가 노동운동을 펼치는 실천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강력한 경쟁자임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따라 등장한 강력한 경쟁자를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정치, 문화, 스포츠, 이데올로기와 같은 유사 종교적 단체 외에도 타 종교가 우리 한국교회와 경쟁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세가 두드려지고 있으며, 불교 사원에서 개최하는 하안거에는 신청자들이 쇄도하고 있다. 이들 타종교의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 반면 우리 한국교회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어 가는 듯이 보인다. 이들 타종교는 지도력의 강력한 단일체계를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 개신교계는 한기총, 한국교회협의회 등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듯이 일반인들에게 비쳐지고 있어 더욱더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타종교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더 교회 성장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생겨 난 것도 교회 성장에 집착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목회자들과 평신도가 교회에서 서로 협력하고 돕는 관계이기 보다는 서로 견제하고 갈등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강력한 견제 때문에 (특히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교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교회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자.
앞에서 인용한 앤더슨과 얼 존스는 『평신도 교역』(Ministry of the Laity)이라는 책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먼저 1958년 핸드릭 크래머(Hendrick Kraemer)의 『평신도 신학』 (A Theology of Laity)이 출판되었고 1959년에는 이브 콩가(Yves Congar)의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Lay People in the Church)를 출간하였는데 이 당시에 중심 주제였던 평신도 목회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후 등장한 많은 논의에서 주로 의견의 접근을 본 것은 평신도들의 사역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1981년 세계침례교 대회 평신도 분과에서는 “전체 교회의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라오스(laos) 즉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바티칸 제 2 공회의 영향 하에 카톨릭 교회에서도 사제와 평신도들이 공동으로 서명한 1977년 시카고 선언(Chicago Declaration of Christian Concern)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주 내용은 “교회는 평신도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고 세상에 사역한다(through the laity that the church speaks to, acts upon and ministers to the world)"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평신도 사역을 강조하는 당시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전투적인 은유였다. 이 전투적인 이미지는 60년대 미국교회가 월남 전쟁 반대 운동과 흑인 인권을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행동주의의 결과로 생겨난 것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서로의 책임과 기대에 대해 폭넓게 퍼진 혼란이었다는 것이다. 전쟁터라는 비유와 은유가 일상적이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은 진실로 자신들을 훈련소의 소장으로 생각하고 평신도들에게 훈련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평신도들은 그들의 지역사회와 이웃과 거리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자 이러한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논의되고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역할의 갈등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고 이런 경향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스미스(Donald Smith)의 책 『십자포화 중의 목회자』(Clergy in the Crossfire)와 같은 책이 나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등과 그 갈등의 해소에 대한 길을 모색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목회자에 대한 평신도의 견제가 다반사가 되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교회의 사회 운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은 평신도들이라고 하였으며 “군림하는 목회자들에 대해 자유를 외치는 평신도들의 전쟁”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1973년 미국 성공회는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설정이라고 선언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 회장인 오즈 기네스(Os Guinness)와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는 “나는 하나님, 가족 그리고 맥도날드를 믿는다. 그런데 내가 회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 순서가 바뀌게 된다.” 이런 희화적인 인터뷰에서 교회가 자랑하였던 사회적 역할이 이제는 엄청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위에서 논의한 사항은 미국 교회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어 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과의 긴장과 갈등은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다.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의 운영 문제를 놓고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교회 성장을 강력하게 선호하게 된다. 평신도들의 여러 가지 견제와 간섭에서 벗어나는 길은 교회를 성장시켜 여러 영역의 의사결정 과정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오늘 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웬만한 기업의 기업주 버금가는 여러 기관을 소유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며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이는 물론 교회가 성장하면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성장의 원인이 목회자의 권위 강화의 욕구가 한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넷째, 교회 성장에의 무리한 요구는 목회자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도 작용한다.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은 목회 자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개인적인 문제로 오는 수도 있다. 먼저 목회 자체가 주는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자. 샌포드 (John A. Sanford)는 그의 책 『목회 탈진』(Ministry Burnout)에서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끝이 없는 일이다.
2. 사람을 돌보는 일은 결코 가시적인 결과를 측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3. 목회는 반복적인 일의 연속이다.
4. 목회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는 일이다.
