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주간인가봅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말들이 많이 들립니다. 과연 이시대에 우리가 개혁해야할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 고민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들속에 진정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는 얼마나 될까요?
요즘은 예수님보다 성령님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들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 성령을 체험하자!!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 이런식으로 성령님에 대해서 많이 강조되는 시대인것입니다. 성령님을 잘 아는것은 중요합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모든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도 예수그리스도요 신약도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하나님께서 이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모든 성경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성령님의 역사가 오해되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것이 성령의 능력을 받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자!!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구원받았다는 증거로 삼고....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선택받은것처럼 착각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볼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아는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예수님을 아는것이 중요한가? 그것을 찾는것이 바로 종교개혁인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아는것보다 예수님을 아는것이 중요한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로아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이유!! 그리고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그리고 왜 부활하셨어야만 했으며 또 성령님을 보혜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모든것을 알게하셔야 했는가 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가? 를 아는것이 바로 모든 신앙의 시작이 되는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것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보내주셔야만 했는가?를 바로 찾아서 우리의 신앙을 바로 정립해야하는것이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유행하는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바로 아는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누구의 명을 받고 일합니까? 성령님은 독립적 인격체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그분의 뜻대로 임의로 일하십니다. 누구의 명령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성부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성령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바로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곳에서 일하십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이 없는곳에서는 결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할때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성령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복음전파보다 성령님을 알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역사한다면? 그곳엔 성령님이 아니라 악령이 역사하게 됩니다. 성령님의 이름으로 거짓영이 역사하게 되는것입니다.
알파코스는 예수님을 바르게 전파하지 않습니다. 알파코스가 예수님을 바르게 전파하지 않으니 그곳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은 거짓영인것입니다. 알파코스 뿐만 아니라 신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전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결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거짓영이 역사하게 되는것입니다. 성공신학을 전파하는 곳에서 예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신학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은 거짓영인것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을 바로 전파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예수님은 태양신의 아들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역사하는 영은 거짓영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천주교와 같은 영성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행위론자들입니다. 이땅에 행위론자들이 너무나 날뜁니다. 이들은 구원을 얻은 자들도 죄를 범하면 구원을 잃을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할때 고해성사를 해서 죄를 사죄함을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할것처럼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만인구원론을 퍼트립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니 인간을 모두 심판하지 않을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 구원할 사람만을 선택해서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거짓말을 퍼트립니다.
선행을 하면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자기들만 좋아하는 구절만 뽑아서 그것이 옳다고 떠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일점 일획도 빼거나 더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성경책은 빼버립니다. 천주교는 성경책이 66권이 아니라 77권입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행위구원론을 무너뜨려야 하는것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은 성령님을 강조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원하는 일을 하게되고 성령님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는것이고 결국 죄를 지음으로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자들입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방언도 분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면 모두 성령님을 받은것처럼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방언이 정말로 하나님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자녀에게 허락한 축복이 아닌것입니다.
방언을 받으면 구원을 얻은것이고 방언을 받지 못하면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것이 성경적일까요? 성경에서는 방언은 구원받은자들의 표적이 아니라 은사중의 하나에 불과한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서 죄와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럼 성령님을 받지 못한 자들일까요?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죄용서함을 받았음으로 더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정죄함이 없는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우리는 법의 판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법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의 법으로 생명의 법으로 판단을 받고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사망의 법으로 판단을 받음으로 정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영원히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에 죄없는 자들은 한사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성경에 우리는 선을 행할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산다고 해도 그것은 성령님의 일반은총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에 선하고 착해보이는것이지 우리는 본질상 저주받고 악한 자들이고 이미 사망의 몸을 입은 자들이고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상의 변화도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것은 복음의 바른 전파와 성령님의 바른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행함으로서 사해지지 않습니다. 요즘 행위론자들과 은혜론자들의 다툼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행위론자들은 은혜론자들에게 행위가 없어서 기독교가 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은혜론자들은 결단코 죄를 범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는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에 동참함으로서 더이상 죄에 거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비록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로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었고 생명을 얻어서 이제는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수 있게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행위로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있는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서 하나님이 받을만한 제물이 되었을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어도 스스로 구원할수 없는 저주받은 자들이기에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제물이 될수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게된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것은 내 지식 내 맘대로 되는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로 가능한것입니다. 우리는 성부,성자,성령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게되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것이 우리가 할일인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그 일들을 감사하여 하나님으로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안위가 되지 못하고 이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인기가 우리를 살리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그 사랑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임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
은혜론자들때문에 이땅에 종교개혁이 필요해진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행위론자들로 인해서 이땅은 종교개혁이 필요하게 된것입니다. 행위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사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다른것들이 필요하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것이 필요한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십일조를 해야하고 가난한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우리는 돈이 필요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쪼개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로 인해서 만들어진것입니까? 바로 행위론자들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내놓지 않는다고 협박하는 자들이 이땅에 너무나 가득합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너는 뭐하고 사느냐고 책망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자들이 능력이 없다고 책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능력을 행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왜 당신을 위해서 쓰느냐고 책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연 이들은 자기가 가진것을 이웃을 위해서 쓸까요? 저들은 오히려 탐욕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님들의 십일조를 착취해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부를 쌓는 자들입니다.
