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과 운명론에 대하여
개신교는 크게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 양대 신학으로 나뉜다. 칼빈주의의 모태는 플라토니즘적 기독교인인 어거스틴이고 알마니안주의는 펠라기우스이며 후대에 요한 웨슬레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두 신학의 큰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전적인 하나님 주권주의이며 후자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인본주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원론이 서로 상이한데, 전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설인 예정론을 믿어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가 성령님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며 모든 선한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후자는 행위를 강조하기에 구원을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정론을 믿지 않으며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예지적 측면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타락 후,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대해서 서로 상이하다.
아담이 범죄 후에 전자는 전적으로 인간이 부패했다고 주장한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 뜻대로 살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후자는 아담이 타락 후에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하나님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연인이 완전 부패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노력 하에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칼빈주의에서는 오직 선택된 자만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믿는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구원을 받기로 예정이 되어있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정론을 달리 생각하면 숙명론이 될 수 있다며 알마니우스와 펠라기우스가 강하게 문제제기 했었다. 또한 로마교도 알마니안 계열이기에 당시 로마 주교들은 칼빈에게 예정이 되어 있다면 신앙의 열심이 나오겠냐며 문제 제기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칼빈은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즉,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떤 선한 행위를 한다면 얼마나 메마르고 경직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마틴 루터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로마교의 사제로서 구원을 얻기 위해 금식하고 무릎으로 성전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커트라인까지 도달하기를 원했다. 인간의 행위로써의 구원의 커트라인이 어디인가? 답이 없는 것이다.
구원의 커트라인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이 아니고 행위를 주장하게 되면 인간은 마틴 루터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한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선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당시의 로마교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진정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신자는 죄로부터 멀어진다. 아니 성령님께서 죄와 함께 살지 못하도록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예정이 되어 있는지는 인간으로서는 자기 확신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즉,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면 예정된 자이고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방법은 없는 것이고 오직 내적 확신 뿐이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과 위로와 칭찬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느끼는 그 내적 확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신자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며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신다. 예정은 그리스도안에서 비밀에 붙여진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에베소서1:5,9)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한 계획이 있으시고 요셉, 모세와 같이 수많은 훈련으로 연단시키시고 목적을 이루시지만, 성도의 인격을 침해하시거나 강제하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통하여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알 수가 없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하나님 편에서의 거대한 스케줄이고 인류 구속사를 위한 거대한 파노라마인 것이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은 것은 예정론이 숙명론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거대한 산이나 파도와 같은 고난과 시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여 해결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며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의 의지를 기도를 통하여서 변경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동양종교의 운명론이나 숙명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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