5. 목회는 언제나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6.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7. 목회자는 많은 영적인 음식(spiritual food) 때문이 아니라 트집(strokes)을 잡기 위해 예배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8. 목회자는 실패로 인해 기진맥진해 진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을 성공에의 욕구 (동료 목회자들의 성공에 대한 시기심, 실패에의 두려움 등), 목회자 개인이 갖는 성격에서 오는 어려움(완벽주의, 지나친 교인과의 친밀감에서 오는 문제, 지도력 부재의 문제 등), 목회자 가정의 문제(부인과 자녀를 방치하는 문제 등), 신앙지도자로서의 갖는 문제(남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와 남을 파괴하려는 욕구, 자기 기만의 위험, 관료적 법에로의 도피 등), 목회자가 갖는 고독(친구의 부재 문제, 대중 가운데 고독의 문제, 사모와의 문제 등), 시간 관리의 문제(해도 해도 할 일이 계속되는 목회, 긍정적 부정적 참여), 영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적인 어려움 등의 문제를 들고 있다.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가정의 문제와 동료 목회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목회자도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직업인처럼 많은 인간적인 문제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해 줄 해결책으로서의 교회 성장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교회 성장이 가져다 주는 가시적인 성과는 목회자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나, 재정적인 문제, 자녀와 배우자를 비롯한 가정 문제 등 목회자가 갖는 많은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인식된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너도 나도 예외 없이 교회 성장에의 신화에 매달리게 되고 또한 이런 목회자들의 욕구를 이용하여 많은 교회 성장에 대한 훈련 프로그램이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되기도 한다. 교계 신문에 나오는 많은 교회 성장에 대한 세미나, 혹은 교회 관련 상품들의 광고는 결국 이런 수요가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가운데 목회자들은 이단적인 시비가 있다고 해도 매력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무리하게 도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최근 논란이 되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미국의 경우에는 목회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세속화의 물결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목회를 중단하고 사회사업가나 상담가 또는 교사로 직업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목회 현장에서 오는 어려가지 도전을 목회 자체를 그만 두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박근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60년 구미의 교계에서는 목사의 출애굽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목회자들이 주어진 목장을 버리고 다른 일터를 찾아간 시기였다. 대부분이 자기 자신들이 목사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음을 경험한데서 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또 다른 유형의 목회자들은 영적인 세계에 깊이 몰두하여 그런 체험을 통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목회자들은 치유나 방언과 같은 성령의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인들에게 순종을 이끌어 냄은 물론 자신을 다른 목회자와 차별시킴으로 교회 성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한편 이들을 추종하는 교인들은 또한 자신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높이 떠받들며 자신들의 교회가 최고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카리스마적인 목회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권위 상실의 시대에 목회자들의 이런 접근은 문제의 바른 해결이 아니라고 한다. 다시 박근원의 분석을 살펴보자.
...어떤 시비의 체험을 방편으로 목사의 권위를 방어하고 강화하려고만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결과로 생기는 지나친 권위주의, 과장된 영적 체험은 장기간 지속될 수도 없고 또 이런 대처 방법은 항상 다른 문제성을 수반하고 있다. 목사 자신들이 독선주의에 빠지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박근원은 이렇게 목회를 포기하거나 신비적인 영적 체험에 의존하는 목회자들보다는 새로운 권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목회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목회자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교회 성장을 모색하고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자신의 교회를 다른 교회와 차별화시키는(?) 목회전략을 채택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무리하게 성장을 추구하려는 목회자들의 욕구를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그리고 목회자 개인의 문제 해결 동기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이제 이러한 목회자들의 교회 성장에의 욕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으로 나타나는지 분석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이단적이고 사이비적인 것이냐를 판단하는데 있지 않다. 사실 그러한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현실적으로 실행되는 과정이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려는 것은 왜 외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기성 교회나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게 되는지 그 배경을 목회자들이 갖는 여러 어려움에 비추어 분석하려는 것이다.
a. 알파 프로그램(ALPHA)
알파 프로그램은 (ALPHA)은 1970년경 영국 성공회에서 생겨나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초신자를 교회로 초청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알파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Anyone can come: 누구든지 올 수 있다. Laughting and Learning:웃으면서 재미있게 배운다. Pasta: 음식을 함께 먹는다. Helping one another 서로 섬기며 돕는다. Ask anything: 무엇이든지 물어 볼 수 있다)라는 것을 보아도 알파 프로그램은 원래 믿지 않는 교인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는 알파 코리아(www.alphakorea.org)라는 웹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1976년 알파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런던 시내의 홀리 트리니티 브롬톤교회 홈페이지(http://www.htb.org.uk)를 방문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도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역시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소개되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 트래스 디아스 프로그램과 유사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들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알파코스는 1976년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HTB(Holy Trinity Brompton) 교회에서 찰스 만함(Charles Marnham) 신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으며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의 이탈이 생겨났다. 특히 17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0%가 교회를 떠났다는 보고도 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욕구를 정밀히 조사하여 이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가운데 이 프로그램이 생겨났다고 한다. 처음 시작한 찰스 만함 신부는 불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비공식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한시간 동안 이야기(Talk-이하 토크)를 하고, 한 시간 동안은 토크에 대한 의문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4주 동안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는데 일방적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제기한 의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통해 의문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매력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5년동안 지속하다가 1981년 존 어바인(John Irvine) 신부가 뒤를 이어 맡게 되었다. 존 어바인 신부는 당시 영국에 도입된 주 5일 근무제를 생각하여 기존의 4주 과정인 알파코스를 10주 과정으로 확대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주말 수양회(Weekend Program)로 성령의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알파코스는 1985년 니키 리(Nicky Lee)가 맡아 더욱 체계화시켰고 그 이후 알파코스는 니키 리의 절친한 동료인 니키 검블(Nicky Gumbel)이 HTB 교회에 부임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니키 검블은 알파코스를 맡으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알파 프로그램은 영국에서 생겨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영국교회(성공회)에 교인들이 빠져 나간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로 초신자들을 교회에 안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 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를 모르는 영국인들에게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식사, 동영상, 토의, 등을 통해 기독교가 그들의 가정, 사회,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주말에 한편 경관이 수려한 수양관에서 주말을 보내면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을 갖도록 설계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알파 프로그램은 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소개하려는 프로그램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영국의 문화적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소개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1. 영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성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주로 활용된다.
2. 이 프로그램은 서구 구미의 경우 공교육을 통해 토론문화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 활성화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토론보다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여 그대로 적용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3. 따라서 인도자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주입식으로 주도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4. 이 경우 참가자가 수동적으로 참여할 때 보다 감동이나 자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을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으로 보이다.
5. 이 프로그램을 참여한 및 성도들과 참여하지 않은 성도들 사이에 괴리감이 존재할 수 있다.
