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3)
언약신학에 언약이 없다(II)
언약의 핵심은 “관계”이되, 그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며 상호보충적인 어떤 관계만이 아니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주도성에 의한 관계라는 것이 앞 글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한글과 영어권의 언약신학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기본개념들, 곧 “약속”(promise),”계약”(contract),”언약”(covenant)라는 말들이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특징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미에서 “언약신학에 언약이 없다”고 하였다(부록1참고). 구약성경에서 이것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는 “베리트”, 신약성경에서의 “디아세케”라는 말은 아주 독특하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을 전제하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심지어 “언약신학”의 그 “언약”이라는 말조차도 충분하지가 않다.
이런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언약”이라는 말로서 “베리트”, 혹은 “디아세케”라는 말의 번역어로서 사용하려고 한다. 특별히 이 말의 “언”(곧, 말씀)이라는 말이, “언약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강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언약론적 존재론”(covenantal ontology)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바로 그 특징이다. 이 말을 들으면 철학에 대해서 견문이 있는 어떤 분은 저를 두고 세속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존재론은 철학적인 용어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적 관념적 존재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적 존재론이든,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자신이 물들어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이런 용어들만 경계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 “언약적 존재론”은, 이런 형이상학적 존재론들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상, 개혁주의신학에서 얼마간 결핍된 것이 바로 이런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essence)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를 넘어서서 있다거나(플라톤), 존재 자체에 있다거나(아리스토텔레스) 하는 주장들에 영향을 받아온 점이 적지 않다. 그들의 철학을 비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약적 존재론”은, 존재의 본질이 존재 자체에 있거나 존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언약”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바로 모든 존재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성경의 증언에 기초한다(창1장).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essence)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존재의 창조가 있었고, 또 그 말씀에 의해서 새창조의 존재가 시작된다(약1:18;벧전1:23 등). 창조이든, 새창조이든,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된 것이니, 존재는 곧 말씀에 의한 것이며, 언약에 의한 것이다. 말씀 그 자체가 일종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성찰에 근거한 "언약"이 언약신학에 없는 것이 현대의 언약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글이 전개되어 가는 중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언약에 의한 것임이 바로 앞서 강조했던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언약”과 “생의 법칙으로서의 언약”과 그 괘를 같이한다. 이제는, “자연”과 “생명”이 모두 “존재”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이 “언약”을 모두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언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존재의 한 구성요소이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인간 그 자체의 인격을 또한 언약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격”(person)을 세 요소로 구분한다. 지(reason), 정(emotion), 의(will)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공화국 등의 책에서 표현된 플라톤(혹은 소크라테스)의 삼분법(tripartite)적 구분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물론, 그들이 정확하게 현대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해는 그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비판되었지만, 그 비판이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이분법(bipartite)적으로 구분한다. 인지적 기능을 하는 요소와 비인지적 기능을 하는 요소로 이분한다. 이런 구분 자체를 뛰어넘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인 것이다. 이것이 왜 그런가 하는 것이 바로 이 “언약적 존재론”라는 관점에서 이 시리즈를 통해서 시도될 것이다. “언약신학”의 범위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지를 암시해 준다. 여기서 요약해 두는 것은, 바로, 삼분법적으로 설명하든,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든, 인간의 인격(person)이라는 것은, 바로 언약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인격(person)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언약을 맺게 되는 일이 있든지 없든지, 이미, 하나님과의 어떤 형식으르든지 이미 “언약관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의미로서든지, “인격”(person)이 잇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어떤 식으로든지, “언약”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본질(essence)를 나는 발견하였는가? 이 질문은 바로 이 언약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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