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공부/언 약 론

로마서 11장 박윤선 목사님 강해입니다.

요즘 제가 쓴 글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부분을 인용해서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분별을 위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지금 그것을 여기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 강해를 읽으면 제글이 조금더 이해하기 쉬워질것입니다.

 

 

 

1~5절 나도 이스라엘 인이요.

 

이 말씀은 바울 자신도 불신앙하던 이 스라엘 사람이었으나 마침내 회개하고 믿는 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때에 불신앙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택함을 받은 자들이 또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엘리야도 자기 외에는 주님을 아는 자가 없는 줄 알고 말하기를,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때에도 하나님의 선택 속에는 7천명이나 되는 많은 수효가 있어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은혜로 됨”과 “행위로 됨”의 두가지 원리가 현저하게 대조된다. 은혜Fh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의대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심이고,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함은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구원 받은 관계에 있어서, 불완전한 은혜라는 것은

없다. 곧, 은혜가 반분을 차지하거나 혹은 인간의 공로와 혼합되거나 할 수 없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역설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근거이다.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짐”은, 그들의 불신앙을 원인으로 한다. “완악함”은,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도 느끼지 못하는 심령의 철면피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완악하게 하면,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더욱 완악하도록 내버림이 된다.

 

8-10. 이 구절들은 신29:4, 시69:22, 사29:10 이하를 혼합 인용한 것이다. 여기 있는 말씀이 보여주는대로, 하나님은 그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대하여 너무 냉정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1) 그들이 저렇게 완악해지며 혼미해짐이 그들의 죄 값으로 받은 보응이다. (2) 그러면, 같은 사람들 중에서 어찌하여 혹자는 선택을 받고 혹자는 버림을 받아 완악해지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난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방의 어떤 권리에 의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실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불의에 속하지 않는다.

 

8.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곧, 구원 받기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 심령이 점점 어두워감을 가리킨다. 사람이 죄인이므로,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누구든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무시하면, 그 심령의 눈은 더욱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것과 같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일은 더욱 안될 것이다.

 

9.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덧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이 말씀을 기록한 다윗의 처지는, 일반인이 아닌 하나님의 대언자의 처지였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고하실 저주를 대언함이다. 혹설에 “밥상”이란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로서 가지는 성찬상과 같은 종교적 행사의 것이라고 하였다.(출24:11, 레위기6:16 7:18, 20: 민15장 시69:22)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의 종교적 행사에서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는다.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심령의 눈이 어두워짐은,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치 않는 자들이 받는 하나님의 벌중에 하나이다. 그들이 진리를 순종치 않으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실 이유가 없다. “등이 굽게”됨은, 일설에, 그들이 심령적으로 노예됨을 가리킨다고 하나(Meyer), 율법에 노예됨을 가리킨다는 학자도 있다.(Greijdanus)

위의 인용문은,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저주한 말인 동시에 예언이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고 자력으로 율법을 실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에게 응하였다.(Greijdanus)

 

11-15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지 아니하므로 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됨을 말한다.

 

11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넘어진다”는 말은 소망없이 실패함이고, “실족한다”고 함은 회개하여 바로 될 수도 있는 실수를 말함이다. 복음을 받는 일에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았으나, 영원히 그리하지는 않는다고, 바울은 여기서 말한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여기 “넘어짐”이라고 번역된 헬라원어는 “실족”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은것은 그들의 실족이다. 저희가 이렇게 실족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비일비재로 말하기를, 자기가 이방으로 가는 이유는, 이스라에이 복음을 받지 않는 까닭이라고 하였다.(행 13:4-6,18:6,28:25-28). 여기 관설된 “시기”는 나쁜 의미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나보다 부요한 자를 보고 부러워하는 의미의 시기를 말함이다.(증오나 악독이 없는 것임).

 

12.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것은, 어떤 장래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 신앙으로 돌아오는 영적 대부흥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이 아래 14-15절에 재설된다.

 

13.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것은, 바울이 이방사도의 직임에 충성함을 말함이다.

 

15 세상의 화목.

이것은, 세상 사람들, 특별히 이방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화목함을 가리킨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곧, 후일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받아 들임이 될 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 시기(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가 임할 것이다.