6. 따라서 이 프로그램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 총회 교육부와 선교부가 합동으로 제작한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알파 프로그램의 문제점은 아래에서 살펴볼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과 상당부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을 살펴본 후 고찰해 보려고 한다.
b. 트레스 디아스
천주교회에서 만들어진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는 한국교회에 단기간 내에 빠르게 확산됐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를 내기도 어렵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목회자들 가운데는 이에 매료되어 자기 교회에서 곧바로 개설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가톨릭적 요소를 배제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수용하여 실시함으로서 신앙훈련에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교단에서 연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제 80회 총회) 여기서는 그 연구 보고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트레스 디아스(Tres Dias)는 1949년 가톨릭에서 시작된 영성훈련인 꾸르시요(Roman Cathlic Cursillo)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는 스페인어로 ‘사흘’의 뜻이다. 3박 4일간 독특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은 교회 봉사에 싫증은 느끼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치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9년 1월 7-10일까지 3박 4일간 스페인의 마요르까(Mallorca)에서 공식적인 첫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7년 이 꾸르시요는 교황의 승인을 받게 된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평신도 영성 훈련으로 가장 각광받는 영성훈련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 꾸르시요가 미국으로 건너가 개신교인들도 참여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트레스 디아스이다.
이 프로그램은 참석자들의 참여도와 호응도를 고려하여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강의, 그릅토의, 찬양, 섬김 훈련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프로그램의 내용을 알리지 못하도록 한다. 이 훈련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룹을 형성하거나 차별의식을 갖게 되며 또 훈련 참가자들만의 모임인 Reunion을 지속적으로 가짐으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다.
1. 이 프로그램은 효과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비밀, 그리고 여러 가지 인위적인 요소를 통해 참가자들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듯한 문제점이 있다.
2.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간극을 고려하지 않고 도입되는 경우 (가령, 아브라조:포옹하는 행위) 문제가 발생한다.
3. 특히 이 프로그램을 이단적인 그룹이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 되었다. 이단이나 불건전한 단체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는 절대로 참석을 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이에 참여하지 않은 목회자들 사이에도 거리감이 생길 수 있다.
5. 이 프로그램을 교회 차별화의 프로그램으로 활용하여 타교회 교인을 끌어오는데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 천주교의 경우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6. 따라서 노회 차원이나 총회차원에서 이 프로그램을 교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보급하도록 해야 한다.
이상 우리는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 문제가 보고되고 있는 대표적인 두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모두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과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긴장이 형성되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런 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한 교인과 참여하지 않은 교인사이의 간격도 문제다. 또한 이런 프로그램의 특성상 이런 프로그램을 잘 받아 들일 수 있는 교인들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토의식 프로그램에 익숙한 교육을 받은 교인들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총회가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 연구 결과에서 내 놓은 방안처럼, 총회가 건전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보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또한 목회자들이 탈진하거나 권위 상실의 문제를 위해서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목회자 가정의 문제들 돕기 위한 상담이나 교육은 이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갖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건전한 성장 프로그램은 어떻게 제공되어야 할까?
4. 보다 건전한 목회 성장 프로그램의 향한 총회의 노력
오늘날 급격히 열악해져 가는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의 바른 리더십에 대한 연구도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목회와 영성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 온 나우엔(Henri M. Nouwen)은 오래 전에 목회의 전문성(professionalism)와 영성(spirituality)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석한 적이 있다. 그는 목회자의 전문 사역인 교육, 설교, 목회상담, 조직, 그리고 예전 인도에 대해 분석하면서 어떻게 영성 훈련이 이들 사역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모색한다. 즉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는 교육, 성경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 이상의 설교, 교인들의 필요에 기술적으로 응답하는 것 이상의 목회상담, 교회의 여러 조직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 이상의 조직관리,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을 넘어서게 하는 예배를 어떻게 목회자가 이끌 것인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헨리 나우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저술을 통해 목회자의 지도력과 영성을 관련 시켜 분석한다. 그는 목회자들이 탈진(burnout)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적인 죽음의 심리적인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는 목회자들을 탈진시키는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유혹에 비교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첫째,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필요를 끊임없이 채워주려는 것(To Be Relevant)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에 대한 처방은 관상적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형성이라고 말한다. 목회자가 갖는 두 번째 유혹은 인기에 대한 욕구(To Be Spectacular)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구(To Be Powerful)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신학적 성찰을 통한 제자직 훈련이다. 이러한 분석은 비록 자신의 토론토 근교의 Daybreak L'Arche 공동체의 경험에 비추어 본 영성 신학적 입장에서 간단하게 분석한 것이지만 오늘날 목회자들의 입장을 잘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성 훈련과 목회와의 연결은 좋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만으로는 모든 목회자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알반 인스티튜터(Alban Institute)는 공동으로 지친 목회자들에게 휴식과 교회 갱신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계속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감리교회 선교국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우리 교단에서도 선교부에서 목회 갱신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건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 소속 부서 가령 국내선교부, 교육자원부 등이 공동으로 목회자를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 목회자들이 가진 교회 성장에의 욕구를 탓할 수 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 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음과 같은 향후 처방책을 제언하고자 한다.
1.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쟁과 성장을 부추기고 추동시키는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목회자들의 건전한 목회 윤리를 함양시켜야 한다.
2. 하나의 교회라는 오랜 교회의 전통에 따라 개교회주의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한 노회와 총회의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
3. 교회성장만을 유일한 목회자의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도록 모든 목회자들의 사례와 은퇴 후의 생활을 위한 연금 보장 등을 마련해야 한다.
