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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

딤후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에베소서 5장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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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저는 이런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것같아서 이렇게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이글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가르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가르침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복음주의로 인한 영향으로  구원을 받는것과 심판을 받는것에 대한 관심도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것보다 더 높은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서 부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을까요?  왜 하나님이 인간을 이땅에 두시고 우리에게 이땅을 다스리게 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또한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바로 인격적 관계이고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첨부터 우리를  피조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혔고 인격적으로 창조했던것입니다. 우리가 로버트도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해야하는 존재가 되지 않은것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을 대리고오고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었던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라자 하나님은 그에게 하와를 허락했습니다.  아담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것은 하나님의 배려이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독처하는것이  안돼보였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인간들끼리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관계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것을 원했던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의 위가 인격을 가지고 있고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며 하나된것처럼 우리인간도 하나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관계로 하나되게 하신것입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삼위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것처럼 인간도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의 관계로 하나되기를 원했던것입니다.  그 하나됨의 관계속에 가장 중요한것은  지금의 우리들 뿐만 아니라 아담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창조되었다는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져서 예수님이 필요하게된것이 아니라 죄가 없을때라도 예수님이 필요했던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둔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관계로 창조된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관계로 창조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고 숨었습니다.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된것입니다.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셔야 했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신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하는데  구원이라고 함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게된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끊어진 죄의 종으로서 저주받아 죽을수밖에없는 존재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아래로 둔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함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말해 창조때의 형상 인간의 형상을 회복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죽은 영혼이 생명을 얻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수 있게된것입니다.

 

곧 구원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교제하는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것은 구원을 얻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 의미로  율법을 우리에게 허락하신것입니다.  제가 말했듯이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모세에게도 애굽에서 준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라는 죄아래서 구원얻어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모세를 불러 시내산에서 주신것입니다.   우리가 죄아래 있을때는 율법이 필요없지만  홍해를 건너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들어서는 순간 율법은 우리의 삶의 길잡이가 되는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딱 두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율법을 버렸습니까?  율법이 사라졌습니까?   

 

우리가 어려워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데....사랑하는것이 어떤것인지? 모를때가 너무나 많이있다는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하는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표현인지? 아니면  그냥  물질과 행위로  사람들을 도와주는것이 사랑인지?  무엇이 사랑인지 어쩔때 많이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에서 목사들이나 많은 성도님들이 사랑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사람들이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교회를 향해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사랑이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것입니다.  사랑이 없을까?  왜 교회는 사랑이 없을까?  그런데  성도님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이 나타나지 않고 있고 오해받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이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이고  많은 성도님들이 교회다니는 이유를 잃어버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다니는것 하나님보고 다니지 인간보고 다니는것 아니야" 라고 말합니다.  이 말만큼 가슴아픈 말이 없고 슬픈 말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것이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서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죄악속에 거할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죄를 지을수 밖에 없음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오는 성도님들은 이해받고 싶어하며 용서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습니다.  변명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해받기 원하며 용서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고 변명이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게되면 말이 줄어들고 변명을 그치게 됩니다. 

 

그러니 교회는?  과연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있나요?  아니면 정죄하고 있나요?  제가 볼때 교회는  정죄를 더 많이하지 이해와 용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서  슬프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기쁨을 누리고 사는 시간은 너무나 없습니다.  억지로 웃고 사는것도 한두번입니다.   죽을때가 그래서 슬픈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서 자기를 이해하고 용서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자기의 결백을 주장할때가 있습니다.  죽음이 무기가 될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거나 용서해주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죽음으로서 부모님에게 복수를 꿈꿉니다.  친구가 애인이  이해하거나 용서해주지 못한다면 그 친구나 애인도 죽음으로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아니면? 관계를 끊음으로서 해결하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관계를 원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교회가지 인간보고 교회가지 않는다고"  이 말은 정말 슬픈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정죄를 당하면? 얼마나 이해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성도님들의 마음이 이렇게  싸늘하게 식어버렸을까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법으로 다시려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것입니다.  곧 천국은 사랑으로 하나된곳입니다.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우리도 하나되어야하는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얻는것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접붙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는것은 예수님안에 들어가는것입니다.  곧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되는것이고 그 하나됨은 곧 사랑의 관계로 가능한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가 된것입니다.

 

교회는 이런곳이 되어야합니다.  서로 사랑의 관계로 이해와 용서가 넘치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기독교인이냐?  그런데 왜 그따위로 사냐?  그게 기독교인들의 삶이냐?  왜 담배피고 술마시냐?  왜 너희는 간음하냐?  왜 너희는 도적질하고 돈을 사랑하냐?  너희가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거냐? 

 

우리들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런글을 쓰기가 무섭니다.  우리도 똑같이 담배피우는 성도를 향해서 눈치를 줍니다.  술을 마시는 형제를 향해서 비난을 합니다.  간음하고  연애하는  청년들을 향해서 교회에서 그러지말라고 합니다.  혹여  교회안의 커플이 헤어지면?  색안경을 끼고 보게됩니다.