행위를 강요하면서 그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님들을 향해서 전도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면서 전도하는 목적이 영혼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대형화와 헌금을 많이 걷는등 복음전파보다 교회의 부와 목사의 안위를 위해서 복음전파를 강요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족의 행복보다 교회를 위해서 살라고 하고 자기의 시간보다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속이는 자들이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바로 누릴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종교개혁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직원들을 위해서 부를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신것을 다 내것이라고 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를 받은자들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는 자들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아내를 포기하고 신앙을 위해서 자녀를 포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면서 직원들에게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장이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난한자들의 땅을 빼앗아서 거기서 나오는것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그런 시간도 받지 않으시고 그런 기도도 듣지 않으십니다.
믿음이라는것은 그런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것이 그런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개혁하는것이 종교개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을 투자하는것은 어쩌면 옳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것은 결단코 옳은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족한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더 받기 위해서 많은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누리며 베풀고 사는 삶 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병자를 고치는 그런 기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런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산상의 교훈들도 우리가 이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고전13장의 삶도 에베소서 5장의 삶도 히브리서 11장의 삶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어떻게 누리고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향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충성하고 오래참고 자비로우며 긍휼한마음을 가지고 사는 삶. 그 삶이 바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도 하는 이유는 밤로 이런 삶을 위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입니다. 이웃의 것을 빼앗은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삶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착복한것이 있으면 네배를 갚겠다고 다짐하는 삶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의 삶은 나에게 빚진 모든 자들의 그 빚을 탕감하면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인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용서받고 누리지 못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자들의 삶은 그 삶을 이웃에게 똑같이 배풀라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삶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은 은혜론자들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행위가 없다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정죄만 있을 뿐입니다.
은혜론자들은 행위론자들로 인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삶이 온전한 행위가 없는것처럼 착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열심히 하는 행위론자들로 인해서 은혜론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새벽기도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으로 인해서 새벽기도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서 교회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녀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내 아내 내 자녀를 더 사랑하는것은 아닌가? 하고 괴로워 합니다. 돈을 버는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축복인데 돈을 버는것이 돈을 추구하는것인냥 말하는 행위론자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 노동과 땀흘려 얻은 재화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것이 바로 행위론자들입니다.
이땅의 개혁은 바로 이 행위론자들과 은혜론자들과의 전쟁입니다. 행위론자들의 그 거짓됨을 파악하고 은혜로 사는 삶을 바로 깨닫고 그 은혜를 바로 누리고 사는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는것이 종교개혁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누리고 살라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행복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인해 신음하는 그 괴로운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복한 삶을 살게하기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것입니다.
하나님없이는 우리는 생명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연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다리가 되어 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께로 나아갈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축복을 누리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이 축복은 거저 주신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이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걸 거저 주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론자들입니다. 이것을 거저 주지 않고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이 바로 행위론자들입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것을 바로 잡는것입니다. 행위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성령님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거짓 예수를 가르치는 자는 거짓영입니다. 행위론자들은 거짓영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이것을 개혁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바로 가르치고 은혜와 선물을 받은것을 감사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바로 알아야할 신앙생활인것입니다.
더이상 행위론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거저주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그 은혜를 거저 받았으니 거져 나눠 주십시요!! 그 나눔이라는게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빚 갚지못할 빚을 탕감했으니 나에게 죄지은자 나에게 빚진자들을 용납하는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삽니다. 세상사람들은 넉넉하지 않아 죄를 지은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것을 용납하는 넉넉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사람들보다 더 까다롭고 용납할줄 모릅니다. 여유가 없고 팍팍합니다. 인간적인 면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놓고 은혜를 베풀줄 모릅니다. 자기가 용서받은것이 얼마나 큰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용납할줄 모릅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것을 개혁하는것입니다. 교회는 넉넉해져야합니다. 용납할줄 알아야합니다. 이해할줄 알아야합니다. 까다롭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교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 안하고 교인들을 향해서 사랑이 풍성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게 하는것 그것이 종교개혁인것입니다.
용납할때 어디까지 용납할것인가는 정말 고민해야합니다. 용납하면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죄를 용납하는것은 안될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죄는 용납하지 않되 죄인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태복음 6장 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가복음 11장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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