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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로 만 카 톨 릭

제1강 「가이사」와 그리스도

제1강 「가이사」와 그리스도



"역사를 정중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역사적(歷史的)으로 취급하라"
  - 빼귀(Péguy)





1.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죄(罪) 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고 하나님을 찾으며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히 9.26)에,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2).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돋는 해가 되어 위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셨다"(눅 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말씀하신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章)중의 하나인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천사들의 대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8,20). "큰 슬픔의 종교를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어졌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세주가「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라고 책망하셨다.

    1984년,「로마」교황의「벨기에」방문을 앞두고 로마카톨릭 교회의「단넬스」추기경이 발표한 3.18 선언 -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 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카톨릭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이 없는 '복음'인 것에 무지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를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보았다. 우리들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음미하길 바란다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종교란 단어를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종교(宗敎)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틀어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하여「바울」과「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다. 반면에 신구약에 120여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말씀하신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상태에까지 끌고가서 복종하게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을 종교라는 감옥에 처넣고 질문을 불허하며 그 속에서는 인간의 자유정신이 말살되어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종교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을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는 일에 열중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르실 수가 없으신 분이다. 종교는 유전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은 결단성이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편리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종교를 인간의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 변형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란 우상의 고향이다.

    기독교인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는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히 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각자가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백성들이다.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이렇듯 종교와 상관없이「갈릴리」에서 시작되고「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늘 돌질로 맞이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 23.27)라고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오늘날「예루살렘」성(城)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었던「예루살렘」성 바깥,「베들레헴」의 구유통을 빌어 구세주가 탄생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부터니라"(미 5.2, KJV). 복음은「예루살렘」성 바깥,「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마 9.14) 등 인간의 유전에 중독된 자들의 물음은 온통 종교적인 것들로 차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종교적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는「예루살렘」성의 스캔들거리가 되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 꼭대기 변화산상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주셨다. 종교 안에서는 '나'(我)를 부르짖고 복음 안에서는 "그는 흥하여야겠고"(요 3.30)라고 주님 제일주의가 된다. 종교는 전통 자랑, 건물 자랑, 이 생(生)의 자랑으로 꽉 차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 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바울」은 예수 이외의 것을 모두 배설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을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 그 옛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낸 "화로다 나여... 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대로 말씀을 써먹고,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쓰임 당한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사함을 주셨다. 그러나 천국복음을 가지고 종교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3년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23장). 그들은 6백 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요 13.34,35)는「그리스도」의 계명 한 가지도 못지켰다. 실로 그는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예루살렘」성의 종교지도자들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유일한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그 교만은 시기 증오로 변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는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心中)에서 떠나온 '복된 소식'이다. 이 길은 '좁은 길'(마 7.13,14)이요, 그래서 주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고 위로하셨던 것이다.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져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프란시스 쉐이퍼」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 내가 헌신한 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주의적이며 자아중심적인 나(我)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2. 약대와 하루살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20세기 말엽의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될 배도(살후 2.1-8)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탄이 수천 년을 해온 수법(手法), "대화로 풀어보자"는 등의 소리에 속아 천주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진, 하나님보다 더 선한 체하며 감상적이고도 낭만적(?)인「에큐메니칼」지도자들이 양들을 이끌고 이리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저들의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지도자들은「프란시스 쉐이퍼」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타협의 명수"로 둔갑하였고(1),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한국교회는「로마」화(化), 즉「바벨론」화의 재난에 처해있다. 오늘날 기독교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기독교란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온 침입자(사탄의「에큐메니즘」세력)에 의해 아파트가 붕괴되려는 직전에 놓여있는데도 그 아파트에 들어 살고 있는 주민(교단 및 개교회)들은 자기방 하나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이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그림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결을 원치 않는다. 타(他)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색을 검다고 힘주어 말할 때, 사탄의 세력은 부정적인 자, 종교적 완고주의자로 몰아부친다. 그리고는 검은색을 희다고 거짓된 주장을 하는 진정한 완고주의자가 때로는 논쟁에서 승리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비열한 인신공격은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단지 인류를 기만해오고 있는, '한 몸에 두 혼'(종교와 정치)을 공유한(2)「바벨론」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그 엄청난, 가공할 교리들과 그 끔찍한 과거의 역사 앞에 어찌해서 벙어리가 되었는가? 사탄의 최대 보루(堡壘)인 천주교에 무지, 그 결과로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 초대형 이단(Super-Cult) 천주교(약대)는 삼키는 일치운동에 깊숙히 빠져있다. 또 입을 열어야 할 종들이 이 모양 저 핑계로 입을 다물고 있어, 요한 12.42,43의 말씀 - "그러나 관원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는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지도자가 죽어도 흩어지지 않는 이단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더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요직을 잡고 있는 이러한「에큐메니칼」지도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먼저 교회 안을 급히 돌아다 볼 때가 아닌가?「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가지고, 단순하고도 순전한 복음을 요란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점검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없이 멀리 떠나와, 이제는「바벨론」종교를 답습, 저들의 행위와 같다보니 저들이 변한 것으로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한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천주교와 일치운동에 빠져있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믿고 있는 천주교도들은 성경과 로마카톨릭주의 이 모두를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우리 주님이 빛과 어두움을, 생명과 사망을 갈라놓은 것처럼, 옛 선지자들의 기개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갈라놓지 않는다면, 양(羊)들은 여전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의 2번째 계명 -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을 '십계명'에서 제거시키고, 또 '마리아'에게 간구하는 수많은 기도문을 만들어 놓고도 '마리아'에게 기도드리지 않는다는 천주교. 개혁자들이, 믿음의 선진들이 '킹 제임스'성경(KJV)의 서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Ch.25, Sec.6) 등을 통해 분명하게 이단으로 규명한 적그리스도 로마 교황. '파티마'의 마리아(Our Lady of Fatima, Portugal) 동상을 바티칸의 '베드로'광장에 옮겨놓고 특별 미사를 드리고 있는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2세. 15 만명이 현장에서, 10 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TV 현장 중계를 통하여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1984.3.24).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가 아닐 뿐더러 그 비슷한 것도 아니다.


