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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은혜 로운 말씀

신앙과 삶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신앙생활과  일반 삶에서의 우리의 생활과  많은 차이점이 있는것처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세상에서는  믿는 사람의 티를 내지 않고 살아갈때가 있는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자기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한심해질때가 있고 하나님께 죄송할때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고  밖에서도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안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세상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볼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이렇게 생각한다는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항상 핍박이 있는 법이다. 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왜 성경은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돕는것이라고 했을까요?   고아와 과부를 돕는 행위는  상당히 어려운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이들의 자존심을 건들으면서 대한다면? 이들은  도움을 받는 행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경우를 볼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가식적인 행위로는 이들을 도울수 없는것입니다. 

 

과부를 돕는것은  욕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고아를 돕는것은  동정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을 돕는 행위가 경건치 않으면 이들을 도울수 없는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참된 경건함이 이러할진데?  우리가 거룩하다 경건하다고 말할때  걷으로 드러난 풍모와  행위로서의 거룩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내적인 참된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것이 바로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이 참된 사랑의 경건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할때 비로서  세상과  이웃은 우리를  비웃지 않는다는것입니다.  교회안에서의 거룩한 모습 세상안에서의 거룩한 모습은  풍기는 외모적 모습이 아니라  행위적 모습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참된 사랑을 가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하면  경건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건한 삶을 살때 세속에 물들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하게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것을 생각하면  담배나 술 유흥이나  쾌락을 즐기지 않는것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담배도 술도 하지말라 하라 이런 말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님은 우상의 재물을 먹어도 된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님은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서  작은 소자가 실족할까봐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해도 꺼리낌이 없이 할수 있지만  그것을  경건치 않다고 보는 사람들 곧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바울 사도님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담배/술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담배와 술을 하지 않아야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것이라서기 보다 그것을 함으로서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신앙인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금하는것입니다.  쉽게말해서 아직도 기독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것을 할때  오해하여 우리 기독교를 잘못이해하여 하나님을 잘못알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것을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것이지  하지 않아야 신앙생활을 하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조금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사람 저사람의 말을 들으면  이렇게 해야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곳을 쫓아다닐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뜻대로 산다고 생각하여 성령충만함을 알기 위해서 또  곳곳마다 기웃거리고  기도원을 찾아다닐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결국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절망할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만큼 확실하게 설명해 놓은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이 산상수훈을 잘 읽으면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를 찾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또한 막연하게 느껴질때가 있고  해석할때마다 자기 맘대로 해석함으로서  참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어려울때가 있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우리가  회사를 다니면  기독교인으로서  회사생활이 어려울때가 있습니다.  주일성수라든지....회식이라든지...접대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회사 뿐만일까요?  군대에서는 더더욱 기독교인으로서 사는것이 힘들고 어렵지요.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말을 들을때 정말 낙심하게 됩니다.  "너가 기독교인이냐?  그따위로 살지마라!  그래가지고 천국가냐? 그럴려면 믿지를 말아라"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다들 부족합니다.  이런말을 들으면  정말 신앙생활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죄를 범했음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오셨으니까요! 

 

이렇게 말할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분이에요.  당신같은 완벽한 의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되지만 저같이 부족한 죄인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답니다"  물론 이렇게 대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아진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런말을 하고  죄를 져도 상관없겠구나? 하고 착각할수 있으니 그것이 또한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여 의인되게 했는데?  언제까지 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것 말입니다.  과연 의인의 삶!  예수님이 바라는 삶을 살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고민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해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이 정복하고자 할때  이스라엘 혼자서 그것을 하게끔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함께할테니 두려워하지말고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가나안은  천국을 모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길은  혼자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싸움인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땅 사람들은 거대하고  힘이 장사라서  아무래도  하나님이 애굽에서 우리를 불러내어서  여기에서 죽게 하려는 모양이다 라고 하나님을 원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자기를 믿지 않음으로 저주를 내렸습니다.  이들은 결코 가나안에들어가지 못하고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그 후손들만 가나안에 들어가는것을 허락했습니다.  결국 뒤늦게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들어가게 되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패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어쩔수 없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40년동안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버린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믿음없음을 책망하여 광야에서 훈련시키신것입니다.  그렇게 훈련을 시킨후에  그 후손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땅에 들어가게된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수 있는 자들은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혼자서 분투하여 싸우고 이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되심으로 우리가 이땅을 살아갈수 있고 가나안을 정복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힘으로 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땅에서의 삶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부족한것이 있다는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그런 행위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더 쉽고 안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직장생활할때  직장에서의 우리의 태도는  한마디로  이 회사에서는 내가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회사를 위해서 일하고  회사가 잘되도록 애쓰는것이  하나님을 믿는자로서의 참된 모습입니다.  회사를 위해서 야근도 해야하고  주말에 출근도 해야하고  출장도 나가야하고  회사의 일과 교회의 일이 겹쳐서  만약  두개의 선택상황에 놓인다면? 회사를 위해서 교회를 잠깐이라도 희생시킬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것입니다. 