 

16.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민 15:20을 보면,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곡식 가루를 바치어 그 해의 모든 수확을 다 바친 것으로 대표하게 한다. 그렇게 하므로 그 해의 음식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된다. 우리 본문에 떡 덩이도 거룩하다는 뜻이 이 뜻이다. 그러면, 여기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무엇을 비유하는가?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조상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거룩히 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것만큼, 그들의 자손들도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도 마침내 회개하고 복음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여기 “뿌리”는 “처음익은 곡식가루”처럼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의미하고, “가지”는 그 자손들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바울이 접목법을 바로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접목법은, 돌감람나무 뿌리에 참감람나무 가지를 가져다 붙이는 것인데, 바울은 그와 반대로 말하였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학자는 헬라에 그런 접목법(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바울의 사용한 비유의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접목법의 수속을 그대로 다 따라서 말하기를 목적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 법칙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도리여 일면 자연 법칙을 거스리면서 말하였다.(24절에 “본성을 거스려”란 말이 있음)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이 교회에 입참하게 된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특수한 일인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의미로 즈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이방인들 중에서 얼마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체납함이 하나님의 긍휼에 속한 이적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사도는 실제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접목법을 말한 것이다.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17~18 여기서는,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접붙인 비유를 가지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에 입참한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동시에 공의로우사 교만한 자를 벌하시기 때문이다.

 

19~20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곧,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불신앙하였음으로 택한 백성의 단체에서 제외되었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신앙으로 거기에 영접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교만하면 안될 것이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이것은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고, 받은 은혜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그릇되게 말한다. “신앙은 보이는 사닥다리가 아니어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기어오를수 없다.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 함은 의심스러운 말이니, 개혁자들이 오해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그의 엄위는 매일 아침 변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이교 사상보다 악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르트가 개혁주의 신학을 전연 오해한 말이며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우리의 본문은 교만을 금하는 것이고, 확신을 금한 것이 아니다. 확신은 교만이 아니고 오히려 겸비의 원천이다.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그 황공한 은혜에 감격되어 두려워하며 떨 수 밖에 없다.

 

21-22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원가지”란 말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너”란 말은 이방인 신자를 가리킨다. 만일 이방인 신자들이 불신앙한다면, 그들도 역시 별수 없이 제거 될것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동시에 엄위로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절)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는 죄인들은 겸손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엄위도 기억하고 방종과 거짓된 안정감을 멀리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불신 유대인들도 벌하셨기 때문이다.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도 앞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소망이 있음을 계시한다. 버림 받은 그 민족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다시 영생의 길로 돌아올 날이 온다. 가지는 뿌리를 발생시키지는 못하나, 뿌리는 가지를 발생시킬 능력과 자유가 있다. 그처럼 하나님은, 새로이 자기 백성을 유대인 중에서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 중에, 특히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고 한 문구가 강조되어 있다.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라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라.

 

여기 이른 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을 비유한다. 이방인들은, “본성을 거스려”(본래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참감람나무)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본래 참감람나무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더욱 교회에 받아들임이 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신앙이 없어도 그렇게 된다는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음과같은 의미를 가질 분이다. 곧,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었다. (3:1, 9:4-5) 다만 그들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신앙으로 돌아오면 조상들에게 영적으로 참되이 속하는 자리에 회복된다.(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임)는 뜻이다. 족장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 되는 자들의 계열에 있어서 조종이다.

 

25 이 구절부터 32절까지는, 신자들로 무엇을 아는 듯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일대 오묘를 소개한다. 하나님의 오묘한 일들을 앞에 두지 아니하면, 우리는 경솔해지고 또 교만해지기 쉽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 소개한 오묘는 다른 것이 아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 받은 뒤에는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사실이다. 그 이유를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

 

스스로 지혜있다 함. 이것은, 실상 무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비밀”이란 말은 하나님이 계시하시기전에는 사람들이 모르던 것을 이제 계시하셨음으로 알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충만한 수”란 것은, “충만”이란 말 뿐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대한 복음 전도의 완필을 말함이다. 딤후4;17참조. “들어오기까지”란 말은, 신앙에 들어옴을 의미한다는 학설도 있으나, 교회에 들어옴을 의미한다고 함이 옳다.(마 5:20, 7;21, 23:13 눅13:24)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여기 “더러는”이란 말씀을 보면,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시기에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약간은 복음으로 돌아오리란 것이 암시되었다.

