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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7영리/구 원 론

[스크랩]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1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출애굽기 33 13)

 

 

     매우 근본적인 한 질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을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구체적이고도 개인적인 것까지를 포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서 전혀 의문이 되지 않던 이 견해가 거부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삶의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 의심없이 받아 들여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주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책의 첫 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이 견해가 과연 참으로 성경적인 입장인지를 입증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분명히 알기를 원한다면, 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십니까 하지 않으십니까?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이 첫 번째 장은 다른 장들과는 달리 조금은 ‘전문적’(technical)일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대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단지 독자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그 분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런 독자분들은 제 2 장 “인도하심의 여섯 단계”로 바로 넘어가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독자들이 이 첫 번째 장의 논의를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 첫 번째 장에서 전개되는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알고 있던 것에 대하여 깊은 확신을 심어주며, 또한 새로이 유행하고 있는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서 경험하게 되는 혼란을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나머지 장들과 다릅니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 또한 인용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이 장을 통해서 언급되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들은 분명하게 비판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과 진지함에 대해서 마저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새로운 견해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견해는 성경적인 제자도에 있어서 매우 해로운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견해’가 개진되다

 

     새로운 견해가 공개적으로 개진된 것은 1980, 두 명의 미국 복음주의자들, 개리 프리젠(Garry Friesen)과 로빈 맥슨(Robin Maxson)이 하나님의 뜻과 자유의지(Decsion Making and the Will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452페이지의 책자를 내어서 전통적인 견해를 도전한 때입니다.*(*Multnomah Press, Portland, Oregon. 한국어로는 아가페출판사에서 장동민의 번역으로 1991년 출판됨). 순식간에, 이 책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책자가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책’을 제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 각자를 위하여 개별적인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해 그 시작부터 일축해 버립니다.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도 똑같은 어조로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한 예로, 복음주의 학자인 아더 존슨(Arthur Johnson)의 책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잘못 인도된 믿음: 신비주의를 폭로함(Faith Misguided: Exposing the Dangers of Mysticism)입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신비주의를 정의하고 폭로하면서 그 신비주의가 어떻게 (특별히 워치만 니의 가르침을 통해서) 복음주의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프리젠과 맥슨의 책을 긍정적으로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견해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중상하였습니다.*(*Moody Press, Chicago).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의견에 반대되는 견해들이 밀물처럼 닥쳐오는 것을 보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 신자들이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뻔뻔한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작용으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을 통째로 부인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프리젠과 맥슨은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세세한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개인적으로 주시는 뜻에 대한 개념”(이태릭체는 필자의 강조)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언급은 그들 스스로가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전통적인 견해는 “모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주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러하신다고 할 뿐입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프리젠과 맥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인도하셨던 수많은 성경의 예들을 거의 모욕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독특한 현상일 뿐이고, 흔하지 않게 산발적으로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고 말해버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은 오늘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우리들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례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 동기와 목적이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을 믿습니다. 그 방법은 변했을런지 몰라도 그 원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프리젠과 맥슨은 잠언 3 5, 6절 같이 성도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구절들을 도외시해 버립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ways)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paths)을 지도하시리라.” 이 구절에 대해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석’은 놀랍게도 협소하고, 솔로몬이 그 단어들, 특별히 진로(ways, 한글성경에 범사로 번역된 ‘범사’라는 말은 ‘모든 일’이란 뜻인데, 이 말은 현재 필자의 입장에서 본 전통적인 견해를 오해하게 하는 입장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진로’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역자주)와 길(paths)을 왜 선택해서 쓰고 있는지 조차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본 장의 말미에서 보여질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프리젠과 맥슨의 주장의 요지는, 크리스챤들이 크든 적든 그들이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자유롭게 어떤 일이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이 성경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해야 하는가? 만약 해야 한다면 누구와 해야 하는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아무런 단서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성도 개개인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하는 이러한 결정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자유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자유의 원리에 대한 고전적인 예”라는 것입니다.