Our Lady of Fatima, Portugal



3. 로마카톨릭 교회는 마귀의 최대의 걸작품이다

    로마카톨릭 교회는「바티칸」의「베드로」광장에「바벨론」종교의 심벌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꼭대기에 세계통치를 꿈꾸었던「시이저」(가이사)의 재를 담은 청동 지구본을 올려놓았다(3).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 지상의 세속 통치권을 주장해온「로마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권세를 추구해왔다. 천주교 사제 플레쳐(Philip Fletcher)는 그가 편집하는 천주교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면, 그는 적(反)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4). 일명「이그나티우스」사제라고 불렸던 스펜서(Hon. G.A. Spencer) 경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5). 로이드 존스(D.M. Lloyd Jones, 1899-1981) 박사는 그의「시리즈」설교 "마귀의 궤계"(엡 6.11) 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마카톨릭교는 마귀의 최대의 걸작품이다... 로마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교회(천주교)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semper eadem). 어떻게 변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로마교회가 변한다면 스스로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 만약 하나의 거대한 세계적인 교회가 있다면,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를 흡수하고 무지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다'(6). 그는 1969년「영국복음주의협회」에서 행한 메시지에서 고전 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라는 말씀을 인용, 경고의 나팔을 울렸야 할 것을 힘주어 강조하였다(7). 또 한 기고문에선, '단순히 예수께 나오세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라고 설교하는 기독교는, 로마(종교)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복음주의 전도 캠페인을 벌리는 사람들이,「당신은 천주교인이세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 전도자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8).

  「옥스포드」대학 출신의 고전어(古典語) 학자이자 영국 왕실의 헨리 8세의 주치의(主治醫)로서, 완미한 로마카톨릭 교도로 말년에는「로마」교회 사제로 서품(敍品)을 받았던 리나크러(Thomas Linacre, 1460-1524)는 생전에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읽다가 견디지 못해 책을 던지면서, '이 성경이 사실이 아니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부르짖었다(9). 그는 첫 눈에「로마」교회의 조직이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회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것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로욜라」심리연구소 창설자로서, 세계천주교 심리학자 및 정신병학자 모임의 국제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요직을 겸하고 있었던 전「예수회」사제 신학자 파드로사(Luis Padrosa)는 기독교 신학자들과의 논쟁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다가 거듭난 후「로마」교회를 떠났다. 1950년대 전「유럽」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후에 복음주의교회 목사가 된 그는 여러 책을 집필하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는 기독교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10).

