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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알미니안주의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본 신학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은  그 사랑하심으로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것을 고백하고  그것을 받아주시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허락하신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것이 있기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것을 깨달아야 하는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요 부활하심이고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하시는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라는것을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자들로서  하나님을 찾을수 있는 자들이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이땅에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갈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을 찾아 오신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세례요한까지도 의심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가 직접한것입니까?  그것을 알게하신 하나님때문입니까? 

 

알미니안주의 자들도  성령의 은혜없이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구원할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또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

<저항이 가능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이 가능한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것을 바로 궤변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성령의 은혜없이는 자기스스로 구원할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은  또 그것을  거부할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궤변입니까?

 

인간은 무능력한데?  그래서 성령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것인데? 그것을 거부할수 있다?  이걸 거부하는 자는 성령의 은혜가 없는자인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자들 곧 거듭난 자들은  이것을 거부할수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서 성경은 알미니안주의에 가깝다?  이건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알미니안주의에 가깝게 보이는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말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는줄 아십니까?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행위가 될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선택했다는 행위가 될것이고  이는 자랑이 될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부했고?  나는 선택했다?는 차별이 존재하는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요? 

 

내가 구원받은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인데  그 은혜에 대해서는 자랑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부할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면  또한 선택할수 있는 권한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선택할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결국  이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을 택할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이렇게 말하도록 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내가 알아서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해서 하는것이라는 것을 아는것이 중요한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강조하며 성령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있어서  인간의  선택권한까지 주어졌다는것입니다.  이걸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것입니다.

 

신인협력설.......

 

 “영혼의 구원에는 은총이 절대 필요하나,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첫째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하는것이 바로 신인협력설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생하는것입니다.   곧 선을 택할수 있는 자유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선을 택할수 있는 능력이나 자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서 복음을 들었다고해서  깨달을수 있는것이 아닌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땅에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율법하나 주면 그만인것입니다.  이것을 너희가 행하면? 천국가고  행하지 못하면 지옥가고......곧  유대인들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와 같아진다는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것이 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구원받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구원받은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으니 구원받을수 있는 조건을 내가 만들었다고 판단할수 있는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선물아닌것으로 만드는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사람에게 다 전파해야하고  다 들어야 하지만  그것을 들은사람들이  그 복음을 선택하는것처럼 보이고  그 선물을 받는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들은  결코 그것을 받을수 없다는것이 성경의 전제입니다.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안다는것입니다.

 

만약 인간적으로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내가 구원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바로  예수님의 비유중에  좋은 땅에 대한 비유의 말씀에서 볼수 있는것인데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같은 경우에  자기가 그 말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것이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해석을 보십시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할수 있고 믿음을 고백할수 있다면  돌밭이나  가시떨기밭의 마음을 가진자들이 그렇다는것입니다.  그들도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싹도 나고  자라기도 해서 구원받은자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게됨으로서 구원받지 못한자의 모습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이런  비유속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알수 있는것입니다. 

 

구원을 받은자가 구원을 잃을수 있다?  돌밭과  가시떨기밭은? 구원을 선물로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까?  그렇게 보입니까? 구원을 선물로 받은자들이 열매도 없이 저렇게 죽게됩니까?   구원을 받은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은자도 아니요  들은자도 아닌것입니다. 깨달은자인것입니다.  이 깨닫는것이 바로 성령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자는 말씀을 깨달을수 없는것입니다.

 

지금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 일면 맞는것이 있는것같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자라면 자기의 무능력을 인정할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선택할수 있다면? 또한 구원을 잃는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수 있게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면?  또한 내가 구원을 잃을수 없다고 하는것이 당연한것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핵심이  바로 이점입니다.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만큼은  인간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들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구원을 받는다는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물로 준 그 구원을 하나님이 절대로 뺏아가지 않는다는것입니다.  선물로 준것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준 사람에게는  채찍도 함께 주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이 구원을 선택할수 있으니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할수 있다는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안받고는 인간의 의지에달린것이고  이것을 인간의 의지로 받은것이니  인간의 의지가 약할때는 그 선물을 잃어버릴수 있다고 말하는것입니다. 

 

곧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그 차이점이 생기는것입니다.

 

성경은 누가 누구에게 쓴 책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책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의 마음을 읽어야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합니다. 편지는 상대방이 나에게  쓰는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중요합니까? 상대방의 마음이 중요합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며 편지를 읽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며 편지를 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 곧  편지가 맘에 들지 않은 사람은 그 편지를 상대방의 마음으로 읽지 않고 내맘대로 읽고 판단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맘대로 읽고  내맘대로 판단해버리고  내맘대로 해버리는것이 과연? 성경적인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성경이 읽혀지는것이지?  내가 생각하는데로 성경을 읽는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는 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는것이 아니라 내 처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 처지가 이러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 너의 처지가 어떠한지 안다?  내 말을 들으면 해답이 있다고 하는데  그 해답은 생각하지도 않고 내 눈앞에 있는  이 순간만이 더 중요한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교만합니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의 교만함이 하나님을 찌르는것입니다.  겸손한 인간의 모습  전적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전적 타락한 인간을 향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자들로서  할례자들에게 하나님이 따로 말씀하시는것이 있다는것입니다.  

 

이 할례자들에게 하는 말씀을  이방인들이 읽으면서  자기들에게 하는 말씀인냥? 착각하고 있다는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태어나기전부터 이미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하는 말씀과 차이가 있다는것입니다.   말씀의 차이는 있지만 성령의 은혜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할례를 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이 무할례자들이 되었고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수 밖에 없는 처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말씀은 이방인에게 하는 말씀과 다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혼란을 느낄수 있는것입니다.

 

곧 성경이 왜? 두가지로 자꾸 나뉘어 논쟁이 되느냐면.....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이방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는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나면서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된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을 할수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것 입니다.   율법과 믿음에서 이스라엘은 선택할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설명할때도  이방인에게는 복음이여  이스라엘에게는 새언약으로 설명되어지듯이......

 

성경은 이렇게 두가지 방향에서  언제나 해석할수 있다는것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념하여 읽어야하고  관점을 한쪽으로 통일해야 할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해석한것으로  나면서 부터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도 아니기 때문에  전적인 타락과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선택할수도 없는 그런 자들의 관점에서 해석한것입니다. 

 

곧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할수 있는것이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할례자들이나 무할례자들이나 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새언약도  예수님입니다. 이는 동일한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방인이나  다 칼빈주의에서 주장하는것처럼  전적 타락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시는것이라는 겁니다. 

 

저는 칼빈주의가  가장 성경적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놓았고 설명해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는 신본주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신본주의요!  하나님중심이지만  알미니안은 인본주의요!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는것입니다.

 

그럼 님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님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십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보십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인간이 편집해서 만든 책입니까?   님들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음입니다.  그것을 깨닫기를 바라는것입니다.  나의 공로는 단 한치도 들어갈수 없는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