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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신세계정부운동

은사운동의 확산 : 천주교와의 연합

제 3 장

은사운동의 확산 : 천주교와의 연합

 

*  이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출간한 「오순절 표적 부흥의 실체: 펜사콜라, 빈야드, 아주사 신드롬」를 옮긴 것입니다. 성도님의 유익을 위하여 여기에 올린 것이니 무단 복제를 하지 마시기 바라며,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판사와 책 이름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교리 면에서 볼 때, 오순절운동은 교리적 편차가 무한대이며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운동은 통일성을 유지해 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안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운동은 오순절 경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경험들은 초기의 '성령 침례' 혹은 종종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현상으로 한국에서는 입신이라고도 부름. 보다 자세한 것은 부록을 참조하기 바람.)으로 불리는 현상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대개 방언과 함께 생기며, 그 안에는 또한 '황홀경에 빠지는 것', '입신하는 것', '이상을 보는 것', '몸을 구르는 것' 등도 있다. 이로 인한 공통분모는 서로 다른 교리로 인한 차이점들을 모두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신앙 혹은 서로 다른 교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공통성을 띠고 있다.

새로운 이름

오순절주의를 하나의 운동으로 구별시켜 주는 이런 특징들은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200여년전 에드워드 어빙 시대에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반면에 오순절주의 안에서 사용되는 명칭, 계략, 혹은 행동 방법 등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변했다.

먼저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1950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에 대한 반대가 많았으므로, '은사주의'(Charismatic)라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선택되었고, 그것도 '오순절주의'를 쉽게 파급시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성회 감리사였던 짐머맨(Thomas Zimmerman)은 1983년 1월 7일자 「Christianity Today」 잡지에서 "자신이 '은사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기뻐했지만 '전통적 오순절 은사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진부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속임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전통적 오순절주의는 새로우며 색다른 '은사운동'과는 다른 것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런 악의에 찬 속임수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 뒤 전략상의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순절운동은 비(非)오순절 교도들과의 분리 노선을 취해 왔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같은 분리 노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현재 이 운동은 원래의 오순절주의의 본고장을 훨씬 넘어선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심지어 배도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성공회, 루터 교회 등도 오순절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교리는 전혀 바꾸지 않고 말이다. 화해와 일치와 형제 사랑이라는 달콤한 난류가 오순절 바다에서 이곳 저곳 흘러 넘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운동, 천주교에 들어가다

오순절운동의 천주교내로의 침투와 그 안에서의 성장은 1966년에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바티칸에 충성을 다하는 신도들이 오순절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 윌커슨이 저술한 「십자가와 칼날이 튀어나오는 나이프」(The Cross and the Switchblade)라는 책과 쉐릴이 지은 「그들은 다른 방언으로 말한다」(They Speak With Other Tongues)라는 책은 전세계의 카톨릭 그룹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뒤 많은 천주교인들이 오순절 경험을 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천주교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오순절운동의 그 영(靈)을 받아 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여러 달을 기다린 후에 마침내 그들은 단 하나의 대안으로 남은 것을 선택했다. 경험을 갈구하던 신실한 천주교인들은 마침내 천주교회 밖에서 도움을 구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 도움은 결국 전통적 오순절주의자들로부터 나오게 되었고, 오코너 신부는 「오순절운동」이라는 책에서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어떤 사람이 은사 경험이 많은 레이 블라드(Ray Bullard)라는 이름의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곧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 다음주에 그 그룹은 블라드의 집에서 열리는 기도회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 당시 블라드는 순복음 실업인 협회의 싸우스 벤드 지부 회장이었다. 그는 또한 싸우스 벤드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에 속한 갈보리 회막교회의 집사였고 거기에서 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주중 기도회를 인도해 오고 있었다.... 이 기도회는 1967년 3월 13일 월요일 저녁, 신기한 눈초리로 그의 집에 갔던 9명의 천주교인들에게 놀랄 만한 일을 성취하도록 해주었다."