    지난 20년 동안 36판이나 거듭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Walter Martin) 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11), 맥도웰(Josh McDowell)도 이단들의 특성 11 가지를 언급하고 있으나(12), 이 저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의 범주에 완전하게 해당될 뿐 아니라, 11 가지의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대 바벨론의 비밀", 천주교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눈이 가려져있음을 보게 된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계 17.18)에 대하여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주석가들도 별 수 없이 저들의 교부(敎父)들을 통해 전해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두번째 바벨론 로마, 서방의 바벨론'「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Jerome, c.342-420)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지칭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가(史家)이자 변증학자였던「이태리」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 추기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프랑스」의「예수회」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 추기경은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다'라고 썼으며,「루이」14세로 하여금 낭뜨 칙령을 번복(飜覆)케 함으로써「프랑스」기독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이었던 보쉬에(J.B. Bossuet, 1629-1704) 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 분명하여 바벨론에서 로마를 발견해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벨론은 로마임을 가르쳤다'고 시인(是認)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1890) 추기경은 1840년「로마」교회(敎會)에 가담하기 전에「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예수회」학자 헌터(S.J. Hunter)는 그의 저서「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다(13).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로마의 특성은 바벨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反)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14). 1970년,「로마」교황「바오로」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英文)판 천주교 성경의 계시록 14-18장의「바벨론」에 대한 관주 설명은 모두가「로마」임을 밝히고 있다(15).


4.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2).

    로마교황권 제도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예수회」사제였던 휀스브뢰흐(G.P. Von Hönsbröch)가 쓴「사회문명에 미친 교황권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제도는 ...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 교황권 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한, 넓지만 은밀히 짜여지고 고도로 마무리된 조직이다.' 또 그의 다른 저술「교황권 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는 '교황권 지상주의(16)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 정치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세계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해오고 있다... 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 근거를 찾고있는 신성한 기관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아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철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그의 명저(名著) 국부론(國富論, Wealth of Nations)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교회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대적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옥스포드」와「케임브리지」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교회 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1901)은 더 단호하다: '로마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 전제독재국이다.'「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성경을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선언하신「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로마제국주의」의 영광인 세상권력을 추구해온「로마」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政治)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패망한 로마제국의 유령이며, 그 무덤위에 왕관을 쓴채로 앉아있다'라고 기록하였다(17).

    이「바벨론」세력에 대해「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K. Clifford, 1845-1879) 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 사제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젼(C.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는 말씀을 인용, 로마카톨릭교의 사악(邪惡)한 제도를 건설하고 돋우려고 시도(試圖)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카톨릭교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시대에 로마카톨릭교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죄악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를 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때에 로마교회가 저지른 암흑상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 한다.'

    '로마교회에게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악마는 거위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성령의 축복으로 씌어진 저술이 마귀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18) 그는 또 미래의 사역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로마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19).


  1984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기하여 한국의 천주교가 서울의 여의도 광장에 세운 스탠드. 십자가 앞의 '피라밋'형의 지붕과 대형 '앙크'(♀)형의 스탠드에 세워진 십자가는 로마종교의 근원이 바벨론임을 저들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다. 로마교황 문장의 M 은 마리아를 의미한다.


5.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로마」종교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이 본질이 언젠가는 선(善)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대 바벨론의 비밀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 복음의 '종교적' 이해(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된 소식이다!)는 모든 악(惡)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회의 종교화 현상을 쳐다보는 것보다 슬픈 것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우상의 소굴처럼 둔갑한 오늘날의 교회내의 장식과 강대상들을 보라. 이것은 타락의 극치이자 최대의 위기이다. 여기에 사탄의 종교가 자기와 닮은 기독교에 침투한다. 그들은 기독교 용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이끌어 간다. 오늘날「로마」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로마」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로마」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세례, "「그리스도」를 영접", 은사경험,「케리그마」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는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20). 그러면서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된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로마」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은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의 표현 - "과거 카톨릭과 현대의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제2 바티칸」공회 이후 카톨릭의 신학사상은 개방적으로 변했다" - 과 같은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된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제2 바티칸」공회의 교황,「요한」23세,「바오로」6세의 선언이 밝힌 것과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뭐가 바뀌었단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마리아」, 성자, 전통 숭배가 해제되었단 말인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치 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탄의 세력은 "빛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3-15),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4-28)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6.「뉴에이지」(새시대) 운동과 새세계 질서

