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하는것은 착각중에 큰 착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하나님을 그렇게 폄훼할수 있다는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증거이며 교만이다. 그러니 이런말은 입밖에도 내지말자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것중에 하나가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데 이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다는것이 인간의 자력적 의지로 가능하다고 착각하는것에 있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두번 말하면 입아프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죄를 싫어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죄를 싫어하고 즐기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에 어긋나는것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은 구원받은 백성의 표징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는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손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잡고 있는것이다. 진정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것처럼 느낄때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음으로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찾게 되어있는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다.
자녀들이 밤이 어두운 깜깜한날 부모님들이 아무도 집에 계시지 않는다면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부모님을 애타게 찾을 것이다. 나도 어릴때 그런 기억들이 있다. 부모님이 너무 늦게 오시는 바람에 눈물짜고 울면서 기다린적이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이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한존재?라는 생각이 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버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하는것은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한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많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싫어하지만 죄를 어쩔수 없이 지을수 밖에 없을때도 있기 때문이다. 미워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죄를 안짓고 살수 있는세상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죄중에 거하니 두려움이 없을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죄악중에 거하다보면 구원을 잃는것은 아닌가? 두려워하게되는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두려움과 연약함이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것이 아닌가? 이런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붙들지도 않고 내면적 확신에 차서 오히려 하나님의 머리위에 올라서려는 교만함보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으며, 하나님을 붙잡는것이 하나님편에서 볼때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백성들이다. 하나님이 손목을 붙잡으신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것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를 빼내갈 세상의 아무것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가 붙든것을 내려놓을분도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요 사랑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다.
왜 알미니안은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이해한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저 성도는 구원받은 사람같은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정말로 영접한 자들이면서 예수님을 버린자들인가? 그럴수는 없다. 예수님을 참으로 영접한 사람은 결코 그렇게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비유로 이미 말씀해놓았다. 그것은 좋은땅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배울때 우리는 30배 60배 100배의 의미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결국 이는 전도를 강요하는 것으로 써먹은 많은 목사들때문에 이 비유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사상이 왜곡됬는데 그것은 구원받은자와 유기된 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설명한것이다.
이 비유에서 보면 길가밭과 돌짝밭 그리고 가시떨기나무아래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밭들을 보면 네개의 밭이 나오지만 크게 보면 두개의 밭으로 나뉠수 있는것이다. 나쁜밭과 좋은 밭이다. 곧 이땅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사람 크게 둘로 나눌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길가밭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듣지만 사단이 바로 와서 뺏아감으로서 말씀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중에 하나이다. 두번째는 돌짝밭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서 사이에 있는 흙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게 하지만 환란이 오자마자 죽어버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환란이 오자마자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의미하며 세번째 가시나무밭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데 여기 뿌려진 씨앗은 뿌리도 내리고 잘 자라는것처럼 보여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결국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환란을 이기지 못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교회안에 돌짝밭을 가진 사람들 가시떨기가 우거진 밭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는데 처음에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결국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우리눈에 보이기에 구원을 얻었지만 잃은것처럼 비추어서 알미니안처럼 구원을 잃을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원인이 아닌가? 보여진다.
믿는자들에게는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통과할때마다 하나님이 시험에 통과할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을 허락하신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농부가 비료도 주고 약도 쳐주고 건강하게 잘 자랄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서 가을에 추수할때 열매맺도록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농부는 길가밭 돌짝밭 가시떨기나무밭에 뿌려진 씨앗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하는것이다. 농부가 그러하다고 해서 과연 유기된 밭에 뿌려진 씨앗들이 농부를 원망할수 있을까? 그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비유중에 토기장이의 비유. 천국에 대한 비유. 그리고 좋은 밭 비유등 이런 비유들을 보면 믿는자들은 그 의미를 쉽게 알수있고 깨달을 수 있는데, 믿지 않는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교회다니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분에게 안타까워하는것은 교회를 구원을 위해 다니는것이 아니라 사교로 다니고 있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구원의 복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문제는 그분이 받아들이지 않는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라고 부탁해지만 구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의 뜻을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분을 보면서 깨달은것은 믿지 않는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알게된 것이다. 믿지않는 자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하면 이분이 말하는것은 누가 나보고 대신 죽으라고 했냐?라는 식의 반문만 온다.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고 비유를 가르쳐주면 천국이 어디 있냐고 대답한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이 중생시키지 않는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알 수 없다.
외형적 교회는 구원을 줄 수 없다. 오직 성령 하나님이 중생케 하셔서 성자하나님을 믿게하며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깨닫는것이 구원의 중심이지 외형적 교회에 구원의 중심에 있지 않다. 우리를 교회되게 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우리는 교회의 몸이 될수 없는것이다.
알미니안은 이런 사실을 무시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수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선택할수 있으니 구원도 선택할수 있고 선택할수 있으니 구원을 얻을수도 있고 얻은 구원을 잃을수도 있다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알미니안은 엄밀히 따지면 자유주의 신학이고 결국 성경에 벗어난 주장을 하고 있는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허락하신것에 대해서 인간은 이해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었다고 말할수 있는 권세를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때 하나님을 똑바로 볼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며 그 위엄아래 감히 머리를 들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인간은 두려워할수 밖에 없다는것이다. 이런 상태에 처한 인간이 말도 못하고 있을때 성령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변호하시는데 이렇게 변호하는것이다. "누구누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올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내가 이 사실을 깨달았는데 성령님을 통해서만 중생할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내가 믿어서 천국에 올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시는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왔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예수님의 말씀중에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주의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주의 이름으로 이것을 했습니다. 라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충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른다고 하실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말이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주시는것이다. 거듭나는것 중생하는것은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비유를 알게해주시고 구원의 복음을 알게 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드릴수 밖에 없는것이다.
나는 자랑할것이 없으니 세상을 향해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당할수 있는것이며 내 자신을 내세울수 없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이 주는 환란과 핍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왕따를 감사하게 받을수 있는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고등학생시절에 많은 친구들로부터 조롱과 핍박 그리고 환란속에 있었던 삶을 기억하니 주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워진다.
나의 자랑할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니 주를 믿음으로 세상의 것을 포기할수 있는 기쁨을 허락하심에 늘 감사드린다. 세상속에 살면서 여전히 죄악중에 있고 환란중에 있고 어려움중에 있지만 그래도 열매를 맺을수 있도록 돌보아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열매?하면 전도가 생각나는데 그것이 열매는 아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그 모든 열매들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하는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것이다. 그것은 좋은땅에 뿌려진 곡식이 맺어야 하는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중간에 죽어버리는 유기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하지말자...
구원을 잃을수 있다는 말은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그 사랑안에서 우리가 열매맺도록 하나님은 도우신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힘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이 온우주를 다스리는 성령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며 충만하심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부족한것이 아무것도 없는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의 고통의 시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했던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며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는 그 사랑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며 넉넉히 베풀고 살아야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그 사랑을 열매맺는데 온 힘을 다해 열매를 맺음으로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한다.
이것이 믿는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구원을 잃을수 있다는 말 함부로 하지말고 오직 기쁨으로 주님께 아름다운 열매맺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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