4. 총회 차원에서 건전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교회 진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총회와 노회 차원에서 목회자들이 쉬고 기도할 수 있는 수양관과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6. 이미 문제가 보고되는 프로그램이나 프로그램 진행자에 대해서는 엄중 주의조치하고 교단 신문을 통한 광고나 보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나가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다. 더 이상 교회 성장에 대한 전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한국 교회도 성장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가운데 목회자들은 건강과 가정의 문제와 개인적인 자존심이 상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도 대도시의 대형교회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좋은 시설과 좋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통한 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인을 빼앗기는 교회의 목회자는 박탈감에 의해 무조건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한다. 이에 영합하여 이런 교회성장 프로그램 공급자들이 교계 신문 광고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가 모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이해하고 이들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총회적인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이는 제도적인 차원도 있고, 시설과 프로그램도 있다. 또한 교회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지속적인 목회자 계속 훈련과 교육 프로그램도 실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장과 경쟁을 우선시하는 사회풍토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한편 물의를 일으키는 프로그램과 목회자들에게는 엄중 경고하고 간섭할 수 있는 총회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문제도 강구해야 한다. 이는 결국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가장 괴롭히는 이단적인 사상은 물질만능주의 아닐까. 목회의 성공에 대한 지수가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과 예산의 규모 그리고 출석교회 교인 숫자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어야 할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성장에의 신화에 매달려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 성장 프로그램에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우리 모두가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7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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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측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주최 '제11회 이단사이비대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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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서 교수(한일장신대 교수, 전문위원)
1.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목회 현장의 어려움
한국교회에 혼란과 고통을 가져오는 이단과 사이비 집단이 교회를 혼돈에 빠뜨리고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문제는 과거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에도 많은 이단 사이비 집단이 득세하면서 한국 교회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이들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이단, 사이비 집단의 교주의 생애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사회적 물의,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교리의 내용, 이들 세력의 크기와 분포, 그리고 이들에게 당한 한국 교회의 피해 사례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이런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많은 교인들이 현혹되어 가입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이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에 현혹되어 가는 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 현혹되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의 심리적 역동성에 대해 입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이루어진 분석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건전하지 못한 이단 사이비성이 농후한 주장들에 대해 목회자들이 왜 현혹되고 또한 이들 목회자들에 의해 동원된 교인들이 어떻게 이런 사이비적인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해 내는지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몇 가지 프로그램들에 주목하면서 왜 이런 프로그램들이 한국 목회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첩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대사회적 영향력 감소, 한국교회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 비난과 냉소적인 소문들, 이에 영향을 받은 교인들의 지속적인 예배 참석률 감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의 역동성의 급격한 저하 등 한국교회의 건강에 적신호가 담긴 진단 결과들이 속속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목회를 감당해야 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빠르게 다원화,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에 때문에 이전에 누리던 권위가 급격히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더욱 위기를 맛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각종 매스컴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는 것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의 또 다른 방증일 것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한국목회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갖가지 이단과 사이비집단이 발호하면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흔드는 사실이다. 교회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교인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단세력의 은밀한 지령을 받고 교회에 들어와 암약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 목회자는 물론 많은 교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여러 이단과 사이비들 집단들이 나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목회자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안정시키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하는 부담을 혼자 떠안고 있다. 당연히 교회를 지키고 바른 신앙생활을 인도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더욱 피곤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목회 현장에서 또 다른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목회자의 권위 상실의 문제와 교인들과의 갈등의 문제이다. 길선주 목사가 유고에 남긴 기록은 우리가 오늘날 목회자들이 경험하는 어려움과 견주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는 은진 미륵이 석공의 망치질을 못 받아들였다면 어찌 걸작품으로 태어났겠느냐고 물으면서 목회자들이 갖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외쳐도 듣지 않고, 2. 학식이 있으면 학식 자랑한다고 하고 3. 학식이 없으면 무식장이라고 하고, 4. 신령하면 신비주의의 미신자라고 하고, 5. 일을 잘하면 사회객이라 하고, 6. 인자하면 우유부단자라 하고, 7. 엄격하면 압제자라 하고, 8. 관청 교섭을 잘하면 행세객이라 하고, 9. 교제에 서투르면 멍텅구리라 하고, 10. 노숙한 즉 노폐물이라 하고, 11. 청년인즉 경박하다 하고 12. 성경만 가르치면 완고하다고 하고 13. 지식을 말한 즉 신령하지 않다고 한다.
오래 전에 목회한 길선주 목사가 나열한 목회자의 어려움은 오늘 우리가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상세한 분석이다. 이런 어려움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만이 갖는 것은 아니다. 역시 꽤 오래된 책이지만 미국의 월리엄 흄(William E. Hulme)은 『목회자들의 어려움』(Your Pastor's Problems) 이라는 책에서 제랄드 케네디 감독(Bishop Gerald Kennedy)이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목회자들에 대해 하는 말을 젊은 목회 지망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전식으로 모아 발췌한 것을 나열하고 있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이다.
그는 영적인 지도자야 (그는 결코 나를 휘저어 놓지 않아)
그는 정치를 강단에 불러들이고 있어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그는 불그레 해 (그는 기득권을 공격하고 있어)
그의 입장은 교회를 어렵게 할거야 (우리 기존 교인들은 기분이 상하고 있어)
나는 교회에 남아 있지 않겠어 (내 맘대로 못하면 교회를 떠나는 거지 뭐)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야 (예산이 초과 달성되었어)
그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않아 (그는 예수님처럼 하려고 해)
적어도 그는 좋은 목회자이잖아 (그의 설교는 별로야)
전교인들이 분노하고 있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문제를 만들거야!)