 

     프리젠과 맥슨의 책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오해와 잘못된 생각들을 다루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만, 이 장을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참된 성격과 범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프리젠과 맥슨을 포함해 하나님의 개인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크리스챤들이 자기의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여기신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생의 주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어떤 일에서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

  (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성경의 도덕적이고 일반적인 규칙을 따라서 적절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배우기를 원하신다.

  (4)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의 백성들이 지혜와 책임감을 갖도록 자라며,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떠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가 크리스챤들의 헌신과 열심을 손상시킬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들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우리들은 새로운 자격과 자유를 얻게 되어 우리 인간의 욕망이 바라는 대로 우리를 맡겨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하나님의 뜻보다도 우리 인간의 욕망은 그 결정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이런 욕구들을 합리화시킬 것이고, 우리들의 기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야 할 신자로서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려운 문제나 싫증나는 상황을 피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견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신실한 삶을 사는 일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그 분의 놀라우신 뜻에 복종해야 하는 일로부터 우리들을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프리젠과 맥슨의 책에는 저자 중 한 명이 어떻게 신학교의 교수직을 찾고 결정하였는가를 하나의 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말씀의 사역자에게 해당되기 보다는 세속적인 경력주의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을 버림과 동시에 우리들 속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당신 좋아하는 대로 하라”는 식의 접근입니다(하나님께서 말씀의 사역으로 부르실 때 그 방식은 단지 일반적일 뿐이며 특별한 교회에 대해 부르시고 계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저자들의 믿음을 생각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교회에 얼마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전통적 인도하심의 견해에 비판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견해를 왜곡하며 또한 전통적 견해를 조롱합니다. 전통적인 인도하심을 왜곡하는 그들의 주장은 전통적 견해를 다음의 세 단계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1) 성경을 상고하라, (2)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피라, 그리고 (3) 마음 속에 좋은 기분이 드는가, 가령, 마음이 편한가를 보라. 이렇게 단순화시킨 인도하심을 구하는 단계는 분명한 오해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전통적인 견해는 이것을 훨씬 넘어서 진행됩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하고 제기하는 새로운 견해들의 가장 일반적인 논의는 전통적인 견해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방법은 크든 작든 모든 결정에 있어서 적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은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존슨 박사는 전통적인 신자들이 인생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왜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일, 가령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떤 신발을 먼저 신을 것인가, 아침식사로 오렌지를 벗겨서 먹어야 할 지, 아니면 오렌지 쥬스를 마셔야 할 지 등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습니다”고 합니다. 존슨 박사는 만약 하나님께서 아침식사 메뉴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곧 우리들의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비판적인 사람은 치약에 관해서 똑같은 지적을 합니다. 어떤 회사의 치약, 어떤 향기의 치약을 사야할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시겠느냐고 냉소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 만약 치약을 사는 문제가 우리의 상식과 윤리적인 선택을 따라서 되는 것이라면, 왜 모든 다른 결정들도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다른 일에는 구체적인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어떤 성경구절에 기초해서 우리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비판에 대한 답변은 곧 이어 제시될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분명해 질 것입니다.

 

     전통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또 다른 비판이 있습니다. 만약 신자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충분하게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혹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황의 표지를 잘못해서 스쳐지나가 버리게 되면, 이것은 소위 “하나님의 차선책”이라는 것에 이르게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과는 어울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이런 비판이 타당합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차선적인 행동으로 빠지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떠날 수 없는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하나님의 뜻을 적절하게 찾지 못하게 되면, 그래서 대신 우리의 기분을 따라서 행동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잘못된’ 결과가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가슴이 아프게 되고, 영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며, 징계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에게 참된 복종을 가르쳐 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는 경험을 우리들이 겪게 되는 것이야말로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잘못되었을 때 조차도 우리들은 그 분의 거룩하시며 지혜로우신 뜻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28절을 읽으십시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도하심에 대한 '도로와 노정‘의 원리

 

