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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

 

이광호 목사

 

[종교개혁자들과 개혁]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기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자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아가 후세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념행사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사 가운데 보면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한다거나 기념하자고 외치는 소리 따위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길지 않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도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시대 복음을 허물어 가는 일본 사람들과 맞서 싸웠으며 교회 가운데 비진리를 퍼뜨리는 무리들과 싸웠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거 진리를 위해 싸웠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올곧은 신앙정신과 신앙적 행동은 버리고 그들의 이름을 빗댄 기념행사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욕이다. 훌륭한 선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념행사를 함으로써 전혀 그렇지도 않은 자신들을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 세워 두려고 하는 노력은 비신앙적 행위일 따름이다.

 

 

[총도 칼도 없는 시대]

 

과거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총과 칼 앞에서도 분연히 맞섰다. 진리수호를 위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못된 세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총칼을 가진 자들의 협박은 그들을 괴로움에 빠트렸으며 그들의 회유에 따르면 세상의 평안과 영예를 누릴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에는 진리를 따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한 믿음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가 그랬으며, 세례요한, 스데반, 바울, 베드로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진리 안에 살면서 외부의 잘못된 사상과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진리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이 얻은 것은 생명의 박탈과 감옥, 그리고 고통이었다. 또한,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더욱 빈번하게 그 이름을 들먹이는 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 루터, 칼빈 등 신앙의 선배들 역시 복음을 위해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은 분들이다. 한국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의 몸을 감옥에 내어 던졌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우리를 겨누고 있는 총과 칼이 없는 시대이다.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사악한 교권에 맞선다고 해도 총칼로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지 않다. 진리의 편에 섰다가 혹 듣기 싫은 욕을 듣거나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를 상실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교권주의자들 앞에서 자기의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달콤한 타협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 할 수 없다. 진리를 떠난 세속주의자들과 양손을 맞잡은 채 입으로만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해마다 있는 종교개혁 행사장들을 돌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한국교회의 부패]

 

한국교회의 부패상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로지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자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고백이다. 오날 밤에 주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소망을 두며,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는 한마디에 우리의 모든 염원과 고백이 담겨있다. 우리는 '코람데오'(Coram Deo)를 삶의 모토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에게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고 그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지만 삶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일 수 밖에 없다.

 

겉으로는 코람데오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은 교회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있어왔다.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의 자기 목적이 강하게 되면 그것이 정치화 하게 되고 곧 부패로 이어진다. 나아가 윤리적 부패는 신학적 위기를 불러 일으키게 되며 거기에는 곧 교회의 본질을 버리게 되는 파멸을 몰고 올 위험이 따르게 된다.

 

불법선거를 하면서도 거리낌은 커녕 감투를 쓰게 되면 그것이 곧 명예라고 생각하는 교계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심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런 자들에게는 참된 신학 따위는 안중에 없다. 아무리 잘못된 신학이라도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면 즉시 타협하여 한 편에 서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이든 세속주의 신학이든 신비주의 신학이든 문제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 참된 신학에 대한 눈이 멀게 되어 엉뚱한 오판을 서슴지 않는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잘못되고 위험한 신학 등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참다운 신학적 맥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계산이 맞지 않으면 망설임 없이 교권의 칼을 휘두르게 된다.

 

우리는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징계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이 엄중한 징계를 받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교단의 교육을 맡은 대학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목사 교수가 공금을 횡령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도 해당노회에서는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는다. 대학의 최고 책임자인 목사가 공문서를 변조하는 범죄를 저질러도 노회나 총회에서 그를 징계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총회의 임원에 입후보한 자들이 돈봉투에 향응을 제공하는 불법을 저질러도 그들을 징계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목사가 술집을 다니면서 음주를 하고 교회의 재정을 불법적으로 유용했다고 해도 그들에게 최소한의 징계를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연구해야 할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적 범주 안에서 논의되어야 할 입장을 밝혔다 해서 제명 출교하는 일이 빈번해도 그에 대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명백한 불법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징계도 하지 않고, 징계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제명출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바라볼 때는 침묵하던 그 동일한 입술로 개혁을 부르짖는다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을 즐기는 사람들]

 

해마다 10월 말이 되면 종교개혁일이 있음으로 인해 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에서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하며 유명인사들을 불러와 종교개혁 기념 강연을 듣는다. 사실 종교개혁 기념일이 있는 10월 말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정치적 공한기이다.