"블라드 자신도 대학교에 다니는 지성인들을 그런 자리에서 만난다는 사실로 인해 어느 정도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으킬지도 모를 반대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몇몇의 유명한 오순절 목사들을 그 지역의 오순절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목사들 중 한 명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말했고, 다른 이가 몇몇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했다. 그 뒤 그곳에 있었던 20여명의 오순절 교도들은 노틀담 그룹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방언으로 기도했고, 순식간에 하나, 둘, 셋, ..., 일곱, 여덟, 노틀담 그룹 사람들도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그 이후로 바티칸의 충성된 교도들간에 수백만의 카톨릭 오순절주의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오순절 경험뿐만 아니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뛰어나므로 쉽게 구별된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타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트렌트 공회에 의해 정의된 중세 천주교는 여전히 그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바티칸 제2공회의 4명의 중재자들 중 하나인 수에넨스 추기경은 그 운동을 "새로운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공통 능력과 종교 일치/통합

이제는 천주교 오순절주의자들이 전통적 오순절주의가 주장하는 능력들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초능력은 행한다. 또한 천주교 오순절주의자들은 오랄 로버츠, 캐트린 쿨만, 렉스 험바드, 에이미 맥퍼슨, 두플레시스 그리고 다른 오순절주의의 수퍼 스타들의 능력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 그들 간에 존재하는 커다란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교파적인 그룹들은 공통적인 연대감과 영적 능력을 공유한다.

다양한 교파와 무리들로 구성된 오순절 교도들 가운데는 놀랄 만한 조화가 존재하고 있다. 순복음 실업인 협회는 극렬한 천주교 사제들을 연사들로 초청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오순절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81년에 있었던 순복음 실업인 협회 세계 회의에서 브라운 신부는 기조연설을 했다.

미국에서 월간으로 나오는 "은사"(카리스마)라는 잡지는 천주교인이 아닌 오순절주의자들을 대변한다. 반면에 천주교 오순절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오순절 잡지는 "새 언약"(New Covenant)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 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

오순절주의가 카톨릭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을 때 바티칸의 에큐메니칼 사역(종교 통합 운동)의 비서로 일했으며 예수회의 회원인 비(Bea) 추기경은 큰 흥미를 갖고 은사운동의 자취를 연구해 보았다. 그는 곧 오순절주의가 종교를 통합하려는 바티칸의 시도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줄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 뒤 순복음 실업인 협회가 오순절적 체험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해 철저한 천주교도들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로 받아들임에 따라 그의 만족도는 더욱 증가하기 시작했다.

상호간의 조화 및 혼합 작전

대규모 스타디움들은 일치를 외치는 소리로 울렁거리게 되었고, 1986년과 1987년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즈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려는 계획들이 틀을 잡아가고 있다. 한편, 에큐메니칼 일치를 부르짖는 책들이 전세계의 여러 교파들에 속한, 열의에 찬 오순절주의자들의 손에 계속해서 쏟아 부어지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바티칸 실권자들과 오순절주의 지도자들 사이에 여러 차례 모임들이 진행되었다. 이 같은 모임에 늘 참석했던 수에넨스 추기경은 1977년 캔자스시티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그와 짐머맨(하나님의 성회), 패터슨(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 버르넷 주교(성공회)는 수많은 대중 앞에 함께 서서 유례없는 일치 쇼를 보여 주었다.(「위력적인 강과 같이」, Like a Mighty River)

1985년 11월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들은 매리랜드 주 게이써스버어그에서 사흘 간의 집회를 가졌으며, 오순절 성결교 회의 부감리사였던 사이난 박사가 그 집회 만찬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 모임의 의장은 캘리포니아주 애나하임에 있는 멜로디랜드 학교의 총장을 지냈고, 지금은 크리스천 방송 네트워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는 윌리암스 박사였다. 그 모임에서 천주교의 호켄 신부는 오순절 연구 협회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카톨릭 수도승인 레클럭 신부와 마틴 신부가 그 모임에서 연설을 했다.

종교 통합 일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은 흔들흔들 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전세계적인 종교연합체에 대한 바티칸의 꿈이 실현될 때, 오순절주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것이 실현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된 것에 대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