     이제 우리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중요한 모든 결정을 함에 있어서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몇 개의 성경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출애굽기 33 13절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주님께서는 “내가 친히 가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구절들 속에서 중요한 점은 모세의 모든 여정에 하나님께서 지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여행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 광야에서의 방황이 있을 것입니다. 38년 동안을 방황 가운데서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황이 아무리 혼란 속에서 지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정확한 일정을 계시해 달라든가, 모든 가사문제와 매일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한 인도하심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여쭈었던 것은, 그들의 여행과 노정, 그리고 목적지에 대한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크리스챤들이 매일의 식사 메뉴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경력과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이 위대한 본문들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의 여행에 관련된, 곧 그 인생의 길과 노정에 대한 모든 일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가르침받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 13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요 교훈은, (way)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는 이것을 아주 문자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길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는 우리가 밟고 다니는 도로를 의미합니다(그것은 ‘밟다’는 동사에서 나오는 명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방식(way)에 대하여 보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지명하신 길이나 노정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경험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크리스챤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의 한 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 합당합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 1-12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분명하게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행은 특별히 복음시대의 신자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로나 노정은 현재의 신자들의 인생여행을 반영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일들과 인생의 여정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인생의 방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영적인 소명과 영적인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입하는 차의 회사명은 인생의 진행과정과 관계되어 있지 않습니다(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중요할 때도 있겠고,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어디서 어떤 차를 찾아야 할 것인지 물론 대답해주실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비싼 고급제품을 사는 것처럼, 차를 사는 것은 성경의 규칙에 종속됩니다. 탐욕과 불필요한 사치품, 낭비들은 피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이 인생의 여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배우자는 인생의 전체 여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살기로 결정하느냐하는 문제는 인생의 여정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를 선택하느냐도 그렇습니다.

 

     또 다른 증거 구절인 시편 25 4절을 보면, 다윗은 여행에 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에 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용어를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말하면서 비유적으로 사용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ways, 문자적으로 ‘밟고 다니는 길’)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paths, 문자적으로 ‘잘 닦여 지는 길, 노정’)을 내게 가르치소서.” 모세가 사용했던 그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27 11절에서 다윗은 다시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way)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path)로 인도하소서.” 도로(roads)와 노정(routes)에 관한 용어들은 틀림없이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시편 32 8-9절에서는 길(way)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말과 노새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 위에 타는 사람이나 모는 사람에 의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도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의 갈 길(way)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아마도 밧세바 사건과 관계된 것을 포함해서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시편51편에서와 같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이나 노새처럼 완고하거나 고집부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이 다윗의 행동에 대해서만 언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윗이 도덕적인 표준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인생의 주요한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그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주요한 일들이란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의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쟁을 아무렇게나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그것들이 일생토록 미치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밧세바 사건은 그의 비도덕인 추문이 문제였고, 자신 스스로 한 결정에 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주요한 인생의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우리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말이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지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 분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그 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가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하여 우리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그것이 아무리 지혜로운 것이라 하더라도)을 이 본문에서는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약속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명령과 경고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7 5절에서 다윗은 우리들이 애송하는 구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너의 길(밟고 다니는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이 시편은 특별히 신자와 불신자의 삶의 스타일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길’(way)이란 말이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이라는 주제가 이 시편에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에(의인을 위한 미래의 보상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의도되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인생의 방향과 노선이나 그 주요한 방법 결정들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 48 14절은 또 다른 중요한 용어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까?(원문상으로는 우리 한글처럼 동사로 되어 있지 않고 명사로 되어 있음: 역자주). 이 단어의 히브리어 어근은 동물이나 마차를 몬다고 할 때의 ‘몬다’(drive)는 말입니다. 여기 나오는 인도자는 비행기의 파일럿이나 배의 조타수를 말합니다. 그들이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 구절의 맥락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그 분께서 평생토록 우리의 행사를 결정하실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의 도덕적인 표준에다만 제한시키는 것은(프리젠과 맥슨이 하는 것처럼),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들을 최소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크리스챤들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에 당신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묘사하려고 한 그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그림은 동물들(이나 마차가)이 그 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또한 가는 방향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인도자로서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3 5-6절에 나타나는 유사한 단어들도 도로와 노정같이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용어들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솔로몬이 말합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도하시리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격렬하게 논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요사건들을 지도하신다’라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그 히브리어가 곧바르게 하다, 혹은 부드럽게 하다는 뜻을 가졌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해석해놓고는 주장하기를, 이 본문은 단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약속해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로와 노정’의 그림이 ‘당신의 인생에서 만나는 일’을 대략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당신의 백성들의 주요 인생사에 대하여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 ‘집행자’로서의 하나님, 감독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특성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잠언 3 5-6절이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인생의 길들을 곧바르게 하신다는 점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곧게 하시고 부드럽게 하시는 것은 그 분이시지 우리들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최고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을 잊게 된다면, 우리들의 노정은 꼬이게 되고, 의미 없어지고 좌절해 버릴 것입니다. 그 인생의 여정은 아무 열매도 없고 비생산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의지와 자기결정을 포기하고 그 분의 규범을 구하면, 우리의 인생길을 질서있게 하셔서 우리의 여정은 곧바르고 의미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3 5-6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인생의 노정과 성격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되었습니다. 주요 결정들에 있어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그 분의 주권적인 뜻이십니다.

