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부록1)
언약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약속,계약,언약 등과 그 관련어들
언약신학을 다루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을 잘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먼저, 1)“언약”(言約)이라는 용어들부터 살펴보면서 이 질문의 의미를 살펴보자. “언약”(言約)이라는 한글은 말씀 言, 맺을(묶을) 約이다. ‘말(씀으)로 맺어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 “언약”(言約)이라는 말은, “약속”(約束)이라는 말에 ‘말’(言)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가(“言約束”), “束”이라는 말을 탈락시킨 형태의 말이다. 2) “약속”(約束)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동아출판사, 새국어사전)인데, 이것에 “말”(말하여지거나 쓰여진, spoken or written)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 “언약”이다. 결국 한글에 있어서, “언약”이란 “약속”이다. 3) 이런 맥락에서 함께 살펴보아야 할 말이 바로 “계약”(契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서약 契, 맺을(혹은 묶을) 約이 합해진 말인데, 여기서 契라는 말은, 풀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丯)에 칼(刀)이 놓여져 있는데, 큰 大자가 그 아래에 놓여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자면, 풀잎을 칼로 크게 자르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契約”이라는 말은, “풀잎을 칼로 크게 잘라서 묶어 놓는 것”이란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약”(約)이란 개념이다. 이 “約”이란 말은, 실 絲와 구기 勺(작, 혹은 약으로 발음함)의 합성어이다. 실로 어떤 국자 같은 구기를 묶은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달이 허리춤에 국자를 달랑달랑 매고 다니는 모습을 연상해 보라. 그렇게 실로 달려있는 국자의 모습이 “약”이고, 그렇게 묶여 있는(束, binding) 상태에 놓여있게 하는 것이 바로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서로가 묶여 있는 상태이다. “約속”, “언約”, “계約”이라는 말 모두가 그 각각의 상대방들이 서로 묶여 있는 상호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용어들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례들은 어떠한가?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생활대화에서 사용되는 것이 “약속”이다.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지,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언약했다”거나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계약했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계약”이라는 말은, 무언가 법정적이고 법률적인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집매매계약문서, 사회계약론 등과 같은 용례가 그것이다. 단순한 일상생활의 “약속”이 아니라, 그 약속을 법률적으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공식화시키는 것이 “계약”이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말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언약”이란 말은, 기독교적 용어이다. 성경에서 개진되고 있는 “약속”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성경 자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베리트”(구약성경에서 사용)와 “디아세케”(신약성경에서 사용)]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용어인 셈이다.
그렇다면, “베리트”라는 말과 “디아세케”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일까? 그것을 물어보기 전에, 우리는, “약속”, “계약”, “언약”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언약”은 “covenant”, “약속”은 “promise”라는 말로, “계약”이라는 말은, “contract”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1) promise라는 말은, pro와 mise의 합성어이다. Pro는 “앞으로”라는 뜻이고, mise(mittere라는 라틴어의 변형)라는 말은, mission(파송, 선교)이라는 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낸다”(send)라는 뜻이다. 곧, promise라는 말은, “앞으로 내어 보낸다”는 뜻이다. 곧, “미리 앞서서 내어 보내는 그 무엇”이 promise라는 것이다. 이 말은 상호적인 의미보다는, 미래적이며 선행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 “계약”으로 일반적으로 번역되고 있는 contract라는 말은, con(함께)+trahere(끌어내다, draw)에서 온 말이다. “함께 끌어내온 그 무엇”을 의미한다. 곧 상호협정(mutual agreement)을 의미한다. “언약”이라는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Covenant라는 영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3) Covenant라는 말은 이전에는 convenant라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 어원이 convene(소집하다, 회집하다)는 뜻에서 온 것임을 보여준다. 이 convene이라는 말은, con(함께)+venire(오다, come)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함께 와서 회의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곧, covenant라는 말이 상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결국, 동의나 합의(agreement)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 말이다.