 

한국교회의 부패상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대개의 부패는 노회와 총회를 앞두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봄노회와 가을노회, 그리고 가을에 있는 정기총회를 전후해 불법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치리회를 통해 논의되고 결정되어야 할 일들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사전에 조율하는 것을 정치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노회와 총회에서 불법 타락이 있다는 것은 정치적 편이 이루어진다는 말과 통한다. 그런 잘못된 과정을 통해 노회와 총회의 임원진이 구성되게 되면 말씀의 원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모든 회원들이 진리 가운데서 기도와 말씀의 원리를 좇아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몇몇 사람들의 정치력을 통해 마무리 지으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보아온 것은, 교회내의 비리나 잘못된 행태들에 대한 개혁의 의지가 전혀 없던 사람들이 10월 말이 되면 갑작스레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정치에 있어서 10월말이 정치적 공한기라는 점은 종교개혁 기념일과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때는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부정선거를 논의할 필요도 없고 파당적 정치를 활발하게 전개할 이유도 별로 있지 않다. 일년동안의 그런 불법적 행태들은 이미 그 전에 다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적 공백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 편하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안타깝. 우리는 일년 한 차례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통해 신앙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매 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교훈 보다 신앙의 선배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통해 감명을 받는다면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을 즐기고자 하는 소영웅주의 이상 아니다.

 

몇 가지 실례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는 기독교 윤리실천이나 경제정의 실현 등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다. 그들이 세속의 부정이나 비리에 대한 방지를 위해 활약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맞서야할 기독교 내부의 부정이나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 내부의 경제비리나 비윤리, 부정선거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다. 기독교 내부 비리에 대한 조직적 캠페인 같은 것은 거의 있지 않다. 기독교의 후원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기독교의 부정이나 비리를 말하게 되면 후원이 줄어들까 염려하는 것인가. 만일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 윤리나 기독교 정의 실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지난 봄 지방선거를 앞두고 SFC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많은 돈을 들여 책자를 발간하고 전국 대도시들을 돌며 집회를 열었다. 기독교가 부정 선거 척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정작 교단 안의 그보다 더한 부정선거를 보면서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속 정부의 부정선거에 대해 분노를 머금던 학생들이나 그 지도자들은 교회 내부의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적 자세도 보이지 않았다. 자칫 그렇게 대응했다가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교권의 힘이 두려웠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속 정치의 목적은 권력쟁취에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선거는 성령 하나님의 간섭 아래 진정한 봉사자를 찾는 일이다. 거룩해야 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정에 대해 침묵하면서 세속 정치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캠페인을 벌인다면 무언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기념이 아니라 개혁에 참여를]

 

이렇게 되풀이 될 바엔 더 이상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뒤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별 악한 짓을 다하고도 10월 말이 되면 어김없이 종교개혁 기념 행사를 거대하게 치룬다면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칠 수 있다. 진정한 반성이나 삶의 실천없이 해마다 되풀이 하는 기념행사는 도리어 사람들의 마음을 무디게 할 것이며 진정한 개혁의 걸림돌이 될 따름이다. 개혁의 의사도 없고 개혁에 참여도 하지 않으면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자기를 감추기 위한 비신앙적 알량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개혁 기념행사가 아니다. 허물어져 가는 주님의 교회를 말씀의 터위에 바르게 세우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유는 보편교회를 염두에 두어 그들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목적은 과거의 개혁자들을 기념하여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열장 속에 들어있는 해묵은 「종교개혁」을 매년 한차례씩 꺼내어 그것을 앞세워 기념행사를 하는 행위 따위는 이제는 정말 그만 두었으면 한다. 설사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교회의 회복을 위한 진정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 기독 대학생이라면 기독교의 부패에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부정과 비리 가운데 허물어져 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내일의 한국교회를 위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고신대신문, 200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