 

     이사야 58 11절은 새로운 견해의 저자들이 현재 논쟁하고 있는, 또 다른 증거 구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이 구절의 앞 뒤 문장(6-12)은 조건절입니다. 만약에 신자들이 고통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푼다면(영적으로 아직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풍성한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인도하심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 약속은 우리가 동정심이 있고, 선할 때에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뜻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시켜 버립니다.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요소를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인도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문자 그대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전쟁에서 이긴 왕이 포로들을 잡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자 잡혀 갈 때에 그 노정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포로들이 아닌 정복자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지배하다, 지시하다, 억제하다 혹은 제한시키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집행’의 뜻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영광스럽고 지혜로우시며 친절하고 완전하신 뜻을 따라 신자들의 인생을 통치하시고 감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인생의 사소한 일에서가 아닌 주요한 결정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이루어가시는 일과 우리들이 취해야 하는 일들 사이를 분별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비아냥거림은 성경에 나오는 ‘도로와 노정’에 관한 용어들을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인도하심에 대한 구절들

 

신약성경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6 25절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보면, 마치 인생의 방향같은 주요한 일들과 덜 중요한 일상사 사이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구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25-34)의 목적은, 불신자들과 신자들에게 삶의 우선권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맨 처음에 모시고, 영적인 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나 의복, 혹은 내일 일어날 가사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 보다 더 염려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구분이 있습니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 각각의 다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신자로서의 책임감있는 크리스챤들이 되어 살기를 원하시지, 인생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일들에 대하여 안달하면서 지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일상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양심적으로 그리고 경건하게 결정하도록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갖고 계신 기준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의 규범들이 어디에서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탐욕치 말라, 교만하지 말라, 소비하지 말라, 세속적이지 말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 그리고 인생의 여정에 관한 일들은 전적으로 다른 수준에 속한 것들입니다. 가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장기간에 걸쳐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들입니다. 다른 본문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대로 우리는 이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통치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 2, 3절은 안디옥 교회에서 첫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님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믿는 우리들을 위해서 기록된 이 사건은, 선교사직에 봉사하게 될 사람들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이런 소명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도하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나바와 사울의 소명은 ‘한 번만 있었던 특별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 파송되는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셔야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소명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뜻의 계시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전달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들은, 우리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개인적인 소명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의 지혜를 따라서만 선교사로 가장 적절한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선교사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이 새로운 ‘합리주의적’ 접근은 바울이 다른 선교적인 여러 사역에 있어서 특별한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면서 계속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2 차 선교여행을 제안했을 때(사도행전 15 36), 바나바와 헤어지기로 결정했을 때, 혹은 실라를 동료사역자로 결정했을 때(사도행전 15 39-40)와 같은 경우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결정들에 대하여 바울은 성숙하고 지혜로운 크리스챤으로서 혼자서 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디모데가 선택된 것은, 부분적으로 그가 바울에게 인상적이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리젠과 맥슨은 주장합니다: “다시금,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소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자질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저자들은 디모데전서 4 14절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4 14절에는 디모데의 은사와 그 은사가 사용된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나타난 것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그들의 많은 논증들은 반박되고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전통적인 인도하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시된 얼토당토 않는 주장들을 모두 언급하고 또한 반박하는 것은 짜증나고도 시간만 소비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했던 몇몇 구절들은 그들의 주장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성경구절들에 대해서 이들은 마음대로 추측하면서 바울이 정말로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사실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 의하면, 바울은 자신의 활동이나  ‘일군’의 선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직 상식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이들은, 성경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위해서 이런 결정들을 해주셨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한 번만 있었던 특별한 사건’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려 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속의 사건들을 인간화, 합리화, 축소화시키는 경향을 반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 2절로 돌아와서, 여기서 우리들은 모든 시대를 위한 교회생활의 선례를 봅니다. 