 

26~27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여기 “그리하여”란 말은, 시간 순서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구원 받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방법을 가리킨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나라의 국가로서의 광복을 의미하지 않고, 그 민족이 복음으로 돌아올것을 의미한다. “온 이스라엘”이란 말은 개인적으로 빠짐없는 전수를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중 구원얻는 자들의 총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의 만수로서, 그가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그의 약속들이 모두 다 이루어지게 되는 인수이다.”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것을 돌이키시겠고” 이것은 사59:20의 인용이다. “시온에서 오사”란 말씀은, 하늘에서 온다는 뜻이다.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이것은, 사27:9, 59:21의 혼합 인용인 듯하다. 사32:1, 8, 16,20, 35:1-10 렘31:1-40 단 9:24참조. 여기 “저희 죄를 없이”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그 백성(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고 도말하심을 말함이다.

 

28-29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곧, 복음의 원리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이방인에게는 유익한 것이 되었다. “너희를 인하여”란 말은 “이방인들의 유익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자라. 곧, 유대인들의 본래의 신분은, 저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처지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조상들이 하나님의 계약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회개시킬날이 온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곧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시마 하신 일에 변동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대민족도 회개시키실 날이 온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약속하신것(26,27)에 대하여는 후회하심(변하심)이 없으신 것 만큼 우리는 이 사실(유대민족의 회개)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다.

 

30-31 이 구절들은 위에 벌써 나온 뜻(15,25), 곧,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결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풍부하여지고, 그 결과로 그 긍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되돌아가게 됨을 결론적으로 다시 확고히 말한다. 루터는, 이점에 있어서 요셉을 예수님의 예표로 생각하고 해설하였다. 곧, 요셉이 이방에 팔려갔으나, 그가 이방(애굽)을 부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로 그의 부친과 형제들도 다시 요셉에게로 와서 구제를 받았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가서 구원의 축복이 되었다. 여기에 따라서 유대인들도 마침내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32 이 구절의 의미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불신앙(“순종치 아니하는 강누데 갇히움”)의 한 때가 있으나, 마침내 그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구원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 둘째번“모든 사람”이란 말은 다만 구원받을 사람들의 총수를 말함이다.

 

33 이 구절 이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찬송하는 말씀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혹은 이와 다르게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라고 번역한다. 이런 번역도 문법상으로는 이연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첫 번역을 지지한다. 고데는 말하기를 “바울의 찬송은 마치 알프스산 꼭대기에 오른자가 그 산의 장엄 무비를 관망하면서 읊은 노래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관한 선택 문제의 불가사의성에 놀라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기사는,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이 말씀ㅇ르 해석하였다. 곧 “로마서의 제목인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입술로는 다음과 같이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곧, 하나님의 하시는 것은 숨긴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찰나는 이적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타성을 역설하여 하나님에게 대한 성경의 말씀까지 위기에 붙인 것이니, 그릇된 학설이다. 바르트가 말한 이적이란 것은 “전연 알 수 없는 사건”이란 뜻이다. 바울의 이 부분 말씀(33-35)은,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행위에 대한 것이고 그의 계시 행위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다.

 

34-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것은, 사40:13의 뜻을 반영시킨 칼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에 대한 찬송이다. 땅 위의 위대한 인물들도, 하나님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40:15 고전 2:6)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비밀(25절)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은, 그의 무한하신 긍휼에 의한 선물이다. 엡 1:9참조,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빚지우듯이 책임을 지우고 그 보수를 받는 관계를 가질수 없다는 것이다.

 

이부분 33-35에 나타난 뜻은 다음과 같다. 1) 누구든지 하나님을 완전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2) 누구든지 하나님과 공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3) 누구든지 하나님께 책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 말씀은 34-35절의 이유이다. 왜 하나님은 저렇게 깊으실까? 그 이유는, 그가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유지하시며, 심판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