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지 말지니라.
21절부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해석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해석으로 주신 여섯 가지의 실례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장에서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라는 첫 번째 실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해석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은 십계명에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에 그 무엇인가를 추가시킴으로써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물론 율법에서도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두 가지를 병치시킴으로써 살인치 말라는 계명의 뜻을 실제 살인을 범하는 문제로 격하시켰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은 둘째 것을 첫째 것 바로 뒤에 덧붙임으로써 이 명령을 약화 시킨 것이다. 또 그들은 이 명령에 붙어있는 재가를 치안판사의 손에 벌하는 것으로 격하시키고 제한해 버렸다. 즉, 살인하면 치안판사에게 형벌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살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계명에서 참된 내용을 비워서 한낱 살인의 문제로 격하시켜 버렸고, 더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 살인을 범하지 않는 한, 이 점에서 매우 만족감을 느꼈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태연하게 대면하여 자신들이 이 율법을 지키고 성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주님의 견해와 해석 (22절)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와 같은 해석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계신다. 주님의 세 가지 명백한 표제 아래 그의 견해와 해석을 진술 하셨다.
첫째 원리 중요한 것은 의문 뿐 아니라 영이다. - 까닭 없는 분노감
율법은 살인치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만은 아니다. 이 계명은 실제 살인을 포함할 뿐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마음속에 까닭 없이 품는 분노감을 포함한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율법에 이 영적 내용이 모두 있었지만, 그들이 이 점을 놓친 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이 되었다. 옛 법은 마음속에 형제에 대하여 까닭 없는 분노감을 품지 말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마음속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통렬감을 느끼며 몰인정한 분노감을 느끼는 것은 살인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성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할 죄가 되는 것이다.
둘째 원리 누구든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리라. - 멸시적 태도
라가 곧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가 된다. 사실 우리는 살인과 도적질과 술 취함과 기타 죄들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르지 않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악한 행위뿐 아니라 악한 생각을 항상 살인과 함께 포함시키셨으며, 다툼과 원한과 속임수와 같이 우리가 그처럼 무섭고 더러운 죄로 여기지 않는 많은 죄까지도 포함 시키셨다. 멸시, 경멸, 조롱감 등은 궁극적으로 살인으로 유도되는 바로 그 영인 것이다. 즉, 살인은 육체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의 영과 혼, 어떤 모양으로든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원리 누구든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욕설의 표현
이것은 마음속의 증오와 매서움이 표현된 것을 의미한다. 물론 주님께서도 화를 선언하셨고(마 23장), 시편 기자도 그러했다. 하지만 주님의 선언은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신 분으로서 하신 재판 적 의미의 선언이며, 시편 기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원수에게 심판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죄인에게 분노감을 느껴서는 안 되며, 분노는 죄에 대해서만 나타나야 한다. 죄와 위선과 불의와 기타 악한 모든 것을 볼 때 분노감을 느껴야 마땅하지만, 죄인에게는 슬픔과 동정의 염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의 분노는 항상 의분이었으며, 거룩한 분노였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살인을 범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명령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며, 외부의 행동에만 관심을 가지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이미 지켰다고 알고 있는 그 무엇으로 혹은, 우리가 범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그 무엇으로 감손시킴으로써 일종의 자기 의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견해와 해석 (23-26절)
주님은 부정적인 것을 강조하시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우리가 형제와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적극적인 단계를 취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면 만사는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여기에 멈추어 서서는 안 되며 마음속에 그런 생각과 느낌을 품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 불친절하고 하잘 것 없는 생각들을 억제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목표를 노려야 한다. 우리는 형제와 우리들 사이의 영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단계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매우 미묘한 위험. 곧, 악을 선으로 상쇄함으로써 도덕상의 과실을 보상하려고 애쓰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사소한 일들의 문제에는 꼼꼼했지만 그들의 동료들을 멸시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것에 대해 죄책이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예물을 가져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의 동통을 모면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에서 느끼는 시기에는 정면으로 대하지 않는 실정이다. 한 가지 선행으로 한 가지 악행을 메워 줄 것이라고 생각 해 버린다. 주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비록 제물과 함께 제단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였음을 발견하게 되면, 그 앞에 계속 서 있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다리게 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를 품고 있는 한, 예배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형제와 잘못 되어 있는 것을 마음속에 알고 있는 이상, 기도하는 것도 헛되며 효과가 없다. 주님은 가서 그것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올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과 올바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 일을 즉시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할 수 있는 한 급히 사화해야한다. 우리가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철저히 고백하고, 자기 방어나 자기 의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조처가 있다면 즉각 취해야 한다. 겸손해야 하며 말하자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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