교회의 직분자를 임명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뜻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선교사의 파송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파송될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줄로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들이 자신 앞에 놓여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줄로 확신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 사역을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도와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 분의 개인적인 위임을 실행했습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바울의 말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그는 설교자로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디모데전서 1 12)라고 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직분을 맡은 것이 아니라 직분이 맡겨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말을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디모데후서 1 11). 참된 사역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엄청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 14). 디모데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동료 신자로부터가 아니라 추수의 주인되시는 분으로부터 말입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성령님께서 계속적으로 감독하신 사역의 기록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장은 바울과 실라로 하여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줄을 알았습니다. 결정을 해야되는 매 단계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위한 교훈이 아닙니까? 새로운 견해의 교사들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바울의 행동이 우리들을 위하여 보여준 권위있는 예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글들이 영감을 받았고, 그의 행동은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여러 본문들이 그의 행동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들을 조직한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에 대한 영적인 접근방식에 대해서도 말입니다(고린도전서 4 16; 11 1-2; 빌립보서317; 데살로니가전서 1 6; 데살로니후서 3 9). 사도행전의 메시지는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실상 “인생의 중대사에, 그리고 영적인 봉사생활에 주님의 인도하심에 너 자신을 맡기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이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인도하심에 복종하려고 했던 바울의 관심에 대하여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바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곳에 있을려고 하였던 예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가르칩니다. 사도행전 18 21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며 작별인사하는 것을 봅니다.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상식을 좇아서 자신의 일들을 결정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의도했던 바가 하나님에 의해서 파기되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바울이 의도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구절을 읽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돌아오기를 지도하신다면,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시고 구체적인 뜻은 이와 같이 크리스챤의 중요한 사역에 매우 중요합니다.

 

     직분자들을 뽑는 문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다시 한 번, 우리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필요를 봅니다. 사도행전 20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성령님께서 감독자들을 임명하셨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입니다. 그것은 그 분의 뜻이였지, 인간의 분별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중대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요구된다는 또 다른 증거가 고린도후서 6 14-18절에서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우상을 멀리하고 모든 형태의 종교혼합주의를 삼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18절의 놀라운 약속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내가)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동양의 아버지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해하는데 빛을 던져줍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현대 서양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아버지로서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 분의 아버지되심은 고대 동양의 아버지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여정의 방향에 대하여 특별하고 구체적인 뜻을 가지고 계신 지 아닌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성경시대의 육신의 아버지는 높은 권위를 가지고 한 가정을 다스렸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모든 중대사들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있는 자기 자신의 자녀에 대해 보여주시는 인도하심입니다. 그 분께서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동양에서 아이들이 양들을 먹이기 위해 들로 나갔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의 할 일을 합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이나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 일일이 아버지의 결정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인이 되어 숙련한 농부가 되고, 장삿꾼, 염색하는 사람, 다른 기술을 가진 사람 등이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에 그들은 독립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인생의 일들, 그들이 어디에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직종의 일들을 배우게 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가장이 되는 아버지와 의논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늘의 아버지와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선택이 책망 받고, 복종이 칭찬받다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기의 일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새로운 견해가 야고보서 4 13-15절에서 강하게 책망받고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집을 멀리 떠나 여행을 다니면서 사업을 하는데, 그 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일 뿐만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순간적으로 결정을 해 버리기도 합니다. 일년이라면 긴 기간입니다. 분명히 교회생활과 봉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이런 사업상의 장기체류는 조심스럽고 충분히 기도해야 할 중대사안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강렬히 소망하여야 합니다.