이렇게 목회 환경은 나날이 어려워져 가는 가운데 목회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점점 혼란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목회자는 리더인가? 제사장인가? 목회자들은 상담가인가? 개교회 목회자가 갖는 세 가지 종류의 어려움을 사례로 보고한 뒤 미국 교회의 자문역을 오래 감당한 앤더슨과 얼 존스(James D. Anderson, Ezra Earl Jones)는 다음과 같은 목회자의 어려움을 나열하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교인들에게 해석해 주어야 할 책임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죄와 실존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갖고 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교인들이 이 세상의 여러 인간적인 필요를 위해 몰두할 때 이 세상의 관심보다 하늘의 것을 찾으라고 도와야 한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활동에 많은 혁신을 가져오려 하면서도 교회와 지역의 전통을 민감하게 의식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은 모든 지역의 목회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목회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갖가지 수단을 도입하여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 기업의 CEO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는다.
이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예배를 주관하고, 목회 상담을 실시하고, 성서를 해석해주며, 교회 교육을 담당하고, 교회의 친교와 선교를 주도하는 전통적인 목회자의 역할 외에도 교회를 책임지고 성장시키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는 기업의 CEO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런 과도한 압력 가운데 우리 목회자들은 무리하게 교회를 성장시키려다 보니 원하지 않게 교회 안팎에 물의를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가운데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이단이니 사이비성이니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권위 상실의 문제, 정체성의 혼란, 교회 성장의 책임과 같은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교회 성장에의 압력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본다.
2. 한국 목회자들이 받는 교회 성장에의 압력
그렇다면 왜 한국의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이라는 압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일까? 이에는 보다 정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문헌적인 조사만으로도 한국 목회자들이 갖는 성장의 압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 교회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런 사회적 변화가 한국 교회에도 성장과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사회이며,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성장과 확장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만든 제품이 세계 시장을 누비며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4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문화는 세계 곳곳에 한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도에서 보듯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의 문화산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문화와 스포츠 등 여러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도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부문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성장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빠른 성장은 세계교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의 성장의 경험은 한국 목회자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이런 여러 발전하고 있는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발전하면 발전 할수록 재빨리 세속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사회의 다른 부분은 빠르게 발전하면서 한국교회도 발전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한쪽의 면이 있고 이 발전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또 다른 면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성장은 세속화를 가져 오고 이런 세속화된 사회는 한국 목회자들로 하여금 성장이라는 문제에 집중하도록 악순환의 원을 만들고 있다.
둘째,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 경쟁자들은 일상에 젖은 현대인들에게 과거 교회가 제공했던 많은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개념을 사용해 보자. 버거에 의하면 현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이 과정을 추동하는 힘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초한 기술이다. 그는 이를 이단의 보편화로서의 근대화라는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지던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선택의 대상으로 바뀐다. 우리의 음식, 언어, 외모, 조국 등 많은 면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던 영역에서 선택의 영역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남녀의 성마저 선택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종교도 이제는 이런 선택의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피터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논지를 우리 한국의 상황에 적용시켜 보면, 우리 한국 사회도 선택이 다양한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유사 자기 초월을 경험하게 하는 많은 문화적 행사, 정치행사, 대중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대규모 스포츠 행사들과 함께 한국 교회도 동시대 한국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선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들 유사 종교 단체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만큼 충성을 요구하고 헌신을 요구한다. 온갖 분장과 의상을 차려입고 응원도구를 들고 운동장을 꽉 매우는 젊은이들이 T.V. 화면을 가득 메우는 장면에서 유사 종교 스포츠에 헌신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갖가지 자원 봉사를 하면서 땀을 흘리고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여하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쾌척하는 유명 정치인의 정치 집회를 보면 이들에게서 어떤 유사 종교적 성격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또한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70년 80년대 대학가를 사로잡았던 운동권 학생들의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은 한국교회 젊은이들의 성경공부 열기를 능가할 정도의 열정과 헌신을 요구했었다. 이들은 그룹 공부 뿐 아니라 농촌으로 농활을 도시 공장으로 나가 노동운동을 펼치는 실천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강력한 경쟁자임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따라 등장한 강력한 경쟁자를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정치, 문화, 스포츠, 이데올로기와 같은 유사 종교적 단체 외에도 타 종교가 우리 한국교회와 경쟁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세가 두드려지고 있으며, 불교 사원에서 개최하는 하안거에는 신청자들이 쇄도하고 있다. 이들 타종교의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 반면 우리 한국교회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어 가는 듯이 보인다. 이들 타종교는 지도력의 강력한 단일체계를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 개신교계는 한기총, 한국교회협의회 등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듯이 일반인들에게 비쳐지고 있어 더욱더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타종교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더 교회 성장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생겨 난 것도 교회 성장에 집착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목회자들과 평신도가 교회에서 서로 협력하고 돕는 관계이기 보다는 서로 견제하고 갈등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강력한 견제 때문에 (특히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교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교회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자.
