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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스크랩] 대한민국 기독교는 십일조보다 십계명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한다.

많은 토론방마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날뛰고 있고  안티기독교인들방에 들어가면 수십년 기독교인이었던 분들이 안티가 되어서 기독교를 폄훼하고 욕하는 모습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왜? 이런일이 벌어질까요?  안티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대화가 안됩니다.  뭔가 내가 숙이고 들어가도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욕하는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욕하는걸로 대화는 끝나버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게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것일까요?  안티기독교인들일까요? 아니면 기독교인들일까요?  대답하기 힘들겁니다. 둘다 똑같으니까요..  안티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것은 안티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눌때 그렇습니다. 

 

안티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랄까?  신앙생활을 포기한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것이 일쑤죠  진리를 말하면 교회안에서 왕따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뭔가 교회안에 진리를 말하고 참된 말씀을 전하면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있고  오히려  이단시되어 견디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들어서 정말 심각하고 심각합니다. 왜? 이런일이 벌어질까?  돌아보면  교회안에서 목소리를 키우려면 십일조를 많이 해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십일조를 많이 하고 교회안에서 돈을 많이 써야  목소리를 낼수 있다. 내 목소리를 들어준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신앙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안티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는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교회는 십일조를 강조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의미에 대해서 더 많은 가르침이 있어야하는데 십일조가 우선되어 버리는것이 현실이라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십계명에 십일조가 들어있는지?  우리는 우선 그것부터 살펴보아야합니다.  십계명은 믿는자들이 지켜야할 아주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뛰어넘어서  기독교인들은 십계명 안에 있는 의미까지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말씀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의 4계명과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6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계명의 의미를 깨닫고 지키는 것이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이 계명조차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폐지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완성된것입니다.  그 의미는 위에 언급한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입니다.  율법의 완성입니다.  기록된 말씀보다 더 고차원적인 삶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것은 마땅한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더해야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사랑하는것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을 더해야합니다.  간음하지 않는것 도적질하지 않는것 거짓말하지 않는것 탐욕하지 않는것들은 정말 마땅히 해야하지만 거기에 사랑을 더하는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이 완성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아야합니다.  믿음을 강조하고 은혜를 강조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개혁신학은 이 율법을 폐기되었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완성된것으로 보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곧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는 이것을 버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로 끝납니다. 이것이 복음주의입니다.  삶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전도와 선교 그리고 헌금만을 강조하게됩니다.  복음주의가 들어와서 개혁주의를 몰아내고 결국  기독교는 안티들의 숫자만 늘려왔습니다.

 

신앙의 기쁨이 없습니다.  복음을 알게된 행복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몇년안에 괴로움으로 바뀌고  괜히 믿었다는 불평으로 이어집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가 변질되고 바른 신앙에 서지 못하고 흔들리게 됬습니까?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의미가 퇴색되어졌습니다.   부모님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는 이렇게 떠듭니다.  시대가 변했어요 부모님들이 시대에 좀 순응을 하세요!!  시대가 변했다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대가  납골묘가 대세가 되어도  부모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좀 모른다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부모님을 무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가 그렇게 변질되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할줄 모르니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살인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이 생기고  간음은 이제 대놓고 하게 되었습니다.  상업주의가 판치고  인간은 돈에 팔렸습니다.  성은 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훼방하고 거짓증거하고  괴롭히고  이웃의 물건을 탐내고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것은 자연스러운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아픈것을 뛰어넘어  어떻게서라도 사기쳐서 그 땅을 내것으로 취하려고 애쓰는것이 현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안그럴까요?  만약 기독교인들이 정말 십계명의 말씀대로 인간을 사랑하고 살았다면? 세상은 이렇게 삭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을 탐내서  경제를 외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사람사는 세상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을 꿈꾸는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안티들은 더더욱 날뜁니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인들은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하는데  요즘 기독교인들은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넘어지는데 더 열중합니다.  하늘의 언어에 푹빠지고  방언못해서 안달이 났습니다.  방언찬양으로 아름답게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혼이 뺏깁니다. 

 

병고치는 일을 하는 장로와 목사는 주술을 외는 사람같이 느껴집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만저주시옵서서 터치해 주시옵서소....주님이 어디 갔습니까?  성령님이 밖에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전이고 성령님이 거하는 곳임을 모른단 말입니까?  성령님이 다른 분입니까? 

 

기독교가 추구해야하는 정신은 십계명인데   요즘 교회들은 십일조를 추구합니다.  마땅히 해야할것이라고 해도  우선순위가 있는 법입니다.  복음을 듣고 갓 성도된 어린 성도들에게  십일조 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갓난아이들이 무슨 돈을 벌겠습니까?  자기것만 소유하는것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갓난아이들에게는 돈을 주는 법입니다. 빼앗지 않습니다.  더 많이 줍니다. 부모님이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빼앗을 날이 오지만  빼앗는다고 생각하지않고  부모님을 위해서 내가 번돈을 드린다고 생각할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못기다리고  어린아이것을 빼앗으려고 혈안되어 있습니까?  그러니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것이 아닙니까?

 

오늘 아멘넷 김삼목사와 대판 붙었습니다.  은사가 중단되었느냐? 아니냐? 의 싸움이지만 표적으로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만 보여줄것이 없다며 두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표적과 이사를 많이 보여줬지만  그것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에서 행한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서 부활하는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귀신을 내쫓는거나 병을 고치는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죽은후에 부활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게된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헛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핵심적인 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이 왜 필요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게 필요하단 말입니까?  예수님을 안믿으니 모르니 필요한것이 아닙니까?  이제 성경에 다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우리가 성경으로 그 내용을 다 듣고 있는데 무슨 필요가 또 있어서 기적을 베푸신단 말입니까?  정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방언을 허락하실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꼭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없다고요?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으니  내가 틀렸다구요?  방언을 해도 못해도 믿음에 변함은 없습니다.  해서 믿는 사람은 해서 좋은것이고 안해도 믿는사람은 더 은혜가 많은 사람입니다.  했다고 자랑하고  안한사람을 구박하고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구나 라고 믿을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안해도 믿을사람은 믿고  해도 안믿을 사람은 안믿습니다. 

 

우리는 그런 표적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십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십계명이지 십일조도 아니요 표적도 이적도 기적도 방언도 아닙니다.  신학이 사라지고 말씀이 사라지니  표적을 구하고 이적을 찾고 방언을 쫓습니다.  말씀은 듣지 않고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것만 쫓습니다.

 

이러니 기독교가 세상으로 부터 질타를 받고 안티들이 극성대는 것입니다.   정말 답답해서 좀 문장이 과격합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참 믿음을 갖고자 애쓰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의 기준을 십계명에서 찾읍시다.  십계명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  선지자의 가르침입니다.  그 정신이야 말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해야할 마땅한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저지만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싶습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신재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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