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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산상수훈강해집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하여



본 장에서 38절로부터 42절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이 이 대목에 올 때 상세한 점에 너무 몰두하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인 나머지 여기에 표현된 큰 원리 곧 기독교인의 자기에 대한 태도를 조금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원초적 관심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있다. 우리의 행함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사람됨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이 대목(38-42)에서 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제시하였고 그 이하 대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거기서 주님이 계속 말씀하시길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과 관련된다. 이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너무 중요하므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산상설교는 교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발견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편 뺨을 돌려대는 것에 있지 않고 내가 그렇게 할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 있다. 이 교리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견해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에 대해 민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사람들이 전혀 상처를 받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서술하고 계신다. 이 상태는 가장 철저한 상태이다. 바울은 자기를 판단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일임했다. 이러므로 그는 자기가 상처받을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들어갔다. (고전 4:3) 우리가 목표하는 바 이상(理想)은 이런 상태이다. 곧 자아와 자기이익에 대한 무관심이다.


위대한 죠지 뮬러가 매우 분명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는 󰡐�언젠가 제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죠지 뮬러와 그의 의견과 그가 좋아하는 것들과 취미 및 그의 의지에 대해 철저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시인과 비난에 대해 죽고, 나의 형제와 친구의 시인이나 꾸지람에 대해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하나님께 시인받기 위해 골몰해 왔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이 말은 본문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고 적절히 요약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가 말한 순서를 주목해봐야겠다. 매우 뚜렷한 순서가 있는데 가장 멀리 제거한 것은 세상이었고 그런 다음 친구와 동료들이 온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이 자기에 대한 시인이나 비난에 대해 죽는 일이다. 궁극적 단계 곧 자기 자신의 평가, 자기에 대한 시인, 자기에 대한 판단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죠지 뮬러가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의 열쇠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의 오직 한 가지 관심사였던 하나님께 시인 받는 것에 골몰해야한다. 즉 기독교인은 그와 같은 상태에, 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요점은, 기독교인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 속에 들어 있는 교리는 기독교인 외에 이것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인과는 정반대 된다. 신사와 명예에 대한 세상의 관념은 항상 자기방어를 의미한다. 곧 자기를 주장하고 항상 자기와 자기 명예를 변호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중생의 교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교리 진술 후 우리는 이제 실제적 질문을 물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이 살 수 있는가? 우선 실제적 차원에서 접근해 보자. 처음 우리가 할 것은 이 자아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직하게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내가 방어적 심리작용을 느끼는 순간 나는 조용히 나를 대면하여 질문을 물어봐야 한다. 자기 검토는 이 문제에서 승리를 얻어야 하는 한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극히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주님의 가르치신 수준에 도달하려면 이런 과정은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부정인 것이다.


실제적 차원에서 취급해야 할 문제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범위󰡑�를 인신하는 일이다. 나 자신의 삶과 일상적인 일, 사람들 간의 계약관계 등을 검토해보자. 자아가 이것에 침투에 들어오는 범위를 잠깐 숙고해 보자. 만일 이 모든 것을 분석해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개입하는 범위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자. 도대체 우리 삶의 문제 거리가 오직 자아 때문이라는 것과 그 범위를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나 있는지 의아스럽다. 지난 문제들을 회상해봤을 때 모든 것은 거의가 자아의 문제임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자아는 생활의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이다.


하지만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이것을 교리적으로 바라보기로 하자. 교리적 신학적 방법으로 자아를 보면 인류의 타락의 책임은 자아에 있다. 마귀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다. 너는 정당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셈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다. 이것이 타락의 원인이다. 이것은 교리에서 본 자아이다. 하지만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자이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는 욕망은 필연코 죄이며,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 대로 하면 성결은 결국 이 자아 중심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가운데 성결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 그토록 많은 파멸을 일으켜온 이 자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으며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죠지 뮬러와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인식하는 데 있다.


끝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서 그리스도에 비추어 자아의 문제를 보자. 그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자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해 자기 스스로 살지 않으셨다. 사도의 논법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인 것이다. 이것의 극치는 십자가 위의 그분의 죽으심에서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논법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우리의 최대의 의욕은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이었다. 우리는 자기 방어나 자기 민감성의 생활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모욕을 당하더라도 보복하지 않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이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살라고 말씀하신 삶에 대해 말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돌아가셨다. 동시에 복음은 우리에게, 그가 다시 사셨고 성령의 회복력과 활력을 교회에 보내셨고, 그를 믿는 뭇 사람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소망이 있다. 자아는 너무 사악하므로 큰 고통과 비참과 불행으로 인도하며 최종적으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 하나님의 아들의 복되신 사역을 부정해 버린다. 어째서 기독교인인 우리가 자아에 대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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