 

우리가 서로 그러할진데?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고운 눈으로 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우리의 품에 안으며  우리와 교제를 끊지 않는다면?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다르게 볼것입니다.  서로의 행실이 빛과 소금의 관계가 되어어합니다.  특히  내가 좀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담배피우지않고 술안먹고 예배 잘드리고 헌금잘하고 봉사와 헌신하는 아주 훌륭하다고 불리는 기독교인들 성도님들이 더욱더 많은 이해와 용서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로 전락하게 될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끼리는 동병상련의 관계가 되어 서로 관계를 잘 맺지만  교회안에서  열심으로 봉사하고 거룩해보이는 사람들의 눈빛이 차겁거나?  구별하거나 편애하는 눈빛이 되어서는 교회는  천국이 될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사랑이 없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교회가 부흥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니까 결국  표적과 이적 기적을 추구하고  그런걸로 하나님을 증명하고 복음을 전파하려고  잘못된길로 빠져버리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추구해야할 정신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닙니다.

 

참교회는 천국의 모형이 되어야하고  천국의 모형은  이해와 용서입니다.  그것은 같이 눈물을 흘리는것이며 같이 기뻐하는것이고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곧  참된 하나됨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주안에서 한주를 모신 하나된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는 말로만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되어야합니다.

 

하나되지 못하기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헷갈리게 된것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혼동이 온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구원얻는것이 최상의 선인냥?  변질되어버린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는것입니다. 더이상 한발자국도 앞서지 못하는것입니다.  초보신앙에서 계속해서 머물게된것입니다.

 

이 글을 쓸때  제가  먼저 제시한 성경구절을 보시면  성경은  우리에게  잘못된것을 책망하고 바른길 의의길로 향하게 하는 역활을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가르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옳은길을 알게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옳은길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늘 어린아이와같은 신앙을 가지고서  옳은길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고  부모님의 품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독립하여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젖만 먹는 신앙이 아니라 단단한것을 먹을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른길 의의길을 깨닫는것입니다.  바른길 의의길을 깨닫는것은  우리가 잘못된길을 갈경우 책망하시기 때문에 가능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이라도 스스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길을 가다가 이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바른길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고 그길을 더 잘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알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맘에  착하고 의로운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못하고  바른길이 무엇인지 혼동이 왔었는데 그 이유는 선생님이 잘못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달전만해도 사람들을 정죄하기 바빴지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평신도들을 향해서 정죄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들을 향해서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 죽좀 먹이라고!!!!

 

이제 단단한것을 먹고 성도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율법이 무엇인지? 율법주의가 무엇인지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이 되지 않고  율법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는것이야 말로  단단한것을 먹는 성도로 성장한것입니다. 

 

어릴때는 율법이 필요없고 율법없이 살수 있지만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때는 모든것을 다 하나님이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편하게 살수 있지만  이제  하나님품을 떠나서 독립하게되면  우리는 율법을 필요로하게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이런것입니다.  아랫글에  예수님을 믿어 의로와 졌으니 이제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고 말하는것은  인간을 몰라서 한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는 세상으로 부터 욕을 먹지말아야할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기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율법을 우리가 스스로 지킬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무엇인지 알게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주었더니  그 율법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을 정죄하고 이웃을 정죄하기 바쁩니다.   비판과 정죄는 구분해야합니다. 책망과 저주는 구분해야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하는데? 성경을 봐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직도 어린아이로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라지 않고 자폐아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자라야합니다.  성장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성경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합니다.  기도가 모든것의 해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은 기도가 모든것의 해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것입니다.  우리는 밤새워서 눈감고 손모으고 기도하지 않아도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율법이 바라는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몽둥이로 준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삶을 이렇게 살라고 준 지도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그려진 지도입니다.  바른길을 안내하는 지도입니다. 

 

이 율법이 없다  율법이 필요없다고 말하는것은  지도없이도 하나님께로 갈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줄 이유가 없는것입니다.   레위기를 잘 읽어보십시요!! 어려운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까?  레위기 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살라고 적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눈으로 확인해 보십시요........

 

그걸 확인하게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되지 않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저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명이 많습니다.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생각나는데로 쓰는 글이라서  정리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인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서로 하나되어야하고 서로 내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하신것처럼 우리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계속에서 이루어질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정죄하지 않았으며 좋겠고 내맘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른다고해도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된 형제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형제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도와주며 이해하고 용서하는것으로 하나되어갑니다. 

 

이렇게 천국이 교회안에서 만들어지는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할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되고 교회가 부흥하게 될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표적과/이적/귀신쫓아내는것과/방언하는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 부흥은  참된 용서가 실천될때 나타나게될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기독교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