    유럽공동체의 대부(代父) 노릇을 해온「로마」교황청은 유럽 통일뿐만 아니라, 세계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새시대 운동새세계 질서을 추진해왔으며,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세력의 조종하에 있는 것으로, 질서(Order)로 알려진 이 단어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피라밋(Pyramid)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로마」교회의 교단에 사용되는 명령 용어이다. 독일「튀빙겐」(Tübingen) 대학의「로마카톨릭」신학부(神學部)의 실천신학 교수 글라이나헤르(N. Gleinacher)는 마가 10.24-44 를 인용,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카톨릭 교회는 우리의 인간사회에 남아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의 하나이다'라고 언급하였다(21).「비오」12세 이후의 모든 교황들이 새시대운동(NAM)과 새세계질서(NWO)를 지지해왔고,「제2 바티칸」공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의 측근으로서「로마교황청」신학교의 교수였던, 전「예수회」사제 마틴(M. Martin) 박사는 최근 그의 저술에서 현(現) 교황「요한 바오로」2세도 지지자임을 밝히고 있으며, 머지않아「로마」교황의 주도하의 세계단일정부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였다(22).

  「예수회」창설자 로욜라는 생전에 로마와 빠리를 자신의 꿈을 펴는 거룩한 도시로 여겼고(23), 오늘날 정확하게 이 두 도시는「로욜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새로운 로마제국' 건설의 활동무대가 되어, 한 몸에 두 얼굴을 가졌던 야누스(Janus)의 후예들이 종교와 정치 권력을 가지고 새시대운동, 새세계질서를 조종하는 세력의 본거지가 되고 있다. '외적인 종교로서의 로마카톨릭교와 법률과 권력의 국가로서의 로마카톨릭교는 복음과 아무런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아니 근본적으로 복음과 모순이 된다'(24)는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의 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聖經)을 상고해야 한다. 그리고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는 말씀의 의미를 열심히 물어야 한다.


7. 기독교와 교회교(敎會敎)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믿음의 도는 성도(saints)들에게 주어졌지 학자(scholars)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파괴, 복음의 종교화 작업을 위해 사탄은 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교회지도자들은 사도에 걸맞는 칭호를 찾다가 옛「바벨론」종교의 제사장들이 사용한 아버지(Father)란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은「제우스」신(神)이 아버지로 불려진 것도 알고 있었다. 교회의 박사들로 알려진 초대 교부(Church Father)란 역시 '교회의 아버지'란 뜻이 된다. 그리하여 이 말은 후에 교황, 신부(神父), 대부(代父) 등 로마카톨릭 용어들의 씨가 되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시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고 경고하셨다. 인간의 명예욕은 이미 복음으로 선포된 것을 종교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종교'('religio',-Lat.)란 '로마의 종교의식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그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고되어온 이름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마귀를 쫓아낸 이름 또한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막 9.38; 눅 10.17; 행 16.18). 교회의 이름이 아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마 28.19; 행 8.16; 19.5).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업수이 여겼던 구약의 제사장들처럼(말 1.6),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영광을 토색질하고도 앞줄에 나와 토색질한 것이 없다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처럼(눅 18.11), 종교인들의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예수의 이름은 버리고 교회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조직은 주 예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언제나 주 주교(the Lord Bishop)를 앉혔다. 구속주가 되신「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거두어졌고, "예수" 대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들고 나섰다.

