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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소통...그리고 사랑....그리고....새 계명

○ 새 계명 요한복음 13장 : 31~35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할수 있는걸 사랑하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것이다.  사랑할수 없는것을 사랑하는것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반댓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사랑의 최고는  생명을 내어놓는것이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사랑인지? 가끔씩 이해를 하지 못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란 말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보다 좋은 말은 없을것입니다.   사랑에 정의는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참사랑은  이웃을 위해 내 몸을 내어주는 것일겁니다.  고전 13장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이 말의  의미는  나를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는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일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이웃을 위해서  내몸을 내어준다는것이 곳 사랑의 의미일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었을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곧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의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수 있지만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만한 인간은 한명도 없을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수 있을까요?  저도 이해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사랑한다고 판단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그 사실이 믿겨지는 어느날 저는 그날  참 많이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바치셨는걸 이해하고 사랑하고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그걸 요구하시는걸 깨달았을때  비로서 저는 큰일이 생겼다는 두려움에 가득찼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는 사랑을 나는 할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으니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저는  예수님의 명령앞에서 도망칠수 밖에없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는 정말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수 있는것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참 뜻을 실천하기위해서 무엇을 해야할것인가를 고민했을때.....소통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저에게  한가지 해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막고 살던 저에게  예수님이 귀를 열어서  듣기 싫어도 들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것 그것은 정말  처음엔 귀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골수를 쪼개고 마음을 파고들때는  정말로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절박함까지 느껴질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이유를  제 삶에서 찾게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애굽왕에게 속인 그 사실이 내 삶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군사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칠때의 그 모습이 바로 내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다고 그렇게 혈기를 부렸던 모세가  40년동안 광야에서 그 혈기를 누르는 훈련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겸손한 모습으로  아론을 대동하고  바로앞에 서는 그 모습을  내 삶에서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함부로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된것.....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깨달음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나눔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공감한다는말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소통한다는말을 깨닫습니다. 

 

저는  부족하기때문에  사랑할수 있을만큼 그렇게 성숙한 자아가 아니기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뜻앞에서 교만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자는 겸손한자일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목숨보다 사랑하게 됬을때 그는 하나님보시기에 가장 겸손한자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모범이셨습니다.  저는 여전히 교만합니다.  왜 교만한가 생각했더니  저에게 소통의 단절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아가 펄펄 살아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통의 단절이고 교만의 선봉입니다.  제 모습입니다.  

 

요즘 저는 소통에 많이  내 생각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더이상 앞으로 나갈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소통하지 못하고  외골수적으로 살아왔던 삶이 너무나 많이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어릴적 습관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것을 듣고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을 알고자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소통을 열고자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의  통로이지만  기도뿐만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듣고자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묻히는것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서 움직여서 내 삶을 움직일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절박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깨달아가는것이  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듣지만  내가 살아있어서 그것이 내안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알지만 그것이 내안에서 생명을 갖지 못하고  죽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리는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서  참으로  알고  참으로 생명력을 가진 그 말씀이 내안에서 살아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조금만 알고 조금만 소통을 해도  금방 교만해져버리는  이 죄성많은 인간의 품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어하고  내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소통되고 살아서 움직일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많이 내 안에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소통의 문제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이  이젠 집단화가 아닌 개인주의화가 되어가기 때문일것입니다.  이젠  이웃을 향한 소통은 거의 단절되어가고 있습니다.   나 개인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일수도 있습니다.  민주화가되어갈수록 개인의 능력과  개인의 삶이 보장되고 개인의 삶을 위해서 이 사회가 운영되기 때문일것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이 삶에서  이웃을 향한 소통의 문이 닫히지 않고 있다면  이 사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동문서답하는 소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회라면?  아무래도  이 사회가 바르게  가지는 못할것입니다. 

 

사회가 비록 소통이 되지 않을지라도 교회는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막힌담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가 서로 소통하라는 말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사랑이라는 의미의 목숨을 바치는 그런 사랑보다 단계가 조금 낮은 단계일지는 몰라도....소통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이유는  현재의 교회들이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에 출석하면 뭔가 어색하고  교회를 오래다녀도 사랑이없다는 말이 나오게되는 이유가 바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의  도구로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뭔가 소통되고 하나되는 느낌을 가지려고 하는데  이또한 마땅치 않고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교회가 점점더 어려워지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알파코스/g12/목장/제자훈련/셀/가정교회.....이모든 프로그램들이  복음을 위해서가 아닌  성도 개인간의 소통을 위한 장으로서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통을 할때 무엇을 가지고 소통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는것이 바로 이런 불의하고 불법한 프로그램들이 소통의 장을 마련해준다고해서 그것을 덥석 도입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참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바른 기초에 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들이  극성을 부리는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하게됩니다.  

 

과연  이웃을 향해서 귀를 열어두고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가?   누가 무슨말을 하면  겁부터내고  문을 닫아버리는것은 아니가?   이단을 경계해야한다면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어야할 연약한 백성들  이단에서 혼란을 겪고 바른 길로 오려고 하는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까지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천지라는 이단에 빠진 자들이 개교회에 많이 가서 교회를 삼키고 산을 옮긴다고 하는데...저는 솔직히 왜 교회가 먹히는지  답답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바른 진리가 선포되고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면  신천지에 빠진 성도가 개교회를 찾아갔다가 변화되어서 바른길로 돌아오게되는 역사가 또한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이 없는데....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교회가 신천지에게 먹히는것은 결국 교회가 바른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통을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지요  소통은 상대방을 필요로합니다.  사랑도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요.  곧 대상이 있는것입니다.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여는것은  소통이나 사랑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것을 느낍니다.   사랑은 한발자국 더나아가 소통의대상을 향해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의 열정을 가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을 말하기 이전에  소통에 대해서 고민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님과 소통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것에 귀를 닫고  자기말을 성도님들에게 하니  성도님들은 목사님과는 소통할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현재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우리들의 모습이나  정말 얼마나 많이 다른지?  정말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서로 소통하고 있는지?  한번 고민해봐야할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준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서  예수님의 제자인것이 확인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는 정말로 크고 어렵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어떤것이 사랑인지를 알아가는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랑의 방법으로  저는 소통을 생각했습니다.  나부터  하나님과의 바른 소통의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바른 소통의 관계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나를 변화시키고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그리고  이웃과의 소통의 관계를 바르게 맺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는 내 모습을  느껴보기를 정말 소망합니다.

 

참된 소통의 관계를 맺을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목숨을 바쳐 사랑한  모세처럼.....자기의 자식을  하나님께 바칠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된  아브라함처럼.....그리고  참된 겸손과  소통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이땅에서  죄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는 역사가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도  세상을 향해서  귀를 막지 말아야하며  또한  우리 내부의  형제들끼리도  서로 험담하기 이전에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격식과  형식을 벗어나  참으로  형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그런 아름다운 소통의 관계가 교회안에 이루어 질때  비로서  이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곳"이라는 칭찬을 듣게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양무리 마을 우리 형제님들끼리라도  정말 소통하며  마음에  답답한것들을 내어놓고  그것들을  용납하고 받아주면서 서로의부족함을 채워주는  스승이며 제자이고  제자이며 스승인  그런 아름다운 소통의 관계를 맺는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글이 좀 길어서 죄송합니다.   끝맺음을 하는것도 정말 어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