실제로, 이런 한글이나 영어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약속”, “계약”, “언약”, promise, contrace, covenant라는 말들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베리트”(구약에서), “디아세케”(신약에서)라는 말의 어떤 면(곧, 상호적인 동의의 면)만을 말하고 있을 뿐, 그 용어(“베리트”와 “디아세케”)의 의미의 진짜 핵심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이 “베리트”와 “디아세케”라는 말은, 당사자들간의 상호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의미는, 당사자들 중의 어느 한 쪽의 주권적이고 우선적인 주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1) “디아세케”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자. “디아세케”라는 말은 명사인데, 그 동사형태는 “디아티세스싸이”이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처분하다(혹은 배열하다)”(to dispose for one’s self)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dispose라는 말은, “처분하다”는 뜻도 되고, “배열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Dis(떼어낸, apart, asunder, or seperately의 의미를 가짐) + poser(장소, place)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떼어내어서 장소를 정리하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떼어내어서 장소를 정리하는 것”에서 “처분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배열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진화되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렇게 별로 어렵지 않다[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 dispose의 명사형인, disposition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마음의 배열”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서 결국 “기질”, “성향”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회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의 변화라는 것이 “어떤” 변화인지를 추측하게 해 주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이 문제는 이 글의 본시리즈에서 좀 더 깊이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문제는, “자신을 위하여 처분하다”는 의미를 가진 “디아티세스싸이”라는 말이 두 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발전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상호결속력을 가지고 있는 법을 체결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의미로는 죽음을 예상하고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의미, 곧 유언이나 상속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전자(곧, 상호결속력의 법체결)의 의미는, “협정체결”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의 pactum(이 단어는 영어의 compact) 혹은 foedus [이 단어는 영어의 federal이라는 말로 발전하게 되고, 이 말에서 “federal” theology(“연방”신학)이라는 말이 형성된다]를 가지는 말로 발전하며, 두번째 의미(곧, 유언상속)는 “유산” 혹은 “유언”이라는 뜻과 연관된, 라틴어의 testamentum>영어의 testament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서 발전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단어의 공통의 뿌리가, “처분하다”(dispose)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협정”이든, “유언”이든, 그 협정의 어느 한쪽 편이나, 유언을 하는 사람의 주권적이며 주도적인 성격을 암시적으로 전제한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 성경의 “디아세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 “Bible”, “Scriptures”, “testament”라는 말의 유래들도 짚고 넘어가자. 잘 아는 것처럼, Bible이라는 말은, papyrus(파피루스, 그 위에 글을 쓸 수 있도록 갈대잎을 얇게 펼쳐서 서로 엮어놓은 것)는 말을 그리스 사람들이 번역한 biblos나 bublos에서 온 말이다. 이것에 반해서, scripture라는 말은, “쓰다”(write)는 뜻을 가진 라틴어 scrite에서 온 말이다.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는, Bible이라고 하지, 복수형태의 Bibles라고 쓰지 않는 반면, Scriptures는 66권 성경의 각권을 염두에 두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Scripture라고 단수형태로 쓰는 경우는, 66권의 성경 중의 어느 한 권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Scriptures라는 복수형태는, 66권의 각권을 염두에 둔 표현인 셈이다. 이것에 비해서, Bible이라는 말은, 성경66권의 각 권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성경 66권을 전체적으로 염두하면서 사용하는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testament라는 말을 사용해서, 성경의 두 부분인, “구약”과 “신약”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testament는 “유언”의 의미인데, 과연 성경의 “구약”과 “신약”이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문은, 성경의 “디아세케”라는 말이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진 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9:16 등에서 사용된 예가 “디아세케”가 “유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많은 부분(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기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에서 “디아세케”는 “유언”이라는 의미로는 번역할 수 없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이 히브리서9:16에서의 “디아세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상하면서 한 약속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유언”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디아세케”라는 말은, “유언”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상황을 전제한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 그 분의 “유언”으로서 이 “디아세케”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디아세케”를 “하나님의 유언”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죽으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디아세케는 “유언” 그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베리트”와 “디아세케”를 강조하는 표현인, “구약”(Old 베리트), “신약”(New 디아세케)라는 말들을, 각각 Old Testament나 New Testament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치가 못하다. 영어사용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글번역어인, “성經”과 “성書”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성경”이라는 말은 보수적 진영에서, “성서”라는 말은 진보적인 진영에서 선호하는 말들이다. “성서”라는 말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사서삼경”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을 고려해서, “삼경”이라는 말보다도 “사서”라는 말이 앞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말보다는 “성서”라는 말이 더욱 우선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성급하다고 하는 것은, “사서삼경”이라는 어휘가 정착된 싯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삼經사書”가 아니고, “사書삼經”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삼경”이 중요한가? “사서”가 더 중요한가? 어느 쪽을 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서 그 어느 쪽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질문들은, 중국고대사상사에 대해서 좀 더 차분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단지, “삼경”(시경, 서경, 역경)이 “사서”(논어,대학,중용,맹자) 보다도 역사적으로 “더욱”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사서”는 공자나 공자의 제자들의 어록들이라고 한다면, “삼경”은 공자시대 훨씬 이전에부터 전승되어온 것을 공자가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다. 그러니, “사서”를 “삼경”의 빛에서 읽느냐, “삼경”을 “사서”의 빛에서 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해석의 관점을 설정하는 것이며, 또한, “삼경” 자체에 대한 해석도 공자의 편집에 공자 자신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공자가 수집, 편집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이 “사서삼경”의 해석에는 해석학적 관찰이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사서삼경”의 “사서”라는 말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서”가 더욱 존중되는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이 나의 요지이다. 오히려 “사서”라는 용어나 개념의 성립이나 기원에 대한 해석학적, 혹은 지식사회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만 지적해 놓자.