앞에서 인용한 앤더슨과 얼 존스는 『평신도 교역』(Ministry of the Laity)이라는 책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먼저 1958년 핸드릭 크래머(Hendrick Kraemer)의 『평신도 신학』 (A Theology of Laity)이 출판되었고 1959년에는 이브 콩가(Yves Congar)의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Lay People in the Church)를 출간하였는데 이 당시에 중심 주제였던 평신도 목회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후 등장한 많은 논의에서 주로 의견의 접근을 본 것은 평신도들의 사역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1981년 세계침례교 대회 평신도 분과에서는 “전체 교회의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라오스(laos) 즉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바티칸 제 2 공회의 영향 하에 카톨릭 교회에서도 사제와 평신도들이 공동으로 서명한 1977년 시카고 선언(Chicago Declaration of Christian Concern)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주 내용은 “교회는 평신도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고 세상에 사역한다(through the laity that the church speaks to, acts upon and ministers to the world)"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평신도 사역을 강조하는 당시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전투적인 은유였다. 이 전투적인 이미지는 60년대 미국교회가 월남 전쟁 반대 운동과 흑인 인권을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행동주의의 결과로 생겨난 것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서로의 책임과 기대에 대해 폭넓게 퍼진 혼란이었다는 것이다. 전쟁터라는 비유와 은유가 일상적이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은 진실로 자신들을 훈련소의 소장으로 생각하고 평신도들에게 훈련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평신도들은 그들의 지역사회와 이웃과 거리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자 이러한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논의되고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역할의 갈등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고 이런 경향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스미스(Donald Smith)의 책 『십자포화 중의 목회자』(Clergy in the Crossfire)와 같은 책이 나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등과 그 갈등의 해소에 대한 길을 모색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목회자에 대한 평신도의 견제가 다반사가 되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교회의 사회 운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은 평신도들이라고 하였으며 “군림하는 목회자들에 대해 자유를 외치는 평신도들의 전쟁”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1973년 미국 성공회는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설정이라고 선언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 회장인 오즈 기네스(Os Guinness)와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는 “나는 하나님, 가족 그리고 맥도날드를 믿는다. 그런데 내가 회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 순서가 바뀌게 된다.” 이런 희화적인 인터뷰에서 교회가 자랑하였던 사회적 역할이 이제는 엄청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위에서 논의한 사항은 미국 교회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어 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과의 긴장과 갈등은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다.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의 운영 문제를 놓고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교회 성장을 강력하게 선호하게 된다. 평신도들의 여러 가지 견제와 간섭에서 벗어나는 길은 교회를 성장시켜 여러 영역의 의사결정 과정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오늘 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웬만한 기업의 기업주 버금가는 여러 기관을 소유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며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이는 물론 교회가 성장하면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성장의 원인이 목회자의 권위 강화의 욕구가 한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넷째, 교회 성장에의 무리한 요구는 목회자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도 작용한다.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은 목회 자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개인적인 문제로 오는 수도 있다. 먼저 목회 자체가 주는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자. 샌포드 (John A. Sanford)는 그의 책 『목회 탈진』(Ministry Burnout)에서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끝이 없는 일이다.
2. 사람을 돌보는 일은 결코 가시적인 결과를 측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3. 목회는 반복적인 일의 연속이다.
4. 목회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는 일이다.
5. 목회는 언제나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6.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7. 목회자는 많은 영적인 음식(spiritual food) 때문이 아니라 트집(strokes)을 잡기 위해 예배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8. 목회자는 실패로 인해 기진맥진해 진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가 갖는 어려움을 성공에의 욕구 (동료 목회자들의 성공에 대한 시기심, 실패에의 두려움 등), 목회자 개인이 갖는 성격에서 오는 어려움(완벽주의, 지나친 교인과의 친밀감에서 오는 문제, 지도력 부재의 문제 등), 목회자 가정의 문제(부인과 자녀를 방치하는 문제 등), 신앙지도자로서의 갖는 문제(남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와 남을 파괴하려는 욕구, 자기 기만의 위험, 관료적 법에로의 도피 등), 목회자가 갖는 고독(친구의 부재 문제, 대중 가운데 고독의 문제, 사모와의 문제 등), 시간 관리의 문제(해도 해도 할 일이 계속되는 목회, 긍정적 부정적 참여), 영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적인 어려움 등의 문제를 들고 있다.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가정의 문제와 동료 목회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목회자도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직업인처럼 많은 인간적인 문제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해 줄 해결책으로서의 교회 성장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교회 성장이 가져다 주는 가시적인 성과는 목회자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나, 재정적인 문제, 자녀와 배우자를 비롯한 가정 문제 등 목회자가 갖는 많은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인식된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너도 나도 예외 없이 교회 성장에의 신화에 매달리게 되고 또한 이런 목회자들의 욕구를 이용하여 많은 교회 성장에 대한 훈련 프로그램이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되기도 한다. 교계 신문에 나오는 많은 교회 성장에 대한 세미나, 혹은 교회 관련 상품들의 광고는 결국 이런 수요가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가운데 목회자들은 이단적인 시비가 있다고 해도 매력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무리하게 도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최근 논란이 되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미국의 경우에는 목회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세속화의 물결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목회를 중단하고 사회사업가나 상담가 또는 교사로 직업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목회 현장에서 오는 어려가지 도전을 목회 자체를 그만 두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박근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60년 구미의 교계에서는 목사의 출애굽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목회자들이 주어진 목장을 버리고 다른 일터를 찾아간 시기였다. 대부분이 자기 자신들이 목사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음을 경험한데서 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또 다른 유형의 목회자들은 영적인 세계에 깊이 몰두하여 그런 체험을 통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목회자들은 치유나 방언과 같은 성령의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인들에게 순종을 이끌어 냄은 물론 자신을 다른 목회자와 차별시킴으로 교회 성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한편 이들을 추종하는 교인들은 또한 자신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높이 떠받들며 자신들의 교회가 최고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카리스마적인 목회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권위 상실의 시대에 목회자들의 이런 접근은 문제의 바른 해결이 아니라고 한다. 다시 박근원의 분석을 살펴보자.
