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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은혜 로운 말씀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신앙이요?  사람들은 왜 신앙을 골치아프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장로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의견을 존중하는것은  신학의 틀안에서 골치아프게 신앙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신앙하는것을 저는 원합니다. 

예정과 자유의지가 내 신앙을 좌우지 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있는자와 없는자의 차이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앙이 없는자라고 해서 생각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것은 법입니다.  법이 없다면  생각을 통제하지 않게 됨으로 범죄를 쉽게 저지르게 됩니다.   한 나라가 운영되는것은 바로 법때문입니다.  범죄라는것을 법으로서 규정함으로서  법을 통해서 사람을 통제합니다. 만약 법이 없다면 무법천지가 되고 죄가 규정되지 않음으로서 처벌할수 없게 됩니다. 

세상은 세상의 법으로 사람을 처벌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으로 심판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생각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할 자유도 있고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까지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도록 아브라함에게 생각을 강요하고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이었지만 그 사기꾼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되기까지 하나님은 야곱의 생각을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행함에 있어서 책임이 부과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 지구를 다스릴 권리와 능력을 주셨고 아담 스스로 이름을 지어서 붙일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 지혜를 하나님이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지혜를 잘 사용할때 하나님은 비로서 아내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자유를 준만큼 책임을 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 책임이 바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아담은 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은 약속대로 죽었습니다.  아담이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생각하는 권리까지 하나님이 박탈한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박탈당한 권리는  생명나무열매를 먹을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고 죽어야하는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열매를 먹을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이유는  법대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담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처벌을 하지 않게됨으로 하나님이 법을 어기는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법대로 아담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을까요?  아담이 죽든 말든 상관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를 잘 관리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하나의 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바로  아담의 죄를 사하는 방법인 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것입니다.  이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서 죄를 사해준다는것을 의미하지만 아담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아담에게 희망은 딱한가지입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중에 바로 이것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원수는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뱀이기 때문이 이 원수를 이길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것이 아담에게는 희망이 된것입니다. 

우리가 복인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에게는 성경이 주어졌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 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의 축복과  불순종한 자들의 저주까지 다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으니  우리는 이 지구의 역사가운데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웃긴건  이런 축복과 저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순종하여 믿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배를 채우는 자들이 이 땅에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분들은 겸손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생명을 유지하는 분들은 겸손해야하고 순종해야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더 많이 안다고?  더 많이 공부했다고  오히려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이런 분들을 기쁘게 바라볼까요? 

신학으로 밥을 먹으려고 하지말고  신학으로 성도들을 참된 하나님의 영역안으로 인도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학을 가지고 평신도를 재단하고 정죄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것이 전부이고 다른 사람은 거짓인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위에서 군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부인권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법도 필요없어집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모든짓이 다 범죄함입니까?   세상사람들은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선을 행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선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선입니다.   자기상을 이미 받는 그런 선행인것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아닌 이땅에서 이미 받아버린 상인것입니다. 

우리 믿는자들의 선은  오른손이 하는것 왼손이 모르게 하는것이고  이땅에서 받을 상이 아닌 하늘에서 받을 상이 있는 선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한마디 합시다.  

세상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선을 행합니까?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더 인정해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행하는것이고  세상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해서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하고 그리스도가 그 영광을 받아 야하는 선행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선행으로 인해서 우리는 늘 욕을 먹어야합니다.  그렇다고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행이라면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악하게 보지 않고 선하게 볼수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온갖 악행을 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인정해줄거라는 착각은 안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채찍을 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악행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성경에 나타난  믿는 자들의  모습에서  악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심판하셨고 채찍하셨습니다.  그것을 심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믿는자들은 악을 행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택할수 있는 자유 악을 택할수 있는 자유!  하나님이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 자유를 행할때 악을 행하면 채찍을 주시고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시는것입니다. 

성화 영화의 단계로 가는것은  악을 행하지 않게되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악을 행하는 빈도수가 낮아지는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맞으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많이 맞았고  많이 아팠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만이 할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경지입니다.  

야곱도 많이 맞았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많이 맞았기에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왕이 되었고  솔로몬도 많이 맞았기에  전도서라는 성경을 남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많이 맞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었고  베드로도 많이 맞았기에  십자가를 거꾸로 지는 경지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억압하고 통제하지 않으십니다.   최장로님의 말대로 법으로서 다스립니다.  악을 행하면 채찍을 주시고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심으로서 말입니다. 

저는 믿음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있고  어느것이 진리인냥 서로 서로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면 죄를 지었을때는  분명히 책임을 지겠끔 하는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고 채찍으로 견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니면 채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마음에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경계하심이 있고  그 경계하심을 통해서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찾게되고 하나님을 부르게 되며 회개하게 되는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것은  깨달아 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과정속에서 알게되어집니다.  20년전 내모습과 지금의 내모습이 다르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 아닙니다. 

청년기의  혈기 왕성했던 모습과  현재 삶으로 인해서 바빠서 더이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40대의 모습을 볼때  청년기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애쓰며 살아왔던 그 시절이 신앙이 더 좋고 지금이 더 안좋은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듬은 신앙은  젊을때는  시행착오로 늘 밤마다 울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눈물이 그치고  하나님과 진정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때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는 기쁨이 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때가 최고인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닌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산으로 올라갈때의 그 신앙이 아브라함의 최고의 신앙으로 성숙해진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알게된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브라함만 갖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뜻때로 살다가 나이들어서 갖을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모습을 가질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것이고  우리의 실수는  하나님이 채찍으로 깨닫게 하시며 순종하는 자리까지 이끌게 될것입니다. 

저도 모태신앙이지만  40년을 살아오면서 아픔의 과정과  채찍에도 수없이 맞아가며  밤마다 눈물로서 기도하고  그 애씀으로 말미암아 지금 내 모습이 만들어져있고 또 만들어져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것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것이지만  내가 하나님께 사랑한다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강제적으로 하라고 하신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것을 인생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고  20대의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지금 사랑한다는 고백이 더 진실되게 하신것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실수하고 다윗도 실수하고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실수 했듯이 나도 실수할수 있고 잘못할수 있고  노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살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고 모른다고 할까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앞으로도  하나님앞에 갈때까지 인도하실것을  알기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