    사탄은 구원의 초점을 예수로부터 교회로 돌리고 있었다. 학자들은 교회를 두고 성경에도 없는 여러 가지 수식어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레네우스(Irenaeus)의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의 '처녀 어머니'(Virgin Mother), 오리겐(Origen)의 '국가들의 어머니'(Mother of Nations), 키프리안(Cyprian)의 '어머니 교회' 등의 표현들이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로마」교회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A.D. 3세기 경에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다'라는 해괴망측한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교회에 헌신, '모든 신자의 어머니'(Mother of the Faithful)가 되시는 교회 사랑이 곧 신앙(信仰)으로 간주되었다.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리용(Lyons)의 신자들은 교회를 '어머니'(Mother)로 부르기 시작하였다.「바벨론」의 어미(계 17.5)가 이미「로마」제국의 영토 안의 교회에 뿌리를 내렸다. 예수의 이름은 제쳐지고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 오리겐의 글에 자주 언급된 표현 - '교회의 규정','교회의 신앙','교회의 가르침','교회의 전통' - 들은 교회의 주교들이 가졌던 종교적 야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아이 예수"(행 4.27, KJV)를 높이는 대신,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자기들이 소속된 교회를 높이는데 혼신을 쏟았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ciam nulla salus)라는 말이 나오면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엡 5.25)를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천국복음"(막 1.14)을 보게 하는 대신에, "그의 몸된 교회"(골 1.18,24)를 강조,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인간 중심의 종교, 교회교(敎會敎, Churchianity)로 향하게 하였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엡 5.23,24)의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올라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기독교회사의 흐름을 바꾼 영향력을 행사한 이단들은 거의 모두가 학자들이었다. 사도「바울」과「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이「그리스도」의 교회를 교란케 할 것임을 미리 예언하였다(행 20.19; 벧후 2.1).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7)는「그리스도」교회의 일치를 예수가 아닌 주교에 집중시켜, 주교감독 정치제도를 도입, 기독신앙의 일치의 가장 안전한 수호자를 주교(Bishop)에 두었다. 성령께서 가라사대 '주교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 주교가 없이는 성례전, 결혼식 거행 등을 불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자리에 대리자로 자처한 이그나티우스에 대해 터툴리안(Tertullian)은 '교회는 주교들의 모임이 아니다"라고 항의하였다.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는 대중을 향하여 감히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주교"(One God, one Christ, one Bishop)을 외침으로「삼위일체」의 성령의 자리를 주교로 대치시켰고,「콘스탄티노플」에서는 주교에 대항한 한 기병장교 대장을 죽여 거리에 끌고다니게 함으로써 주교에 대한 불경죄의 본을 보여주었다. 주교들의 종교성은 복음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고 복음을 사유화(私有化)하였다. 그리하여 예수의 복음보다도 종교에 몰두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3위(三位)가 되신 성령을 통해 그의 사역을 펼칠 터전으로 삼기를 원했으나, 주교들은 주교들은 성령의 자리를 점령,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였으며, 교회에 대한 저들의 세속적인 야심은「그리스도」의 교회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빠스깔(B. Pascal, 1623-1662)이 암시하였듯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자의 하나님, 신학자들의 하나님으로 채색질하였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지 종교나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의 하나는 영생(永生)이며, 우리의 구속주는 예수이며, 그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KJV). 예수 외에 어느 누가 우리에게 영생을 책임져 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복음의 본질보다 인간의 종교성을 밝히는 자들은 천국복음을 인간의 종교와 같은 범주에다 두고 다루는 죄악(罪惡)을 범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배타적이라고까지 말하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다.


8. 로마카톨릭교의 기원

  「로마주의」의 비밀에 관해 가장 잘 기록된 책은 - 기독교회사가에 의해 씌어진 책이 아니고,「로마주의」의 미궁에서 헤어나온 수십만 명에 달하는 전직 사제들이 쓴 책도 아니다 -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참「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그리스도」께서만 세우신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는 로마카톨릭교에서 시작된 종교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며, 세상과 짝하여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가 넓은 길, 세상과의 일치의 길을 택한 것이 오늘날의 로마카톨릭교의 시작이다. 사도「바울」이「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라고 썼을 때「데마」는 예수의 복음을 떠나 사탄의 세상을 택하였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욕에 빠진 자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사탄은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들어가 그들 사이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마 20.20-24). 마가복음은 이 두 형제가「야고보」와「요한」임을 기록하고 있다(10.35-41). 주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크고자 하는 싸움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늘 무대를 펼쳐왔다.「로마」교회사는 오랜 세기를 두고 많은 지도자들이 왜, 어떻게, 무엇을 분히 여겼는가의 역사이다. 오랜 세기를 두고 종교지도자들의 위대해지려는 명예욕 때문에 그들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강력한 조직과 높은 지위가 요구되었다. 과시병에 걸린 성직자들은 겸손히「그리스도」를 섬기는 대신 자신들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그리스도」의 이름을 악용(惡用)하여왔다.