...어떤 시비의 체험을 방편으로 목사의 권위를 방어하고 강화하려고만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결과로 생기는 지나친 권위주의, 과장된 영적 체험은 장기간 지속될 수도 없고 또 이런 대처 방법은 항상 다른 문제성을 수반하고 있다. 목사 자신들이 독선주의에 빠지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박근원은 이렇게 목회를 포기하거나 신비적인 영적 체험에 의존하는 목회자들보다는 새로운 권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목회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목회자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교회 성장을 모색하고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자신의 교회를 다른 교회와 차별화시키는(?) 목회전략을 채택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무리하게 성장을 추구하려는 목회자들의 욕구를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그리고 목회자 개인의 문제 해결 동기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이제 이러한 목회자들의 교회 성장에의 욕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으로 나타나는지 분석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이단적이고 사이비적인 것이냐를 판단하는데 있지 않다. 사실 그러한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현실적으로 실행되는 과정이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려는 것은 왜 외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기성 교회나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게 되는지 그 배경을 목회자들이 갖는 여러 어려움에 비추어 분석하려는 것이다.
a. 알파 프로그램(ALPHA)
알파 프로그램은 (ALPHA)은 1970년경 영국 성공회에서 생겨나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초신자를 교회로 초청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알파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Anyone can come: 누구든지 올 수 있다. Laughting and Learning:웃으면서 재미있게 배운다. Pasta: 음식을 함께 먹는다. Helping one another 서로 섬기며 돕는다. Ask anything: 무엇이든지 물어 볼 수 있다)라는 것을 보아도 알파 프로그램은 원래 믿지 않는 교인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는 알파 코리아(www.alphakorea.org)라는 웹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1976년 알파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런던 시내의 홀리 트리니티 브롬톤교회 홈페이지(http://www.htb.org.uk)를 방문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도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역시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소개되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 트래스 디아스 프로그램과 유사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들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알파코스는 1976년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HTB(Holy Trinity Brompton) 교회에서 찰스 만함(Charles Marnham) 신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으며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의 이탈이 생겨났다. 특히 17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0%가 교회를 떠났다는 보고도 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욕구를 정밀히 조사하여 이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가운데 이 프로그램이 생겨났다고 한다. 처음 시작한 찰스 만함 신부는 불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비공식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한시간 동안 이야기(Talk-이하 토크)를 하고, 한 시간 동안은 토크에 대한 의문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4주 동안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는데 일방적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제기한 의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통해 의문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매력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5년동안 지속하다가 1981년 존 어바인(John Irvine) 신부가 뒤를 이어 맡게 되었다. 존 어바인 신부는 당시 영국에 도입된 주 5일 근무제를 생각하여 기존의 4주 과정인 알파코스를 10주 과정으로 확대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주말 수양회(Weekend Program)로 성령의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알파코스는 1985년 니키 리(Nicky Lee)가 맡아 더욱 체계화시켰고 그 이후 알파코스는 니키 리의 절친한 동료인 니키 검블(Nicky Gumbel)이 HTB 교회에 부임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니키 검블은 알파코스를 맡으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알파 프로그램은 영국에서 생겨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영국교회(성공회)에 교인들이 빠져 나간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로 초신자들을 교회에 안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 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를 모르는 영국인들에게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식사, 동영상, 토의, 등을 통해 기독교가 그들의 가정, 사회,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주말에 한편 경관이 수려한 수양관에서 주말을 보내면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을 갖도록 설계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알파 프로그램은 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소개하려는 프로그램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영국의 문화적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소개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1. 영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성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주로 활용된다.
2. 이 프로그램은 서구 구미의 경우 공교육을 통해 토론문화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 활성화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토론보다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여 그대로 적용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3. 따라서 인도자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주입식으로 주도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4. 이 경우 참가자가 수동적으로 참여할 때 보다 감동이나 자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을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으로 보이다.
5. 이 프로그램을 참여한 및 성도들과 참여하지 않은 성도들 사이에 괴리감이 존재할 수 있다.
6. 따라서 이 프로그램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 총회 교육부와 선교부가 합동으로 제작한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알파 프로그램의 문제점은 아래에서 살펴볼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과 상당부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을 살펴본 후 고찰해 보려고 한다.
b. 트레스 디아스
천주교회에서 만들어진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는 한국교회에 단기간 내에 빠르게 확산됐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를 내기도 어렵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목회자들 가운데는 이에 매료되어 자기 교회에서 곧바로 개설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가톨릭적 요소를 배제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수용하여 실시함으로서 신앙훈련에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교단에서 연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제 80회 총회) 여기서는 그 연구 보고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트레스 디아스(Tres Dias)는 1949년 가톨릭에서 시작된 영성훈련인 꾸르시요(Roman Cathlic Cursillo)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는 스페인어로 ‘사흘’의 뜻이다. 3박 4일간 독특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은 교회 봉사에 싫증은 느끼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치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9년 1월 7-10일까지 3박 4일간 스페인의 마요르까(Mallorca)에서 공식적인 첫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7년 이 꾸르시요는 교황의 승인을 받게 된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평신도 영성 훈련으로 가장 각광받는 영성훈련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 꾸르시요가 미국으로 건너가 개신교인들도 참여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트레스 디아스이다.
이 프로그램은 참석자들의 참여도와 호응도를 고려하여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강의, 그릅토의, 찬양, 섬김 훈련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프로그램의 내용을 알리지 못하도록 한다. 이 훈련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룹을 형성하거나 차별의식을 갖게 되며 또 훈련 참가자들만의 모임인 Reunion을 지속적으로 가짐으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다.
