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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산상수훈강해집

산상설교 1장 총서론

 

산상설교 1장 총서론



  어떤 교훈을 검토할 때에는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은 산상설교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산상설교를 검토해야만 하는 이유는 현하 교회의 일반의 특수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상성인데 이것은 복음전도 활동뿐만 아니라 교회생활 일반, 성경개념과 성화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의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가지 주요 원인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 읽는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며 그 방법이 올바라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자체가 그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예-바울의 서신에 관한 베드로의 논평.)


성경을 읽기는 읽지만 그릇된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하나의 선입적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원인이 있다. 이러한 것 보다 더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위험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경우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실례로 은혜를 강조하였던 사도 바울은 많은 오해를 받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출해낸 억지 추론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율법대로, 그 이상으로 살게 되어 있다. 산상설교가 강조하는바와 같이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 우리의 은혜론에 대한 견해는 실제에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백백한 가르침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유의 안이한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산상설교를 대면해야 한다.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은혜와 용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는 이 성경책 속에 산상설교가 들어있다. 또 산상설교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목적, 당면문제와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산상설교에 대한 여러 견해 중 한때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원리가 그 속에 깔려 있으며 우리가 행해야 할 바의 모든 것은 산상설교를 적용하는 것이라는 사회복음적 견해가 있었다.


또 한 견해는 산상설교를 모세 율법을 정교화 한 것이거나 그 해석쯤으로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세대주의 견해인데 그들은 우리 주님이 천국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산상설교는 천국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산상설교를 세대주의대로 한다면 본 산상설교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원래 특별히 제자들에게 설교되었고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 설교는 그 당시와 그 이후에 항상 이것을 실천하도록 작정된 사람들에게 설교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서신은 오늘의 기독교인을 위한 것인데 산상설교에 있는 교훈은 하나도 빠짐없이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나있다. 즉, 산상설교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바 󰡐�새 계명󰡑�에 대한 하나의 위대하고, 웅장하고, 완전한 정교화 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주님의 새 계명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법을 보게 되는 셈이다. 세대주의는 잘못된 천국관에 기초하고 있다. 천국은 임했고 임하고 있으며 아직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 곳마다 천국은 임한 것이며 따라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이렇게 통치하고 계신다.


산상설교의 목적은 천국을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살도록 의도된 방도이다. 그러나 이 논증의 완결을 위한 하나의 난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가 아닌 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18장 말미에 기록된, 주인에게 빚을 진 청지기 비유에서 꼭 같은 것을 가르친 사실을 기억하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의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 존전에서 깨어져 있을진대 나는 남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수 없다. 참으로 용서를 받고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이면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점에서의 산상설교의 의미이다.


본 설교를 연구하는 이유, 본 설교대로 살려고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산상설교를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산상설교만큼 중생과 성령과 그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우리가 산상설교를 듣고(그 안에 살며) 실천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주목하라.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외부 사람들을 끌어 드리기 위해 전도대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기독교인의 생활을 다시 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본 산상설교대로 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복음에 다이내믹한 것이 있음을,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 것이다. 교회사를 보아도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항상 산상설교를 신중히 여기고 본 설교에 자기들을 대면케 하였을 때에 일어났던 것을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