일반적인 측면에서, '經'이라는 글자가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은 금문(金文 : 西周時代 靑銅器인 鍾鼎)에서부터이다. 이 때의 '經'자는 '다스린다'(治)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허신의 『설문해자』에 의하면, '經'자는 '직조에서 세로 실'(織, 從絲也)이라는 뜻이다. 곧, 사실상 날실(經)과 씨실(緯)은 서로 결합하여 온전한 베로 짜여지는 것이며 서로 보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를 짜는데서 날실은 고정되어 있고 씨실은 왕복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날실(經)이 기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곧 “經”이라는 말은 “기준”(canon)이라는 의미를 가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경”이 “사서”보다도 더욱 이전에 기록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고대의 것이 더욱 권위가 있다고 여겼던 태도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관찰이다. 이것에 비해서, “書”라는 말은, “대학”이라는 책이 주자에 의해서 “논어”, “중용”, “맹자”와 더불어서 송나라때 쯤(대략 AD 12C전후)에 “사서”로서 등재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유학에서의 그 권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가 후대에 성립된 것임을 고려할 때, “경”보다는 “권위가 덜한” 것임을 비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경전으로서의 Bible이나 Scripture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푸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보인다].
2) 구약성경의 “베리트”라는 말은, “비루트”(착꼬, 족쇄)는 말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대근동의 언약을 맺는 의식의 관습에서 그 언약의 표증으로서 동물을 죽여서 두 쪽으로 갈라놓는 것과 관련해서 “자르다”는 뜻의 “바라”에서 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라’라는 말에는, ‘자르다’라는 뜻만 아니라, ‘먹는다’는 의미도 있다.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그 언약의 증표로서 동물을 잘라서 함께 먹었던 관습과 연결되는 셈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언약을 맺는다는 말을 ‘언약을 자르다’(카라트 베리트, cut the covenant, 예: 창21:32)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맥락이다. 성경의 베리트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관계를 상호적으로 설정한다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관계를 공식화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둠브렐, 언약과 창조,최우성역,26쪽).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려고 한다. 이 “베리트”라는 용어는, 그 베리트로 말미암아 어떤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이전에 있던 관계를 전제하면서 그 관계를 공식화하고 구체화시킨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구체화하는 절차가, 동물을 잘라서 함께 먹는 것이다. 공식화되고 구체화되는 그 관계가 비록 상호적인 것이 되는 경우에라도, 그 상호적인 관계가 수립되기 이전에 이미 어떤 관계가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잘랐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관계가 수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관계의 수립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미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그 이전의 관계를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창17장에서 아브라함과 베리트를 맺으시는 것은, 창15장, 거슬러 올라가서 창12장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에 기초한다. 아브라함 이전의 아담이나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모세나 다윗 등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베리트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맺게(자르게) 되는 베리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상호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조차도 이전에 이미 어떤 관계가 전제되어있었던 것을 상호적인 것으로 공식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것이 베리트이고 디아세케인 것이다.
왜 이런 용어들을 일일이 살펴보려고 하는가? 앞서 적은 두 번의 글에서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나를 상기해 보라. 언약이 자연법칙과 생의 법칙으로서의 관계이며, 그런 모든 관계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설정한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언약’이란 말, ‘약속’, “계약”이라는 말 속에서, covenant와 promise라는 말 속에, contract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설정하신 법칙들로서의 관계를 전제하는 그 무엇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인가? 그렇다고 해서, 꼭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 있는가? 언약의 문제를 논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언약의 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들의 정리를 통해서,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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