1. 이 프로그램은 효과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비밀, 그리고 여러 가지 인위적인 요소를 통해 참가자들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듯한 문제점이 있다.
2.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간극을 고려하지 않고 도입되는 경우 (가령, 아브라조:포옹하는 행위) 문제가 발생한다.
3. 특히 이 프로그램을 이단적인 그룹이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 되었다. 이단이나 불건전한 단체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는 절대로 참석을 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이에 참여하지 않은 목회자들 사이에도 거리감이 생길 수 있다.
5. 이 프로그램을 교회 차별화의 프로그램으로 활용하여 타교회 교인을 끌어오는데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 천주교의 경우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6. 따라서 노회 차원이나 총회차원에서 이 프로그램을 교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보급하도록 해야 한다.
이상 우리는 외국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 문제가 보고되고 있는 대표적인 두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모두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과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긴장이 형성되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런 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한 교인과 참여하지 않은 교인사이의 간격도 문제다. 또한 이런 프로그램의 특성상 이런 프로그램을 잘 받아 들일 수 있는 교인들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토의식 프로그램에 익숙한 교육을 받은 교인들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총회가 트레스 디아스 프로그램 연구 결과에서 내 놓은 방안처럼, 총회가 건전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보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또한 목회자들이 탈진하거나 권위 상실의 문제를 위해서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목회자 가정의 문제들 돕기 위한 상담이나 교육은 이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갖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건전한 성장 프로그램은 어떻게 제공되어야 할까?
4. 보다 건전한 목회 성장 프로그램의 향한 총회의 노력
오늘날 급격히 열악해져 가는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의 바른 리더십에 대한 연구도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목회와 영성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 온 나우엔(Henri M. Nouwen)은 오래 전에 목회의 전문성(professionalism)와 영성(spirituality)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석한 적이 있다. 그는 목회자의 전문 사역인 교육, 설교, 목회상담, 조직, 그리고 예전 인도에 대해 분석하면서 어떻게 영성 훈련이 이들 사역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모색한다. 즉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는 교육, 성경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 이상의 설교, 교인들의 필요에 기술적으로 응답하는 것 이상의 목회상담, 교회의 여러 조직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 이상의 조직관리,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을 넘어서게 하는 예배를 어떻게 목회자가 이끌 것인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헨리 나우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저술을 통해 목회자의 지도력과 영성을 관련 시켜 분석한다. 그는 목회자들이 탈진(burnout)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적인 죽음의 심리적인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는 목회자들을 탈진시키는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유혹에 비교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첫째,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필요를 끊임없이 채워주려는 것(To Be Relevant)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에 대한 처방은 관상적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형성이라고 말한다. 목회자가 갖는 두 번째 유혹은 인기에 대한 욕구(To Be Spectacular)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구(To Be Powerful)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신학적 성찰을 통한 제자직 훈련이다. 이러한 분석은 비록 자신의 토론토 근교의 Daybreak L'Arche 공동체의 경험에 비추어 본 영성 신학적 입장에서 간단하게 분석한 것이지만 오늘날 목회자들의 입장을 잘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성 훈련과 목회와의 연결은 좋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만으로는 모든 목회자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알반 인스티튜터(Alban Institute)는 공동으로 지친 목회자들에게 휴식과 교회 갱신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계속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감리교회 선교국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우리 교단에서도 선교부에서 목회 갱신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건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 소속 부서 가령 국내선교부, 교육자원부 등이 공동으로 목회자를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 목회자들이 가진 교회 성장에의 욕구를 탓할 수 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 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음과 같은 향후 처방책을 제언하고자 한다.
1.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쟁과 성장을 부추기고 추동시키는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목회자들의 건전한 목회 윤리를 함양시켜야 한다.
2. 하나의 교회라는 오랜 교회의 전통에 따라 개교회주의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한 노회와 총회의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
3. 교회성장만을 유일한 목회자의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도록 모든 목회자들의 사례와 은퇴 후의 생활을 위한 연금 보장 등을 마련해야 한다.
4. 총회 차원에서 건전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교회 진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총회와 노회 차원에서 목회자들이 쉬고 기도할 수 있는 수양관과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6. 이미 문제가 보고되는 프로그램이나 프로그램 진행자에 대해서는 엄중 주의조치하고 교단 신문을 통한 광고나 보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나가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다. 더 이상 교회 성장에 대한 전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한국 교회도 성장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가운데 목회자들은 건강과 가정의 문제와 개인적인 자존심이 상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도 대도시의 대형교회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좋은 시설과 좋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통한 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인을 빼앗기는 교회의 목회자는 박탈감에 의해 무조건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한다. 이에 영합하여 이런 교회성장 프로그램 공급자들이 교계 신문 광고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가 모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이해하고 이들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총회적인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이는 제도적인 차원도 있고, 시설과 프로그램도 있다. 또한 교회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지속적인 목회자 계속 훈련과 교육 프로그램도 실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장과 경쟁을 우선시하는 사회풍토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한편 물의를 일으키는 프로그램과 목회자들에게는 엄중 경고하고 간섭할 수 있는 총회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문제도 강구해야 한다. 이는 결국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가장 괴롭히는 이단적인 사상은 물질만능주의 아닐까. 목회의 성공에 대한 지수가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과 예산의 규모 그리고 출석교회 교인 숫자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어야 할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성장에의 신화에 매달려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 성장 프로그램에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우리 모두가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7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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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와 설교연구원
글쓴이 : 쉐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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