    사도「바울」에 의해 복음의 씨가「로마」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이름은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네로」의 사자굴에 던져져도 더욱 뻗어져 갔다. 그러한 박해 와중에서도 교회지도자들 사이에서는 크고자 하는 교권 암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로마」는 첫 교회지도자「리누스」(Linus, A.D. 67-76)로부터「실베스터」(A.D. 314-335)에 이르는 동안 31 명의 지도자를 가졌는데, 그중 첫 18명은 아무도 침대에서 죽은 자가 없었으며 모두가 암살, 독살, 길에서 자객에 의해 쓰러졌다. 사탄은 세상 명예, 탐욕에 찬 이러한 교권 지도자들을 다루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콘스탄틴」대제는 종교 통합을 추구해왔고, 이때의 교회 감독「실베스터」는 '로마의 대로(大路)', '로마의 군력', '로마법(法)', '로마의 권력'을 이용, '로마의 평화'(Pax Romana, 무력하의 평화)를 꿈꾸며 기독교 포교를 계획하였다: "로마와 손을 잡고 세력을 펼치리라. 로마의 지배를 따라 뻗어나가면 '예수의 세례'는 저절로 '로마의 길'을 타고 온 땅의 동서남북 끝에까지 흘러갈 것이며, 로마의 감독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로서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명예심과 탐욕심이 많은 동물이며,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는 더욱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탄은 전략전술을 바꾸어「로마」황제「콘스탄틴」을 자신의 수(首)로 택하고, 박해 대신 포용정책을 가지고「로마」교회 지도자「실베스터」와 만나 협상하게 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권력과 교권의 두 지도자는 흥정에 들어갔다. 거룩한(?) 허영심에 불탄「실베스터」는 "그리스도냐? 가이사냐?"의 갈림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땅의 군주의 권력을 택하였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유대」인들이 소리지르던 길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요한」이 기록한 대로 처음부터 거짓에 속한 무리였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19-21).

  「바벨론」종교는「로마」의 천하통일과 더불어 쉽게 고대「로마」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순교와 박해 속에서 강해지고 부유해진「로마」교회는, 당시「로마」의 정치수반이요「바벨론」종교의 대제사장(최고승정원장)의 직책을 겸하여 가졌던「콘스탄틴」대제와 결합함으로써, 사탄이 예수를 유혹할 때 던졌던 약속 -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 을 사탄으로부터 받고 천하 영광을 꿈꾸는 기독교 모조품 종교가 태어난다. 종교통합을 통해「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치하려고 시도해온「콘스탄틴」대제가 받아들인 기도교라는 것은「시몬」화된(化)된 기독교였으며(행 8.20), 이 배도의 신앙은「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온「유럽」을 넘어다 보기 시작하였다.

    사탄은 기독교의 모조품 교회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정치권력과 종교의 결합'은 그날 이후로 로마카톨릭 교회를 특정지어온 단어이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이 결정의 순간을 '회칠당한' 기독교회사는 '기독교의 승리'라고 기록해왔다. 복음의 진수를 알지도 못했던「단테」조차도 그의 신곡(神曲)에서 "슬프다! 그대「콘스탄틴」이여! 너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악(惡)이 세상에 들어왔던고!"라고 썼다.

    A.D. 313년,「밀라노」칙령이 공고된 후,「바벨론」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로마」의 이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이교화되기 시작하였고, 그후 기독교가「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을 때는「로마」종교는 '바벨론의 비밀'의 알을 품기 시작하였다(계 1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