 

수련회나 부흥회  교회의 특별한 행사를 위해서  회사를 희생시키고  결국 회사를 퇴사를 하면서까지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할까요?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하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더 충성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교회가  우리의 삶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모임일뿐입니다.  그 모임을 위해서 내 삶을 희생하는것은 미련한 짓인것입니다.   회사는  내 삶의  기둥입니다.  회사를 위해서 충성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위해서 충성한다면? 회사의 많은 사람들은  미친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것이고 결국 견디지 못하여 회사를 나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부흥회와  회식이 겹쳐있다면?  저는  회식에 참석하라고 할것입니다.   회사의 회식은  회사 동료와의 관계를 맺는 자리로서 이 자리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만약 회사에서 내가 기독교인이라는걸 안다면 더더욱 회식에 참석해야 하는것입니다. 술/담배?  요즘은 술이나 담배를 권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내 건강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고 하면 크게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물론 술이나 담배를 피우시는 기독교인들은  피워도 상관이없고 마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독교인것을 아는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이렇게 해도 되는거냐?  좀 이상하다고 할때는  되도록이면 안하는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우리의 태도에 의해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회사를 위해서 일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회식이나  모임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동료유대관계를 돈독히 할때  오히려 그런 태도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좋게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도 있는 계기가 될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자가 늘어날때  신우회를 조직하여 더욱더 회사와 동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늘어날때 비로서 참된 하나님의 뜻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크게 문제될것은 없지만  물론 이런경우에도 우리는 서로의 의무를 다 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남편 믿지 않는 아내  믿지 않는 남편 믿는 아내의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경우 참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경우  믿는 자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했는가?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핑계로  남편보다 하나님을 더 위하고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위한다고 할경우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의 불만은 엄청 커질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면서 이런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이 만났을때  둘다 교회를 나오거나 둘다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둘중에 하나가 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그런데  둘다 교회에 나오면 다행인데  나오지 않는경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믿는 자를 불쌍히 여기거나  정죄를 하는경우를 보게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따라서 교회를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믿지 않는 아내를 따라서 교회를 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은 이런 말은 틀린것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린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남편을 위하는것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아내를 위하는것이 정답인것입니다.  

 

결혼이전에는  독신으로서 살때는  누구의 간섭도 없으니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되면 서로에게 책임이 주어지니  서로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것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와 남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하여  교회에만 신경쓰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가정의 행복은 깨질것입니다.  만약 이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것이 믿는자의 책임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까닭에  잘못 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잠깐동안이라도 교회를 떠나있어도   그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많은 신앙인들 믿음의 형제,자매님들은 오히려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면서까지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기독교인들보다 더욱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사는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입니다.  먹을때도 마실때도 잠잘때도  무엇을 할때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입니다.   아내를 위하고 남편을 위하고  청소하고 밥을 하고  설겆이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이런 모든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아는것이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인것입니다.

 

걷으로 거룩하고 경건한것이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내이웃  곧 내 아내와 자녀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을 생각하며 사는것이  진정 경건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라는것입니다.  

 

신앙을 판단할때 우리는 술/담배/교회생활/경건/거룩/정직....이런것으로 우리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의 내면이 아닌  겉모습으로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신앙은 결코  겉모습이 아닙니다.  내면이고 참된 신앙은 그 본질부터 거룩하게 나타나야 하는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이 경건의 모습입니다.  이들을 돕는 행위는  진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곧  참된 신앙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도 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입니다.  모든것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동하는것입니다.  내 하나님이 도우시니  내가  가나안을 정복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믿음으로 내안에 있는 죄악들을 이겨나가는것  그것을 내힘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는것이 하나님을 믿는 삶인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죄악은 우리의 힘으로 이길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길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것이 우리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임으로  그들이 멸망을 당할 믿음이 없는 자들이건 우리와 함께 형제된 자들이건 모두가 다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고  먼저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먼저된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중될지언정  나중될자들을 불러 먼저되게 만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는것이지만   이방인인들 중에서도   복음으로 불러 구원받은 자들은 나중에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람들과의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곤란함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어려움과 곤란함을 이겨내는 방법 그 지혜는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지 순결하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죄악된 마음  더러운 마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활용하는것이 아니라  순결하고  참된 마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활용하라고 하시는것입니다.   세상이 다 악한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선하다고 한것을 우리가 악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악하다고 말할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이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부름을 입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를 갖는것이 아닌지?  함께 나누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