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팔복에는 매우 뚜렷한 순서가 있다. 심령의 가난함이 팔복의 시초에 와야 할 이유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삼령이 가난한 것은 기독교인과 천국시민의 기본 특징이 되기 때문이며 기타의 모든 특징은 어떤 의미에서 이 한가지 특징의 결과인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복은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개심에 앞서 뉘우침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해방하기에 앞서 정죄를 선언한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 대할 때 뿐만 아니라, 특히 산상설교의 전 메시지를 대할 때 우리 모두에게 엄중하고 철저한 테스트가 된다. 산상설교를 우리의 힘으로 행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즉각 정죄한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세속 저인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가난을 말씀하신 것이며, 여러분들이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가난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를 받은 정신이다.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것은 영의 가난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나라, 기독교인과 자연인 사이에 하나의 명백한 구별 즉 완전하고 절대적인 구별과 구분을 짓는다. 이 구절 이상으로 세속정신과 견해에 더 큰 반제가 되는 것을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에 개성을 운운하는 말들처럼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것을 없다. 그것은 대체로 혈육적이며 육적인 것이며, 일종의 외모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더구나 위태한 것은 이런 태도는 대체로 자신감과 자존심과 자기표현과 한편으로는 참된 개성과를 혼동하는 근거 하고 있다. 세상은 도전성과 자신감을 격려하고 높이며, 자기와 자기 자신의 개성을 이용하며 개성을 나타내는 개성을 인정받으려 애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일꾼들과 위대한 전도자들의 활동을 보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교회가 세상과 세상의 방법으로 그 전망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끔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교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가난하게 되는 것이 인기가 있어야 마땅하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모방자들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이 아니라 우리는 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사람은 자기의 외모와 인상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항상 올바른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이라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을 벗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중대한 유혹이 되고 있다. 우리의 개명을 꾀해서는 안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이것이다. 이것은 자만심의 완전한 결여,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결여를 의미한다. 우리가 낳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며, 우리가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어떻게 해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인가? 그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거나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하고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이다. 성경을 읽고, 그의 법을 읽고,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 가를 살피고 우리가 그 앞에 서 이음을 응시하라.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가 그를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그대로 그를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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