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부터 우리의 삶에서 그 의문부터 하나님께 질문해야합니다. 왜?라는 질문은 하나님께 경솔한 행위도 아니요. 경망스러운 짓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라는 질문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는가? 왜?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했는가? 왜? 하나님은 노아를 살려두어 심판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렀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인류의 제사장나라로 세우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것은 실패했는가? 아니면 보류된것인가?
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땅에 오셨는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될것인가?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진정 오는 것인가? 언제쯤 올것인가?
이런 성경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질문부터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는 해야합니다. 본질적인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철학의 근본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이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도데체 어떤 관계란 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을 알아야 한다? 도데체 뭘 알아야 하는 걸까요? 교회에 가면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어보지 못할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는 당신은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면 죄를 짓지 않고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얻고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뭐 이런 설교들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설교일까요? 설교를 듣다보면 나와 상관이 있는 것같으면서도 예배후에는 그 설교들이 하나도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왜? 설교들이 맘에 남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설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저를 내쫓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의 수장들이 나를 내쫓았지만 저는 교회의 수장들을 만나려고 한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과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위해서 그 종을 자기 민족이 사는 곳으로 보내어 배필을 구해오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위해서 고향으로 보내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나안의 여인들은 혈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혈통을 중시여기는 사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언약과 다른 백성과 혼인을 하는것은 결국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 민족가운데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혈통을 이어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그래서 자유자의 아들인 이삭은 종의 자녀들과 다른 자기혈육에서 자부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와 결혼하든 아브라함이 나중에 얻은 여러명의 자식들이 누구와 결혼하든 그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중요시 여기지 않았지만 이삭만큼은 특별한 하나님의 후손으로서 특별한 자부를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왜 자부를 그렇게 특별히 얻어야 하는지 언약의 후손이 도데체 얼마나 중요한것인지에 대해서 설교한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을 얻어 오래 살았다. 잘먹고 잘살았다가 설교의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설교가 대한민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는 설교의 기본 토대일것입니다.
설교를 비평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하려면 본문에 충실해야하고 그리고 기본적 본문에 충실한 후에 가서 복을 말해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고 남는것이 없는 허망한 말들만 듣고 말의 잔치속에서 예배를 마치니 마음이 허전해 졌습니다.
우리는 복을 말합니다. 믿고 의지하면 복을 받는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얻습니다. 복가운데 살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주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때 복을 주기 위해서 불렀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른 이유는 그를 통해서 인류와 소통하기 위해서 부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지요. 아버지라는 의미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관계있는 자들이 됩니다.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는 것이지요.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한국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 라고 하는것 자체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관계도 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게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본래 어떤 관계입니까?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모른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본래의 관계였습니다. 관게없음! 입니다. 관계없는 자 출입금지! 본래 우리는 천국과도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관계가 없기 때문에 출입을 금지당한 자들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출입금지를 풀어야 해결되고 그래야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누가 풀어줄수 있습니까? 대부분 내가 풀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자가 문을 열어야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거나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아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이었는데 관계가 틀어짐으로, 왜 관계가 틀어졌을까요? 그것은 문안에 있는 분이 복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문으로 가서 다른 분과 관계를 맺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틀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숭배 곧 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태양과 달입니다. 그리고 소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태양과 달과 소는 농사에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먹고 사는 것과 관계가 밀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고 사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것보다 더 중요시 여긴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할것입니다. 나같으면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길텐데....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돈을 더 섬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복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먹고사는데 걱정없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물질을 얻고자 이땅에서 사는것에 걱정없게 해달라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이런것들을 우리에게 넉넉히 주시라는 것 맞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구하는 것이 다 이런것들 뿐입니다. 걱정없이 살게 해달라는 것들 뿐입니다. 그것이 나쁜것은 아니지요. 단지 그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것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챙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으면 그런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썩을 것을 구하다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책망과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으면 모든것이 만사 형통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자기의 이익을 챙겨주는 것으로 착각한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것은 관계맺기라는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속성때문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으로서 쉽지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입니다. 그리고 선한 아버지되십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한 맹세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시겠다는 가나안의 언약의 맹세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말씀에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나님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이 말씀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이 잘 지켜졌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선민사상으로 이방인들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자기들만이 택함받은 자들이라는 우월감에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교만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지 않을수 없게 된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면 세상이 달라졌겠지요.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이 관계를 맺는다는것이 결코 쉬운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질투심을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인간끼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때 질투심을 이용하여 관심을 끌어보려는 행동을 하는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방인에게 그 사랑을 베풀게됩니다. 이방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이방인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이용당했다고 하면 절교를 선언하고 관계를 단절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질투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지만 그것으로 그친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대우해 주신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믿는 이방인들이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동등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생겨난 관계가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을 택할때부터 이방인을 염두해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했다는것에서 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창조했습니까? 인간을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왜 인간을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녀들 가족은 사랑의 관계의 기본입니다. 이 가족의 관계에서 이웃사랑으로 그리고 나라사랑으로 그 관계는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의 회복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높여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 위에 가장 뛰어난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모양으로 똑같이 만들어주셨습니다. 비록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다르지만 성품은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게 만들어 주신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피조물로 창조한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교만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존귀하다고 느껴지는것이 나쁜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경받아야 하는것이 결코 죄악이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없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우리 스스로 살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필요없다고 하는것! 아내가 남편이 필요없다고 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태도인지 아십니까? 이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을수 없듯이 하나된 부부의 관계또한 쉽게 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히 끊을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요청하고 사랑을 갈구 하고 계십니다.
이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될수 없습니다.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관계를 설명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세상 어느누구도 이 관계를 끊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사단이 와도 끊을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사단이 그렇게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도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어놓는것에 열중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만 한정해놓아버립니다. 우리는 받는 존재로만 만들어 버립니다.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피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중보자로 자청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인 예수그리스도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들의 특성입니다. 기성교회들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 자처한다면 그것도 잘못된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하거나 누군가를 기대어 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하니 우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해질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질수 없다면 우리에게 온전할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온전해질수 있기 때문에 온전할것을 요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어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한 대상으로 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때까지 자라시기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에 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신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진것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신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 낮아지는것은 겸손이라고 할수 있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격하시키고 경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피동적인 피조물의 존재가 아닌 능동적인 존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받으시기 원하시며 또한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남녀가 서로 사랑할때 서로의 조건을 따져보고 사랑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조건을 걸고 사랑할때 조건이 걸림이 되어 참 사랑을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때 조건을 보고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때 스스로 조건을 걸며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다고 할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조건이 필요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런 조건을 갖고 싶어하는것은 어쩔수 없는 본성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만큼의 조건을 가진 인간은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는 조건을 갖고 싶다면 우리의 존재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수 있다는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가끔 여친이나 남친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한다고 하는 유치한 행위를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 유치한 행위가 바로 하나님께 해야할 우리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잘 맺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자기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이 원하는것을 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의 회복이야 말로 복음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회복될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으며 언젠가 그 들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분명이 도래할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관계의 시작이며 또한 끝입니다. 결혼도 약속으로 이루어지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유효하고 여전히 그 약속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것을 변했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거나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거나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잘 모르는 자들의 헛된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졌다거나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지 못하고 악한 자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라면 잘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우신 분들이 계십니까? 꼭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변치 않는 분이라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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