 

     이런 사업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일반적인 존경심이 부족하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들의 계획의 끝부분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이란 형식적인 절차의 말을 보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프리젠과 맥슨은 이 구절을 그렇게 축소시킵니다). 앞의 야고보의 말씀이, 신자들의 삶의 중대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감독하심을 구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말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확신을 가지고 하는 자기결정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 16-17).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여정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은 그 분의 뜻하심과 다스리심을 존중하기 위하여 인도하심을 받는 규칙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언제나 그 분께서 우리들을 어디로 인도하실 지에 대하여 미리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과 그분의 인도하심에 우리 인생을 맡긴다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의 통치하시는 손길이 우리들의 상황과 형편들을 이루어가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살펴보고자 하는 마지막 구절은 베드로전서 5 6, 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때때로 염려<care>라는 말은 걱정<anxiety>이란 단어로 번역됩니다. 헬라어원어로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다, 나누다, 다르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상충하는 생각들이 서로 우세해지려고 하는, 어떤 사람이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는 일종의 염려와 걱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번역자는 이런 요소의 의미를 가지고 “너의 모든 분산된 생각들을 그 분에게 맡겨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 뒤에는 욕구와 관심이 혼동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똑같은 헬라어가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씨가 가시나무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이 ‘이 세상의 염려’로 방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가운데서 하나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부와 번영의 유혹이, 그리고 다른 면에서는 복음에 대한 복종이 마음을 끕니다. ‘이 세상의 염려’는 세상의 염려거리들<worries>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분산케 하는 것<distractions>을 말합니다.

 

     바울은 똑같은 단어를 고린도후서 11 28절에서 사용합니다. 자신의 시험당함과 고생한 것을 나열하면서 특별히 당하는 눌림을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보살피는 일이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산케 한다<distractions>는 의미로서의 염려<care>입니다. 매일 그의 마음은 시험들과 교회의 문제들로 인해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이끌렸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의 염려라는 말은 분명히 여러 다른 방향으로 찢겨지고 있는 요소를 나타냅니다. 나뉘어지고, 혼동되며, 불확정된 마음을 언급합니다. 이 맥락에서 베드로의 약속은 특별히 인생의 중대사의 결정과 연관됩니다. 이런 결정에 있어서 우리들의 모든 흩어진 마음들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우리들을 돌봐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기도하면서 말씀의 규범을 따라서 그 문제들을 살펴보고 따져보아야 할 의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결정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특별하신 뜻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큰 확신을 가져다 주는 가르침입니까! 이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때마다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구하게 되면 헛된 시간의 낭비도,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을 겸손케 만듭니다. 또한 우리를 감동시켜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도록 해 줍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은 신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킵니다.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자격이 순식간에 하나의 규칙이 되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머리되심이 무시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복종시키려 하지 않는 크리스챤들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에 돈을 벌고 편안해지려는 유혹은 언제나 널려 있습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신자들로부터 이러한 유혹을 막아주는 것들을 쳐부수고는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상식적이고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세요.”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유혹을 받게 되면, 많은 일들이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부도덕한 일이라거나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유혹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편한 대로 어느 정도의 편안함, 풍요로움, 레져, 휴가, 자기봉사 등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견해는 우리들을 우리 자신의 독재, 주님이 빠져버린 ‘대안’ 에다가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적인 복종을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어리석은 짓거리로 축소시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참된 경건을 향한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우리들은 만왕의 왕되신 분께 자원하므로 기뻐하는 신복들이고 또한 언제나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놀라운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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