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과 영
주님은 5:17-20절에서 우리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하신 뒤에 21절 이후부터 그 진술을 구체적으로 확대한다. 즉, 율법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계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가르침과 대조하여 해석한다. 특별히 21-48절에서 주님은 여섯 개의 특정진술을 언급한다. 이것들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떤 공통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원리다.
1. 동일한 형식이 사용되었다.
첫째, 옛 사람들에게 말한 바.. 이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가 사용되었다.
옛 사람 들에게 말한 바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옛 사람에 게 전해진 것 즉, 모세의 율법을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옛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 전통적인 해석,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말할 수 도 있다. 여기서는 둘째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지 않는 다고 누누이 말해 왔기 때문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어를 사용했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의존하게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수 세기 동안 조상들이 만든 결정사항에 각양각색의 해석과 전통을 덧칠 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율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율법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제시한 율법의 한 표현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 주님의 목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대조하여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자기를 성경해석의 권위자로 제시한다. 즉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나는 모세의 율법을 책임지는 자이며 그러므로, 율법을 참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평범한 선생이 아니다. 단순한 율법의 해석자 혹은 한 사람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선지자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주님이 새 율법을 세우러 오셨다거나 새 윤리법전을 선언하러 오셨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산상 설교는 윤리 법전이 아니라 예수를 머리로 하는 백성이 갖는 일정한 유형과 성격이다.
2. 동일한 원리가 존재 한다.
기독교인은 규칙과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상황에 대해 중심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중심 소원은 율법의 참 뜻과 의도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짓 관념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첫째 원리, 율법의 문자보다 율법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문자적인 의미의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진정한 정신대로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둘째 원리, 행동을 넘어 생각과 동기와 의욕이 똑같이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속의 욕망도 중요하다.
셋째 원리, 율법의 진짜 목적은 ~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적극적으로 하고 더 나아가 옳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넷째 원리,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굴종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의 성격을 자유롭게 계발하고 촉진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게 한다.
다섯째 원리,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율법 자체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참되고 생명 있는 관계로 이끌어 준다.
3. 맺음말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훈련은 유익하고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가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훈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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