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웃은 이스라엘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나 동시에 다른 사람을 외국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멸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런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미워하라고 격려한다고할 가능성이 있는 진술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가나안 약속된 땅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제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특수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말렉족의 말살, 도피성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를 죽일수 있는 권리, 그리고 특별히 시편69편의 저주시의 내용은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명령을 백성들에게 정당화시켜주는 것으로 본바 구약성경의 가르침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문제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주시편을 포함하여 이 모든 각양 명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사법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시를 쓸때 자기에 관해 쓴 것이 아니라 교회에 관해 썼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저주는 항상 그 성격상 사법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원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긍정적인 접근
이 문제에 직면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것을 원리에 비추어 보는 방법입니다. 곧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로 끝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취급하신대로 다른 사람들을 취급해야 합니다.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과 같이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처한 신분에 따라서 그들을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로 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행하는 것에서 여러분을 격리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여러분을 격리시키는 방법 뿐입니다. 우리의 가장 비극적인 것의 하나는 우리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며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너무 지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일거에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사랑의 새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 원리를 소유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을 전과 다르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무기력한 희생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행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구할 수 있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해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할 까닭은 그들을 친구로 얻을 수 있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것이 유화주의의 기초가 됨)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들에 대한 가능성의 관점 때문에서도 아닙니다.
이런 일을 해야하는 오직 한가지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신성의 불꽃을 찾아내어 그것에 부채질을 하여 타오르게 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해답은 첫째로, 신랄한 말을 친절한 말로 응답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라'입니다. 끝으로 '너희에게 악행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입니다.
이것의 의미와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네 원수를 좋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의 타고난 천성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어는 누구나 사랑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신체나 기질이나 기타 무수히 많은 것들에 좌우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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