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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산상수훈강해집

의복과 십리(十里)

 

의복과 십리(十里)



도전적인 구절의  38절에서 42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큰 원리들을 설정한 바가 있다. 우리는 이 같은 난해한 구절에 올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sprit)의 준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영은 인지력(認知力)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우리의 영을 준비하여 우리의 모든 태도가 이 말씀을 받아들일만한 태도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얼마간 시간을 보내었다 할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자세히 다루어 보자. 주님은 먼저자기 몸에 관한일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뜻은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고 있는지 아닌지를 우리로 시험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방법은,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두서없이 예를 든 세 가지 실례라 할 수 있다.


첫째 원리는 󰡐�다른 편 뺨을 돌려댄다󰡑�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천명(闡明)한 일반원리에 비추어서 볼 때 신체적인 차원에서 시작한 이 말씀은 우리가 보복정신을 제거해야 하며 우리에게 가해자는 가해나 악에 대해 방어하고 보구하려는 욕망을 제거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느닷없이 오른 뺨을 맞는 것을 상상하고 계신다. 본능은 즉각 되받아 쳐서 그를 보복하려한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절대적으로(categorically) 말씀하신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으로서는 유명한 콘월의 전도자 빌레 브레이와 허드슨 테일러가 있다.


이것의 의미는 즉 우리는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기타 유의 것이든 간에 일신상(一身上) 가해나 모욕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자아와 자기존중에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라신다. 예로서 일신상의 비판, 모욕, 욕설 및 사람들이 가할 수 있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바울을 들 수 있다.


(고전 4:3)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은 하나의 제한(qualification)이 아니라 이 교훈의 정교화(精巧化)라 하겠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법과 질서를 지키는데 무관심하라고 가르치심이 아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하는 일신상의 어떤 모욕이나 경멸을 내가 참아야하기는 하되, 동시에 나는 법과 질서를 믿어야 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실례는 겉옷과 속옷의 실례이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의 권리,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경향에 관심을 가지신다. 유대법에 의하면 속옷을 요구하며 송사하는 것이 합법이긴 해도 그의 겉옷을 요구하며 송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주님은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문제를 다루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원리에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뿐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의무 대신 자기권리를 주장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주님은 우리가 가끔 그 결과로서 불의를 당하더라도 우리의 법적 권리마저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상이 이 원리의 대략적 진술이다.


우리는 다시 이 진술을 정교화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성구와 모순되게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다른 편 뺨을 들여대는 일은 불가피하며, 또 우리 옷 때문에 송사를 당할 때에는 겉옷까지도 던져 주어여야 할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 자신이 얼굴에 일격을 받았을 때 다른 편 뺨을 돌려대지 아니하고 항의를 하셨다.(요 18:22-23) 그리고 사도 바울도 치안관에게 자기를 석방하러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행 16:27) 하지만 우리가 애초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 두 가지 진술을 조화시키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이 실례들은 주님이나 사도가 일신상의 권리를 주장한 것의 실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존엄성과 면목을 상기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셨고, 사도 바울은 치안관들이 자기를 투옥함으로써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것과 법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그들이 법을 깨뜨리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기독교인이 일신상의 모욕이나 자기 방어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명예요 공의와 의와 진리의 문제가 될 때에는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항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현대의 기독교인들의 삶에 극히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것들에 직면해 있는 기독교인들이 중국과 기타 소위 󰡐�철의장막󰡑�(鐵一帳幕) 뒤에 많이 있다. 우리 자신도 이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의 원리들을 마음 속에 명심해야 한다.


다음 원리는 10 리를 가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5리를 가자고 강요하던 일은 고대 세계에 매우 흔히 있던 습관이었다. 이것은 특히 다른 나라를 정복한 국가가 사용한 권력이었고, 그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에 정복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님은 이것을 의중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하고 매우 실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여기 우리 주님의 영(靈)에 따라 그 이상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자연인의 분개와 관계되어 있다. 즉 우리가 싫어하고 반대하는 법에 대해 불쾌감과 혐오를 나타내는 것을 주님은 정죄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갈 준비하며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벧전 2장)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친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원리를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최저의 수준에서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의 마음과 영적 상태는 그 아무 권세도 우리에게 모욕이 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각양각생의 모양으로 밀려오는 곤경들 앞에 저항하지 아니하는 영적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덧붙일 것은 이 명령은 우리가 정부를 교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합법적 수단을 통해져야 한다.


끝으로 주고 빌려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자아의 부정에 관한 것이다. 주님은 항상 자기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정신을 꾸짖고 계신다. 이것이 본문의 원리가 됨을 인식하며 이제는 제약에 관한 대목으로 넘어가자


주님은 사람이 자아와 자기중심성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려는 경향을 생각하고 계신다.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라고 말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상으로 이 명령을 단계적으로 연구하는 가운데 이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세상이나 비 기독교인을 위한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속 편하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바로 그 말씀이다. 이것은 사소한 실제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인격을 다루고 있다. 성결은 살아야 할 삶이며, 세부에 걸쳐 살아야 할 생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법률 곧 세율, 세금 기타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자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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